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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평점 :
영화 <용의자 X>(한국, 2012)라는 류승범 주연의 영화를 보고 그 원작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헌신'이라는 단어가 잘 와 닿지 않았는데, 용의자와 X, 그리고 헌신이라는 단어가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헌신'이라는 단어가 퇴마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주술적인 느낌으로 다가와 선뜻 영화 보기가 망설였는데, 책에 대한 찬사가 워낙 많고, 영화평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주저하지 않고 봤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살인사건을 둘러싼 치밀한 두뇌 싸움과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 매력적이었고, 덩달아 일본판 영화까지 찾아봤었다.
이번 <용의자 X의 헌신>은 추리소설을 즐겨 본다는 지인에게 선물하려고 구매한 책인데, 긴 연휴가 있어 내가 먼저 읽게 되었다. 사실 영화와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400페이지가 넘는 두께가 첫 장을 넘기기에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대략적인 이야기와 결말을 알고 있기에 더 쉽게 접근했던 것 같다. 추리소설에서 내용과 결말을 안다는 것이 흥미를 반감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겠지만, 추리소설이나 두꺼운 외국소설 같은 복잡한 이야기나 등장인물이 잘 혼동하는 나(?)의 경우에는 오히려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영화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섬세한 묘사와 깊이 있는 구성까지 찾아보는 재미가 있으니...
기대처럼 책은 술술 넘어갔다. 일주일이 넘는 긴 연휴 기간 중 초반 며칠 만에 다 읽었으니 말이다. 수학 이외에는 잘하는 것도, 흥미있는 것도 없는 이시가미는 옆집에 이사온 야스코라는 이혼녀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재결합과 돈을 요구하며 막무가내로 접근하는 야스코의 전남편을 그녀와 그녀의 딸이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을 알게된 이시가미는 야스코 모녀의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해 천재적인 머리로 사건을 재구성한다.
경찰은 그녀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사건을 풀어나가려 하지만 이를 예상한 이시가미의 계획에 따라 좀처럼 실마리를 잡지 못한다. 사건 당일 야스코의 행적은 뚜렷했고 별다른 용의점도 없었다.
이때 이시가미의 옛 친구이자 물리학자인 유가와가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조금씩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이시가미도 이럴 경우를 대비해 최후의 대책을 세워놓았던 것. 그는 야스코를 짝사랑하고 있는 스토커로 위장해 사건을 마무리하려 한다.
이시가미와 유가와의 두뇌 싸움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치밀함에 더욱 놀라게 된다. 이미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주지시킨 후 진행되는 소설이지만, 그 풀이과정에서 보이는 치밀함과 반전이 눈을 땔 수 없게 만든다.
이시가미는 야스코에 대한 끝없는 헌신으로 더 큰 사건을 만든 뒤, 그녀에게 향한 화살을 자신에게 돌려놓고자 했다. 양파 껍질같이 여러 겹으로 위장된 사건은 야스코의 범죄는 물론 모녀가 느낄 수 있는 미안함과 죄책감까지 돌려놓게 설계되었다.
소설은 수학 밖에 모르는 한 범생이를 한 여자를 흠모하던 순박한 청년으로 만들다가 갑자기 편집증적인 스토커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는 무자비한 살인자로 바꿔버리면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했다. 치밀한 구성과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은 깊은 탄식과 놀라움으로 책장을 덮게 한다. 소설 속 주인공보다 이를 구성하고 창조한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감탄하게 된다.
소설 속 용의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을 이야기했다. 야스코는 단란했던 지난날의 가족과 지금의 딸을 지키며, 이시가미는 수학에서 찾기 힘든 출구를 그녀에 대한 무한한 헌신으로, 이시가미의 계획을 확인하고 찾아낸 유가와는 친구와의 신뢰와 과학적 사고에서... 모두 이유와 방식은 다르지만 자기 나름의 길을 찾고 있지 않았나 싶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여러 인물들의 행복 회로를 살인사건과 추리라는 톱니바퀴에 맞춰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들어 냈다.
인터넷에 나와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파일을 보니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로 일했다고 나온다. 아직 그의 많은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전후가 깔끔하고, 사건을 풀이하는 설명과정이 상당히 친절하고 상세했다. 복잡한 전자제품의 상세 설명서를 보는 것 같이 꼼꼼히 읽기가 수월했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한번 우리 영화 <용의자 X>를 볼까 하고 넷플릭스를 열어보니, <자네 잔: 용의자 X>라는 이름의 인도영화도 올라온 것이 보였다. 과연 인도 버전에서는 어떻게 묘사하고 이야기를 꾸려갈지 벌써 궁금해진다. 책도 좋지만,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본, 한국, 중국, 인도의 다양한 영화도 비교해서 보면 재밌을 것 같다.
늦가을, 긴 연휴가 히가시노 게이고에 의해 치밀해지는 느낌이다.
* 다음은 영화화 된 <용의자 X의 헌신>(왼쪽부터 한국, 일본, 중국, 인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