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선란, 그녀의 소설에 푹 빠져버렸다. SF 소설은 외국 고전 외에는 많이 접해보지 못했고, 이야기가 엉성하거나 너무 비현실적일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잘 읽지 않았다. 하지만 <천 개의 파랑>을 읽으면서 이런 편견과 나의 경솔함을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되었다. 완전히 새롭고, 역동적이고 매혹적이면서도 섬세하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작품이었다.

안드로이드 기수인 콜리는 멋진 하늘을 보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진다. 프로그래밍된 데이터로 움직이는 로봇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지만, 제작 과정에서의 실수로 콜리는 자신이 타는 말(투데이)과 교감하며 감성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말의 생명력과 즐거움을 이해하고, 하늘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이다.

콜리는 이렇게 세상에서 떨어져 고철이 되어 폐기될 운명이었지만, 연재의 눈에 띄어 그녀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연재의 언니 은혜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은 뒤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었고, 소방관이었던 아빠가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엄마 보경은 식당을 운영했다.

로봇공학에 탁월한 소질을 가진 연재는 망가진 콜리를 수리하는 한편, 연골이 닳아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투데이(경주마)를 살리기 위해 경주에 다시 출전시키려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몇 번씩 놀라게 된다. 소설이 허구라고는 하지만, 그 속에 녹아 있는 다양함과 섬세함은 깊이 생각하거나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나오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점점 로봇으로 대체되어 가는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는 사람들, 첨단 장비 도입이라는 명목 아래 기본적인 안전이 소홀해지며 발생하는 문제들, 장애인의 경험과 그에 대한 편견 어린 시선, 반려동물에 대한 순수하지만 위험한 생각들까지. 작가의 독특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책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래서 자꾸 책날개에 실린 작가 소개를 읽게 된다.

동물과 사람 사이에 로봇을 등장시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알면서도 외면했던 생명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나 존재하는 생명은 없다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살아 있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 ‘비스’라는 이름의 개를 키운 적이 있다. 서면 육교 위에서 산 똥개였고, 2~3년 정도 함께 생활했던 것 같다. 그런데 가족이 며칠간의 겨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 개는 딱딱하게 얼어 죽어 있었다. 아마도 동네를 뛰어놀다가 쥐약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죽은 것 같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죽음은 낯선 것이었지만, 따뜻한 체온을 가진 동물이 통나무처럼 굳어 있던 모습은 더욱 낯설게 다가왔다. 마치 강아지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말티즈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예전처럼 쥐약을 먹을 일도 없고, 밖에서 키우는 환경도 아니지만, 예방접종과 관절 수술까지 하며 비교적 오래 함께 살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팔자’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식은 밥을 먹으며 집을 지키는 똥개였다면, 지금은 건강관리와 생일상까지 챙김 받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여전히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만들어낸 기구한 운명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누구에게는 단순한 소유물일 수 있지만, 누구에게는 부모나 형제 이상의 가족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p286)

빠른 속도로 달려 가장 먼저 결승선에 도착해야 하는 경주마의 세계는 “빨리빨리”를 외치며 끝없는 경쟁을 강요하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이런 숨가쁜 순간 속에서도,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나 이외의 존재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콜리는 가지고 있었다. 차가운 알루미늄 속에 숨겨진 따뜻함은, 빠르게 다가올 미래에도 우리가 간직해야 할 ‘파랑’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능 있는 리플리 리플리 5부작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넷플릭스를 검색하다가 <리플리: 더 시리즈>(2024)를 알게 되었다. 스토리도 탄탄하고 평가도 좋아 재생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원작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검색해 보니 다섯 권으로 된 동명의 소설이 나왔고, 이 외에도 알랭 드롱의 <태양은 가득히>, 맷 데이먼의 <리플리>라는 영화로도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플리>는 총 5권으로 이뤄진 연작 소설로, 1편에 해당하는 <재능있는 리플리>는 별 볼 일 없이 살아가는 청년 리플리가 부유한 디키 그린리프를 살해하고 그의 삶을 살아간다는 범죄소설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얼굴과 생각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는 인간의 욕망을 다룬 심리, 스릴러물이라 보는 것이 맞겠다.

허접하고 볼품없는 삶을 사는 리플리는 디키의 귀국을 설득해 달라는 그의 아버지 요청으로 이탈리아로 떠난다. 리플리는 그곳에서 호화롭게 생활하는 디키를 만나게 되고, 그의 화려한 생활을 동경하게 되면서 질투를 넘어 심한 모욕감까지 느끼게된다. 결국 디키로 살기로 결심하고 바다에서 그를 살해한다. 리플리는 점점 디키처럼 입고 말하고 생각했다. 그의 풍족한 삶에 빠져들며 동일시하게 되고, 이를 숨기려 또다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또 다른 삶, 어쩌면 우리 안에 숨겨진 희망이자 욕망이 아닐까. 첫사랑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선생님 말을 무시하고 그 대학을 지원했다면,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그 주식을 계속 갖고 있었다면... 과 같은 일상적인 바램부터, 내가 톱스타이거나 대기업의 상속자라는, 혹은 엄청난 금액의 로또 당첨자였으면 하는 다소 엉뚱한 바램 역시 내가 갖지 못한 상황이나 대상에 대한 리플리의 욕심이 아닐까 싶다.

그 연장선에서 본다면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 책을 읽고 영화나 유튜브를 보는 것도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살아보지 못한 삶을 느끼고 경험해 보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여행사나 작가, 감독, 유튜버는 나를 대신하는 디키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상상은 현실이라는 단단한 기반이 있기에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저 멀리 떠날 수 있다는 것도 돌아올 곳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되돌아올 현실이 있기에 더 재미가 있고 의미가 있으리라. 현실이 상상 속에 갇혀 벗어날 수 없다면 정해진 알고리즘을 따라가는 모니터 속 게임 캐릭터와 무엇이 다를까 싶다.

리플리는 디키의 껍데기를 쓰고, 그의 삶을 살아보지만 결국 현실의 벽에 막혀 리플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내던지고 모든 것을 속이려 했지만 이는 거울 속의 일시적인 허상일 뿐 실재할 수 없었다.

그의 기행은 자극적인 릴스에 갇혀 단편적인 흥밋거리만 쫓아가는 우리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불로초를 찾아 세상천지를 돌아다니는 진시황의 꿈처럼, 있지도 않는 허상을 찾아 액정 화면 속에 머리를 처박고 사는 우리의 모습과 무엇이 다를까.

리플리의 일탈이 멋있고 낭만적이게 보일 수는 있어도 영원할 수 없는 허상이라는 점은 변함없어 보인다. 전원 코드만 뽑아버리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화면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신기루가 매혹적이기는 하다. ^^


www.freeism.ne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용의자 X>(한국, 2012)라는 류승범 주연의 영화를 보고 그 원작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헌신'이라는 단어가 잘 와 닿지 않았는데, 용의자와 X, 그리고 헌신이라는 단어가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헌신'이라는 단어가 퇴마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주술적인 느낌으로 다가와 선뜻 영화 보기가 망설였는데, 책에 대한 찬사가 워낙 많고, 영화평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주저하지 않고 봤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살인사건을 둘러싼 치밀한 두뇌 싸움과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 매력적이었고, 덩달아 일본판 영화까지 찾아봤었다.

이번 <용의자 X의 헌신>은 추리소설을 즐겨 본다는 지인에게 선물하려고 구매한 책인데, 긴 연휴가 있어 내가 먼저 읽게 되었다. 사실 영화와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400페이지가 넘는 두께가 첫 장을 넘기기에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대략적인 이야기와 결말을 알고 있기에 더 쉽게 접근했던 것 같다. 추리소설에서 내용과 결말을 안다는 것이 흥미를 반감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겠지만, 추리소설이나 두꺼운 외국소설 같은 복잡한 이야기나 등장인물이 잘 혼동하는 나(?)의 경우에는 오히려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영화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섬세한 묘사와 깊이 있는 구성까지 찾아보는 재미가 있으니...

기대처럼 책은 술술 넘어갔다. 일주일이 넘는 긴 연휴 기간 중 초반 며칠 만에 다 읽었으니 말이다. 수학 이외에는 잘하는 것도, 흥미있는 것도 없는 이시가미는 옆집에 이사온 야스코라는 이혼녀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재결합과 돈을 요구하며 막무가내로 접근하는 야스코의 전남편을 그녀와 그녀의 딸이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을 알게된 이시가미는 야스코 모녀의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해 천재적인 머리로 사건을 재구성한다.

경찰은 그녀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사건을 풀어나가려 하지만 이를 예상한 이시가미의 계획에 따라 좀처럼 실마리를 잡지 못한다. 사건 당일 야스코의 행적은 뚜렷했고 별다른 용의점도 없었다.

이때 이시가미의 옛 친구이자 물리학자인 유가와가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조금씩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이시가미도 이럴 경우를 대비해 최후의 대책을 세워놓았던 것. 그는 야스코를 짝사랑하고 있는 스토커로 위장해 사건을 마무리하려 한다.

이시가미와 유가와의 두뇌 싸움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치밀함에 더욱 놀라게 된다. 이미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주지시킨 후 진행되는 소설이지만, 그 풀이과정에서 보이는 치밀함과 반전이 눈을 땔 수 없게 만든다.

이시가미는 야스코에 대한 끝없는 헌신으로 더 큰 사건을 만든 뒤, 그녀에게 향한 화살을 자신에게 돌려놓고자 했다. 양파 껍질같이 여러 겹으로 위장된 사건은 야스코의 범죄는 물론 모녀가 느낄 수 있는 미안함과 죄책감까지 돌려놓게 설계되었다.

소설은 수학 밖에 모르는 한 범생이를 한 여자를 흠모하던 순박한 청년으로 만들다가 갑자기 편집증적인 스토커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는 무자비한 살인자로 바꿔버리면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했다. 치밀한 구성과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은 깊은 탄식과 놀라움으로 책장을 덮게 한다. 소설 속 주인공보다 이를 구성하고 창조한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감탄하게 된다.

소설 속 용의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을 이야기했다. 야스코는 단란했던 지난날의 가족과 지금의 딸을 지키며, 이시가미는 수학에서 찾기 힘든 출구를 그녀에 대한 무한한 헌신으로, 이시가미의 계획을 확인하고 찾아낸 유가와는 친구와의 신뢰와 과학적 사고에서... 모두 이유와 방식은 다르지만 자기 나름의 길을 찾고 있지 않았나 싶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여러 인물들의 행복 회로를 살인사건과 추리라는 톱니바퀴에 맞춰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들어 냈다.

인터넷에 나와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파일을 보니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로 일했다고 나온다. 아직 그의 많은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전후가 깔끔하고, 사건을 풀이하는 설명과정이 상당히 친절하고 상세했다. 복잡한 전자제품의 상세 설명서를 보는 것 같이 꼼꼼히 읽기가 수월했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한번 우리 영화 <용의자 X>를 볼까 하고 넷플릭스를 열어보니, <자네 잔: 용의자 X>라는 이름의 인도영화도 올라온 것이 보였다. 과연 인도 버전에서는 어떻게 묘사하고 이야기를 꾸려갈지 벌써 궁금해진다. 책도 좋지만,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본, 한국, 중국, 인도의 다양한 영화도 비교해서 보면 재밌을 것 같다.

늦가을, 긴 연휴가 히가시노 게이고에 의해 치밀해지는 느낌이다.


* 다음은 영화화 된 <용의자 X의 헌신>(왼쪽부터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야의 비밀 수영 클럽 VivaVivo (비바비보) 53
하이은 지음 / 뜨인돌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터넷 서점에서 수영과 관련된 책을 검색하다가 찾은 청소년 소설로, 유광으로 처리된 번쩍이는 파란 표지엔 아주 잘 생긴 남녀 한 쌍이 수영장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너무 비현실적이거나 만화 같은 느낌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청소년 소설이 갖는 특징, 가령 읽기 부담 없는 분량과 머리 아프지 않고 술술 읽을 수 있지 않을지 하는 마음에 책을 펼쳤다.

고등학교 수영 선수인 유영은 최근 기록이 향상되어 한국 신기록을 세우는 등 온 나라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아빠의 기대와 주변의 부담감으로 결승전에서 기절하게 되고 긴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유영은 잠시 쉴 목적으로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는데 이때 전학 온 무명 아이돌 그룹의 재현이 자신이 곧 있을 수영 대회에서 1등을 해야 한다며 유영에게 수영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그녀는 돈만 생기면 수영을 그만두고 어디로든 도망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승나하고, 한밤의 비밀 수영 과외를 시작한다.

삼류 드라마 같은 비현실적인 주인공 조합과 조금은 뻔해 뵈는 스토리, 단편적인 인물 설정이지만, 주변의 관심이 두렵기만 한 유영과 그 관심에 목말라하는 아이돌 가수인 재현의, 상반되지만 은밀한 관계(?)가 나름 재미난다.

아무도 없는 백화점이나 마트에 들어가 자기 마음대로 난장을 부리는 상상처럼, 불 꺼진 수영장에 홀로, 혹은 단둘이 들어가 수영한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좀 손발이 오글거리긴 하지만,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두루 재밌는 요소를 갖춘 것 같다.

특히, 폭발해버린 유영과 아버지와의 고조된 갈등이 사랑과 우정, 믿음으로 하나씩 치유되는 과정이 흐뭇하다. 좀 뻔한 결말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안정감이랄까... 아무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화려한 빛과 이를 지탱하는 그림자가 항상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공감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심야의 비밀 수영 클럽>은 물과 함께하는 수영과 비슷한 것 같다. 물은 한없이 부드러운 듯하지만 차갑고 강하며, 잡힐 듯하면서도 모두 빠져나가 버린다. 이런 물에서 균형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절대 이기려거나 맞서면 안 된다.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나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수영이 되고, 편안해지는 것 같다.

"팔을 쭉 뻗으며 발끝을 움직였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니, 부드러운 물결이 나를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수영을 하고 있으면 꼭 물과 포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묘한 편안함이 있다고나 할까."(p97)

수영을 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다. 머리를 들면 몸은 가라앉고 머리를 숙이면 비로소 나아갈 준비가 된다. 팔과 다리의 힘보다 부드러움과 균형으로 물을 가른다. 물살을 가르며 나아갈 때 수영장 바닥에 박힌 타일은 흘러가 버린 시간처럼 아득하다. 거친 파도에 떠다니며 보는 해안 도심의 풍경은 가소롭다. 수영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재현의 시합을 보며 느꼈다.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 노력이 퇴색되는 건 아니라는걸. 나는 지금껏 잘해야 된다는 생각에 매몰돼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쉽게 단정 지었다."(p1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량한 자전거 여행 4 - 세상 끝으로 창비아동문고
김남중 지음, 오승민 그림 / 창비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 여름, 9박11일 일정으로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인근의 몬세라트와 시체스, 토사 데 마르와 지중해에 위치한 마요르카 섬까지 둘러보는 일정으로, 가우디와 바다를 컨셉트로 즐겁게 돌아다녔다.

이때 톱니 모양의 몬세라트 산을 트레킹했는데, 푸른 하늘과 대비된 기암은 그 분위기만으로 우리를 압도했었다. 나를 둘러싼 거대한 바위는 크기는 물론이고 모양까지도 사람의 형상과 비슷해 마치 천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신들의 모습 같았다. 속세에 찌든 우리가 감히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서려 있었고, 나의 속마음까지 꽤 뚫어보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얼마 후, 창비에서 한 책의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말에 신청했는데, 책을 받고 보니 중학교 1학년 호진이가 할머니를 따라 엄마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행하는 내용이었다. 앗,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얼마 전에 다녀왔던 몬세라트도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에 속한다고?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해 스페인 서부,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는 800km 길이의 도보 여행길이지만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다른 지방에서 출발하는 루트도 있다고 했다. 바르셀로나를 출발해 몬세라트를 지나는 까탈란 루트인데, 내가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기라도 한 것 같이 반갑고 신기했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호진이의 말동무가 되어, 스페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동행하게 되었다.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겠다고 경비까지 마련해 놓은 할머니(조순례)를 따라 호진(신호진)과 엄마(임봉선)는 프랑스 생장으로 떠난다. 여행이란 것이 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즐겁고 순탄했지만 피로가 누적되고 할머니가 다치면서 위기가 닥쳐온다. 설상가상으로 할머니가 암 환자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여행을 계속해야 할지, 여기서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호진이가 활동하고 있는 '여자친구'(여행하는 자전거 친구)의 도움으로 '당나귀'라는 이름의 삼륜 자전거를 만들게 되고, 이 자전거를 타고 순례길을 계속한다.

나도 여행을 좋아해 땅끝에서 강화도까지 도보여행을 시도하고,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 일주와 부산에서 삼척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나흘 동안 지리산을 종주하거나 울릉도를 혜집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사흘 이상의 장거리 여행, 그것도 도보나 자전거 여행을 떠나 본 사람은 알리라. 출발 전에 가졌던 낭만과 기대는 길어지는 여행 속에 피곤과 짜증으로 쌓이고, 먹는 것이나 씻는 것이 부족하다 보니 행세는 거의 노숙인처럼 변해 간다. 갈 길은 멀지만 계획은 어긋나고 의견도 분분해진다. 목숨마저도 아깝지 않았던 가족과 친구는 거추장스러운 짐이나 방해꾼처럼 변해버린다.

그 어려움을 알기에 호진이의 가족 여행이, 자전거 여행이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 결국에는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리라는, 그래서 해피엔딩이 될 거라고 예상은 되지만, 매 페이지마다 담겨있는 고된 여정과 그 속에 남아있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다.

여행이 갑갑한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접하거나, 먼 이국땅에서 멋진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여행이 갖고 있는 조금은 본질적인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바로 자신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여행이 고되고 힘들수록, 일정이 길고 팍팍할수록 더 명확해지는 것 같다.

힘들고 극한으로 치닫게 되는 어려움 속에 말은 물론이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생각은 줄어든다. 오히려 오랫동안 감추어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저 깊은 곳에 숨겨진 마음들이 하나씩 고개를 쳐들며 튀어나온다. 그때 왜 그랬어? 꼭 그랬어야만 했니? 라며 되물으며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이런 생각마저도 들지 않는 고요함에 이르게 되고, 자신의 발걸음, 땀방울, 심장 소리에 깨어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이것이 진정한 여행임을 알게 된다.

호진이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었던 엄마의 숨겨진 이야기이자, 그런 딸의 꿈을 펼쳐주지 못한 미안함과 인생의 끝을 향해가는 나이에 세상의 끝을 걷고 싶은 할머니의 이야기인 샘이다. 그리고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고 싶은 호진이 자신의 바램이지 싶다.

그래서 호진이와 엄마, 할머니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외부적인 여행을 통해, 자신 속에 응어리진 마음을 풀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자기로부터의 순례를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등이 우리의 이정표였고, 우리의 뒷모습이 뒤따라오는 순례자들의 이정표였다. 우리가 걷는 대로 길이 만들어졌다."(p196)"

얼마 전, 내 개인 블로그와 유튜브에 지난 스페인 여행의 영상을 정리해 올리면서 당시에는 놓쳐버린 많은 이야기를 새롭게 되새김하게 되었다. 몬세라트 트레킹은 물론 140년째 만들어지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뜨거운 지중해에서의 바다수영, 쇼팽의 빗방울 행진곡과 함께 둘러본 발데모사... 이 모든 것들이 어제 일처럼 선명해지며 즐거운 여행 후유증을 즐겼다.

인생은 여행이고 순례길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통해, 책을 통해 인생을 음미하고 나를 되돌아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