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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 종이 위에 유럽을 담다
리모 글.그림 / 재승출판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작년부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릴 적 기억이 숨어있는 본가의 거실 모습을 이면지에 그려보게 된 것이 그 시작인데 어색하고 엉성한 스케치였지만 어릴 적부터 동경해왔던, 그 무엇을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에 살짝 설레기까지 했다. 점과 선이 그려지고, 면이 겹치면서 바닥과 벽이 되었다. 여러 각도에서 튀어나온 선들은 가구가 되어 공간을 채웠다. 지저분한 낙서질 같았지만 한 팔을 쭉 뻗어 지긋이 바라다보니 그럴듯한 형태를 갖춘 그림이 되어 있었다... "그래, 그림을 그려보는 거야!"
출장을 마치고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김현길 님의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을 펼쳤다. 사진으로만 봐왔던 유럽의 풍경들이 세세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문득 사람으로 가득한 덜컹거리는 지하철이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아저씨,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줌마, 이어폰을 귀에 꼽은 여학생의 모습이 유럽 현지인처럼 느껴지며 마치 유럽 도시의 한 지하철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김현길 님의 여행기와 그림에 취해 있다보니 세상 모든 것이 다 아름다운 그림으로 변해버렸다.
사진은 형상의 표면만 담을 뿐이지만 그림은 대상의 숨겨진 주름까지 세세하게 느끼게 해준다. 비록 여행으로 스쳐가는 짧은 만남이라지만 그 시간까지도 촘촘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한 여행자의 시간이 기억난다.
"여행 중에는 유난히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천천히 흘러간다는 것은 하루가 지루하게 지나간다는 게 아니라 하루의 기억이 굉장히 촘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p132)
이렇듯 그림은 세상을 좀 더 촘촘히 담아낼 수 있는 도구인 것 같다. 언제고 시간이 난다면 긴 시간을 가지고 여행을 해보고 싶다. 마음에 드는 풍경을 오래도록 지켜보며 마음속에 촘촘히 새겨넣고 싶다.
유럽 7개국(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터키)을 돌려 드로잉 여행을 한 저자는 책 말미에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선물을 아래와 같이 적어 놨다.
"두려움 속에서 느긋해지는 법을 배웠다. 타인의 삶과 가치관을 이해하는 너그러움을 얻었다. 사물을 오랫동안 깊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일상의 사소함에 숨어 있는 행복의 달콤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잘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떠나온 여행이었기에 귀국 후의 생활에 대한 불안감도 컷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 선택한 자신의 여행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이번 여행은 가슴 속에 숨겨진 자신을 발견해가는 성지순례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그리듯 스스로를 채워나가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
<리모의 드로잉북 : http://blog.naver.com/zazz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