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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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조지 오웰의 <1984>(1949)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이 쓰인 시대도 비슷하고 미래사회를 암울하게 그린 것도 그렇고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회조직이나 개인 생활면에서 파격적인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는 <1984>에 비하면 좀 더 시각적이고 감각적이었다. 미래의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개인 사생활에 대한 묘사도 남달랐다.

  '신세계'에서 인간은 직급에 따라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복제했고 어머니나 가족이라는 개념은 혐오의 대상으로 세뇌시켰다. 사회와 조직에 필요한 이념을 끝없이 반복 주입해 원하는 인간형으로 만들었고 어릴 때부터 성을 놀이의 대상으로 교육시켜 성인이 되었을 때는 상대를 바꿔가며 섹스를 즐기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물론 순결이나 결혼, 가정 따위는 반사회적인거나 혐오스러운 단어로 인식되어 입에 올리는 것도 꺼리게 되었다. 또한 '소마'라는 환각제를 통해 슬픔이나 고독이라는 개인감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과 사회가 완벽한 균형을 이룬, 어디 한군데서도 불평이나 불만이 없는 완전한 유토피아를 완성했다.

  "세계는 이제 안정된 세계야. 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단 말일세.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아. 그들은 잘 살고 있어. 생활이 안정되고 질병도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하게도 격정이나 노령이란 것을 모르고 살지. 모친이나 부친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아. 아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연인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대상도 없어. 그들은 조건반사 교육을 받아서 사실상 마땅히 행동해야만 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뭔가가 잘못되면 소마가 있지" (p274)

  하지만 버나드는 이 모든 것이 싫었다. 소마를 통해 즐거움을 얻고 적당한 대상을 골라 섹스를 하는 만인의 존재가 아닌, 슬픔이나 괴로움, 고독을 감내해야하는 온전한 자신이길 원했다.
  그는 평소 흠모하던 레니나와 함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은 신세계의 이상에서 벗어난 야만인들, 이를테면 오늘날의 아프리카 오지에 살고 있는 원주민과 같은 부류로 신세계의 해택이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있는 존재들이었다. 여기서 버나드는 신세계에 살다가 우연한 사고로 그곳에 남게 된 린다와 그녀의 아들 존을 신세계로 데려오게 된다.
  문명사회를 접한 존의 눈에는 모든 것이 비정상적일 뿐이었다. 인간은 기계장치의 부품에 불과했고 사회는 이를 운영하는 정제된 메뉴얼이었다. 인간성이나 감정이 들어갈 틈이 없는, “공유, 균등, 안정”의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신세계는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지만 실상은 외부적인 자극이나 요인에 의해 인간이 맞춰진 지극히 통제되고 폐쇄된 사회였던 것이다. 조직화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태아 때부터 조건반사를 거듭했으며 섹스와 소마를 통해 개인의 환락을 제공했다. 물론 여기에 길들여진 인간은 스스로의 감옥을 보지 못한 체 현실 속에 묻혀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야만인 존은 달랐다.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p299) 라고 외치며 탈문명을 선언한다.

  책이 발표되던 1930년대는 기술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2차 세계대전(1939~1945)의 공포가 겹쳐지던 시대였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마냥 좋게만 볼 수 없었던 시대에 헉슬리는 인류의 미래를 경고했다. 물론 멀티미디어의 폭발적인 발전이라든가 각종 질병의 정복을 내다봄으로써 보다 나은 내일 그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런 기술의 어두운 면을 더 걱정했다. 인간성 상실, 성의 상품화, 가족의 해체, 사회의 획일화 등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문제점은 ‘멋진 신세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는 존과 레니나 사이에서 극명하게 드러닜다. 존과 레니나는 서로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들이 자라온 상반된 환경 탓에 격한 오해만 불러일으켰다. 존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임으로서 사랑을 약속받고 싶어 했지만 사랑이나 결혼이라는 개념이 없는 레니나로서는 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안타깝게 비껴가는 이들의 사랑에서 인간 개개인의 감정이 배제된 전체주의적 모순, 신세계가 갖고 있는 유토피아의 허상을 아이러니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햄릿, 오델로, 로미오와 줄리엣, 리어왕과 같이 셰익스피어의 글이 인용되어 처음에는 조금 난해하게 다가왔지만 계속 음미하다보니 이야기 자체에 무게감이나 무대극 같은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켰다.
  하지만 옛날(1998년)에 번역된 책이라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부분도 종종 보였다. 원문에 충실하고자 했던 번역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매끄럽게 의역해 놓았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기회가 된다면 최근 번역된 다른 번역가의 책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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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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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쪽으로 높이 솟구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언덕 경사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경사면 일대에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중턱에서 꼭대기를 향해 크고 작은 사각형 동굴들이 무수히 뚫려 있었다. 개중에는 층층이 이어진 동굴도 있었고, 어떤 것은 동굴 하나가 다른 2층짜리 동굴에 맞먹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동굴들이 위치한 언덕 단면은 달빛을 받아 검푸른 빛을 띠었으며, 동굴들은 하나같이 움푹 파인 눈가처럼 어두컴컴했다." (p213)
  (막고굴은 둔황을 대표하는 유적지로 수많은 불상과 불화가, 불교서적이 발굴되었던 수백여개의 석굴군을 말한다. ) 

  <둔황>에서 '둔황'은 후반부에 잠시 나올 뿐이다. 하지만 그 전편에 흐르는 장엄함은 돈황의 모습과 비견될 만했다. 모래산(명사산) 절벽 끝을 가득 메운 불교문화의 보고는 수천년의 시간의 거치면서 많이 낡고 퇴색되어 버렸지만 그 깊은 곳에 감추어진 기원과 바램은 소설 전편을 감돌고 있었다. 불교에 대한 각별한 조애가 없더라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서사를 통해 역사를 되세김질해온 인간의 이상과 고대 서아시아(위구르족)의 문화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진사시험에 낙방한 조행덕은 죽음도 불사하지 않던 위구르족 여인을 통해 서하 지방과 그곳에 만들어진 문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자석처럼 이끌린 그는 고향(송나라)을 등진체 서하로 여행을 떠난다. 서하 지역은 서방과의 무역거래가 시작되면서 그 가치가 높아지고 있었지만 거란과 대적중인 송나라의 외면으로 인해 서하국이나 토번에의해 실질적으로 점령되고 있었다.
  상단을 통해 서하에 들어온 조행덕은 우연히 서하국의 병사가 되었고 거기서 서하군 장수 주왕례와 위구르 왕족 여인을 만나다. 왕족 여인과 하룻밤을 보낸 조행덕은 흥경으로 서하어를 배우러 떠났고 그 사이 주왕례는 왕종 여인을 연모하게 된다...
 
  조금 진부할 수도 있는 스토리지만 빠르게 전개되는 사건과 적당한 양념들 합쳐져 지겨운 줄 모르고 읽었다. 사막의 광활함이나 전쟁의 잔혹함, 남자의 욕망이나 애틋한 사랑이 이야기의 흥을 더했다. 유비 중심으로 중국 역사를 서술했던 '삼국지'처럼 조행덕이라는 일개 평민을 통해 실크로드의 시작과 그 중심에 있었던 도시들의 흥망을 이야기했다. 
  앞서 말했던 둔황은 서역과의 무역거래가 이루어지던 길목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로 사막을 관통하는 실크로드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도시다. 작가도 지역적인 특징 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큰 의미를 둔 것 같다. 수많은 벽화와 불상이 있었던 불교문화의 보고였지만 문화재에 대한 이해부족과 이민족의 약탈로 껍데기만 남아버린 지금의 모습에서 유와 무가 혼재된,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인간의 애처로운 모습을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곧 둔황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로 여행을 떠난다.  아마 몇 일 후면 둔황의 막고굴 앞에서 뜨거운 땀을 훔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을 거쳐갔던 조행덕의 영혼을 기억하기에 쉬 지나칠 수 없지 싶다. 막고굴의 어두운 동굴 속에는 조행덕의 이상과 사랑, 열정이 여전히 숨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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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문 뒤의 야콥
페터 헤르틀링 지음, 김의숙 그림, 한경희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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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굉장히 초초했다. 소설은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마무리 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과연 야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 있을까? 이제 몇 페이지도 안 남았는데 작가는 과연 어떻게 수습하려고 계속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거지? " 하는 조바심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극적으로 풀려버린다. "아하! 그래, 이거면 되겠군." 하며 막막했던 가슴이 시원스레 뚫려버렸다.

  야콥, 그 이름도 그렇지만 <파란 문 뒤의 야콥>이라는 제목도 조금 낯설고 이국적이었다. 마치 이슬람 문화권의 이야기인 것도 같고 동화나 우화 같은 느낌도 받았다. 하지만 이 책을 접한 지는 좀 된다. 몇 년 전부터 학생들에게 줄 책 선물을 고르려다가 저렴한 가격과 좋은 평들에 끌려 두세 권을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때마나 내가 직접 읽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책을 고르면서 접했던 대중매체의 분위기에 이미 질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직접 펼쳐드니 그간의 느낌과는 다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청소년용이라는 단순한 범주에 넣기에는 상당히 심오한(?)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죽으면서 일어나는 주변의 변화에 민감해진 야콥이 상상속의 대상과 이야기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린다는 이야기지만 단순히 한 아동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했다기보다는 정신병리학적인 관점이 추가된, 일종의 사례집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정신분열증이나 다중인격과 같이 영화에서나 봐왔던 내용들을 좀 더 사실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심심풀이 소설로서 읽기에는 그 속에 깃든 심리묘사와 행동패턴이 예사롭지 않아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기승전결이 분명한 보편적인 소설과 비교하면 색다른 경험이었다.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독백과 내레이션으로만 구성되는 일인극을 관람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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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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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여름, 나는 부산시민회관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엄마는 방금 시작된 LA올림픽 개막식을 같이 보자고 했지만 초등학생이던 나에게는 몇 시간씩 계속되는 개막식보다는 김청기 감독의 여름방학 특선만화영화가 더 구미에 맞았다. 아무튼 무더운 도심의 거리에는 버스와 택시, 그리고 막 붐을 타기 시작한 자가용들이 넘쳐나고 있었고 냉방이 안 되는 버스 안에서는 멀리 이국땅에서 벌어지는 올림픽이 중계되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의 기억은 뿌연 차창을 내다보는 것처럼 희미해져버렸지만 그렇다고 1984년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개개인의 기억 속이나 도서관의 책장, 영화의 장면 속에서 숨어들어 훗날을 회고할 뿐이다. 다양한 매체로 부활해 현실을 기록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의 기록은 부정되거나 현재를 위한 도구로 재구성 되었다.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의 기록을 조작하고 조작된 기록은 곧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쟁은 주민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텔레스크린'을 통해 개인의 감정까지도 수시로 감시했다. 특히 '이중사고'를 통해 개인의 생각까지도 통제하고 있었다.
  "'이중사고'는 '영사'(영국사회주의)의 핵심이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그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불필요해진 사실은 잊어버렸다가 그것이 다시 필요해졌을 때 망각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며, 객관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으로 언제나 부정해 버린 현실을 고려하는 등의 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중사고'란 말을 사용할 때도 '이중사고'를 해야 한다." (p298)
 
  작가가 소설을 발표한 시기가 1949이었으니 대략 삼사십년 정도의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당시의 상황으로 봤을 때도 놀라운 해안인 것 같다. 오웰이 살았던 당시(1930, 40년대)가 산업화의 결과로 물질적은 풍요는 이뤄냈지만 빈부격차나 대량실업, 사회주의의 등장 등 대단히 혼란스럽고 격변하는 시기였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극한 대립상황 속에서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는 지성인의 방황이었을까.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대해 걱정스러운 시선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는 허울만 좋은 '주의'나 '이즘'의 맹점을 정확히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자본주의는 물질만능주의와 부의 양극화를 초래했고 사회주의 역시 만인의 평등을 내세워 특정 집단의 이익만 챙겼다. 이념이야 어떻든 지배 계급은 결국 다수의 민중(노동자)을 지배하면서 세력 확장에만 열을 올렸다.
  작가는 시간이 흐르고 사상이 바뀌어도, 여전히 혼란스럽고 궁핍한 현실을 생각하면서 <동물농장>과 <1984>를 쓰지 않았을까. 눈앞에 펼쳐진 갑갑한 현실은 벗어나고 싶었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외부적인 요건보다는 인간의 내부적인 노력에 의해서 유토피아를 찾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몇 세대가 지난 책이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조지 오웰의 고민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책의 주인공 윈스턴은 거대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사소한 기호부터 정치적 신념은 물론 이성에 대한 사랑까지도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로부터 강요된 순종은 자신을 변화시켰고 나아가 바뀌어버린 자신마저도 인지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개인'은 사라지고 사회와 하나가 되었다.
  거창한 사상이나 이념 논쟁은 수면 아래로 사그라졌지만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구속하고 조정하려는 '사회'와 이에 대항하는 인간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가족의 생존과 개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위는 끝이 없지만 이에 대처하는 정부와 기업은 태평스럽기만 하고 이를 지켜보는 우리도 이네 잊어버리고 만다. 어쩌면 우리의 대부분은 이미 여유와 편리, 돈과 명예라는 미끼를 통해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렸는지 모르겠다.
  1949년에서 1984년, 2011년에 이르는 반세기의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 속에 숨어있는 '전체주의'의 어두운 일면은 여전한 것 같다.


( freeism.net ) 문성만, 미래, SF, 고전, 책, 독서, 독후감,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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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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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순정>(<도망자 이치도>)에서 이미 봐왔듯 시공을 초월한 독특한 분위기와 끊임없이 터지는 유머로 많은 이의 신뢰를 받는 작가, 성석제.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될 만큼 ‘재미’라는 요소를 똘똘 뭉친 작가다. 그는 반복적인 비유와 허를 찌르는 역설로 독자를 빨아들였고 독자는 그의 글을 통해 고루한 일상을 탈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마디로 성석제표 롤러코스터라고나 할까.

 <왕을 찾아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빠른 사전전개와 거침없이 쏟아지는 유머, 거기다 오감을 자극하는 폭력성까지 더해져 최고의 재미를 제공한다.
 ‘지역’의 왕으로 군림했던 마사오(박정부)의 부음을 듣고 달려간 나(장원두). 그곳에서 마사오의 지난 행적과 그의 죽음 뒤에 벌어지는 세력다툼을 보게 된다. 결국 나의 옛 친구인 제천(박제천)이가 잔머리와 세치 혀로 왕좌를 차지한다. 그는 조직의 이인자까지 올랐다가 쫓겨난 뒤 옛 세력을 규합해 지역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한 지역을 풍미한 일종의 폭력사라고 해야 하나.... 여기서는 특정 지명 대신 ‘지역’이라는 대명사를 그대로 끌어 썼다. 모호한 듯 보이는 이 설정을 통해 허구 속의 공간이 독자 개개인의 지역으로 되살아났다. 누구의 도시도, 누구의 공간도 아니기에 오히려 만인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내가 딛고선 이곳이 소설 속 무대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폭력이 갖고 있는 한계는 여실해 보였다. 폭력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인간사의 변화무상함을 그리고는 있지만 겉으로 드러난 무협활극에 비해 깊이가 다소 부족해 보인다. 달콤하게 입안을 휘감는 인스턴트식품의 가벼움이랄까. 내 몸 저 깊은 곳으로부터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다. 재미라는 성석제 님의 전매특허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계속되는 단맛에 입안이 얼얼해버릴 정도였으니 신맛, 쓴맛과 같은 깊은 맛을 찾게 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여전히 최고의 재미를 보여주는 작가, 성석제. 다음번 작품에서는 좀 더 변화된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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