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족관
유래혁 지음 / 포스터샵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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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표지, 액자처럼 박힌 한 폭의 그림, 새파란 하늘에 몽환적으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검은 아스팔트 위, 자전거로 시원하게 내달리는 두 청춘.

내가 <수족관>을 집어 든 가장 첫 이유이지 싶다. 감각적인 디자인의 표지는 파랗고 하얀 선명한 이미지만큼이나 강렬했고, 내용 역시 시리도록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청명한 분위기로 예상하며 책장을 펼친다.

우선 시집에서나 볼 수 있는 문장들이 하얀 지면에 흘러넘친다. 현란하고 감각적인 문체가 책을 이끌어간다. 배경은 시가 되고 이야기는 그림이 된다. 그리고 열일곱 살의 풋풋한 청소년이 주인공인데다 일본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마치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를 보는 것 같았다.

보육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류이치는 자신의 지갑을 훔친 아카리를 만나게 되고, 그녀도 보육 시설에서 힘겨운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훔친 지갑을 팔아 멀리 떠나고 싶다는 그녀를 도와주며, 그녀에게 마음이 빼앗긴다.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아카리의 행동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녀의 부고를 전해 듣는다.

화창하고 발랄하던 이야기가 아카리의 죽음으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진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죽음, 그것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모습이 여럿 보이며 사뭇 어두워진다. 그래서 가볍게 읽기 시작한 책이 어둡고 습한 분위기로 급변한다. 마치 우울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기복이 심했다.

물론 빠른 전개와 자극적인 소재로 후루룩 읽어버렸지만,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감정의 변화들은 쉬 가라앉지 않는다. 이별, 상처, 외로움에서 시작된 아픔은 빈곤과 가출, 폭력과 도벽으로 확장되고 결국 죽음이나 자살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물론 소설 속 허구의 이야기지만 왠지 모를 서글픔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산은 있지. 그렇게나 쉽게 부서지고, 망가지면서도. 웬만큼 수리용 부품이 따로 나오질 않나 봐. 차라리 새로 사는 게 휠씬 싸서. 그러니 수리를 할 때엔 부서진 것들 중에 각자 쓸 만한 부품들을 모아서 고치는 게 대부분인 거야. 선생님은 그게 꼭 사람 같다 하셨어. 사람도 사람을 고치는 데에 따로 부품이 있질 않고 고장 난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는 꼭 서로가 만나서 서로를 위해 기꺼이 제 몸을 뜯어 내고, 기워 주고, 붙여 주고. 그래야만 하니까. 그렇게 기어코 하나의 마음이 되는 게 우산과 꼭 닮았다고."(p300)

끝으로, 사람이 부서진 우산 같다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쉽게 드러내놓고 치유받지 못한 이들이 힘차게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응원한다. 힘겨워하는 이웃들에게 우리 모두가 서로의 우산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www.freeism.net)

우산은 있지. 그렇게나 쉽게 부서지고, 망가지면서도. 웬만큼 수리용 부품이 따로 나오질 않나 봐. 차라리 새로 사는 게 휠씬 싸서. 그러니 수리를 할 때엔 부서진 것들 중에 각자 쓸 만한 부품들을 모아서 고치는 게 대부분인 거야. 선생님은 그게 꼭 사람 같다 하셨어. 사람도 사람을 고치는 데에 따로 부품이 있질 않고 고장 난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는 꼭 서로가 만나서 서로를 위해 기꺼이 제 몸을 뜯어 내고, 기워 주고, 붙여 주고. 그래야만 하니까. 그렇게 기어코 하나의 마음이 되는 게 우산과 꼭 닮았다고.
- P300

그녀의 말대로 삶은 어쩌면 평생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훔치고, 찾아내는 과정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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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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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은 소설이 아니라 음악이다. 그것도 전쟁 직후의 절망과 혼란, 가난과 죽음이 뒤섞이며 우리 역사의 회색빛 상흔으로 남아 있던 시기의 진혼곡이다.

  럭키 서울(1948, 현인), 어메이징 그레이스, 목포의 눈물(1935, 이난영), 슈샨 보이(1952, 박단마), 테네시 왈츠(1950, 패티 페이지), 홍콩아가씨(1954, 금사향), 타향살이(1934, 고복수), 열아홉 순정(1959, 반야월), 베사메무쵸(1949, 현인), 이는 1950년대를 관통했던 음악이자 <아코디언>의 구성하는 각 장의 제목이다.

  그래서 둥이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이 음악들을 들어보길 추천한다. 오래된 LP를 올려놓은 듯한 잡음과 함께 수줍은 반주가 시작되고, 구슬프고 아련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저 밑바닥에서 아코디언 소리가 들려온다.


 "동이는 아코디언을 집어 들어 자리에 앉은 채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즉흥연주였다. 음정도 박자도,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었다. 손 가는 대로 건반을 짚고 감정대로 바람통을 눌러 아련한 멜로디가 움막 안을 가득 채웠다. 뜻밖의 아코디언 소리에 아이들은 하나둘 울음을 그치고 동이의 즉흥연주를 감상했다. 그것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곡이었지만 끊길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멜로디는 그들의 감정을 대변하듯 짙은 슬픔이 깔려 있어 잘 아는 곡처럼 친숙한 느낌이었다."(p84)

  동이는 전쟁고아들을 모아 앵벌이를 시키는 양 목사 밑에서 힘겹게 생활한다. 하루 종일 구걸하고 와도 남는 것은 멀건 호밀죽뿐이다. 굶주림과 착취는 일상이 되었고, 무차별적이고 대책 없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이때 동이의 눈에 아코디언이 들어온다. 교회에서 풍금을 치던 엄마를 떠올리며 동이는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동이는 연주를 통해 그 이야기를 다시 세상에 풀어놓았다. 아코디언을 치는 동안, 슬픔과 고통은 깊은 깨달음으로 정화되고 안개처럼 뿌옇게 가려졌던 진실은 거울처럼 선명해졌다. 그렇게 동이는 글자가 아닌 소리를 통해 벽 너머의 세상으로 통하는 길을 더듬더듬 찾아가고 있었다."(p226)

  <아코디언>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가난이 일상이었고,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조차 버거웠던 시절. 법과 질서보다는 아첨과 협박, 때로는 주먹과 발길질이 문제를 해결하는 더 빠른 방법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직접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50대인 나에게도 낯설지만, 지금의 3~40대 젊은 세대에게는 더욱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질서가 저절로 주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배고픔과 굶주림을 겪고 나서야 밥 한 공기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폭력과 혼란이 남긴 상처와 후유증을 경험한 뒤에야 법과 질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그 거칠고 불편했던 시간들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낸 토대였는지도 모른다.

  아코디언은 수많은 주름을 접고 펼쳐지기를 반복하면서 소리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역사도 그랬던 것 같다. 가난과 전쟁, 폭력과 혼란, 좌절과 궁핍이라는 수많은 주름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왔다.
  그래서 아코디언의 그 많은 주름은 단순히 우리가 지나온 고단한 흔적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주름은 우리를 다음 단계로 밀어 올린 스프링이 아니었을까. 과거의 고통과 혼란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을 견디고 극복해온 힘까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코디언>은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굴곡진 역사를 지나,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밀려 올렸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의 풍요와 질서 역시 그 수많은 주름이 만들어낸 한 소절의 음악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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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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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그녀의 소설에 푹 빠져버렸다. SF 소설은 외국 고전 외에는 많이 접해보지 못했고, 이야기가 엉성하거나 너무 비현실적일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잘 읽지 않았다. 하지만 <천 개의 파랑>을 읽으면서 이런 편견과 나의 경솔함을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되었다. 완전히 새롭고, 역동적이고 매혹적이면서도 섬세하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작품이었다.

안드로이드 기수인 콜리는 멋진 하늘을 보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진다. 프로그래밍된 데이터로 움직이는 로봇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지만, 제작 과정에서의 실수로 콜리는 자신이 타는 말(투데이)과 교감하며 감성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말의 생명력과 즐거움을 이해하고, 하늘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이다.

콜리는 이렇게 세상에서 떨어져 고철이 되어 폐기될 운명이었지만, 연재의 눈에 띄어 그녀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연재의 언니 은혜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은 뒤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었고, 소방관이었던 아빠가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엄마 보경은 식당을 운영했다.

로봇공학에 탁월한 소질을 가진 연재는 망가진 콜리를 수리하는 한편, 연골이 닳아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투데이(경주마)를 살리기 위해 경주에 다시 출전시키려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몇 번씩 놀라게 된다. 소설이 허구라고는 하지만, 그 속에 녹아 있는 다양함과 섬세함은 깊이 생각하거나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나오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점점 로봇으로 대체되어 가는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는 사람들, 첨단 장비 도입이라는 명목 아래 기본적인 안전이 소홀해지며 발생하는 문제들, 장애인의 경험과 그에 대한 편견 어린 시선, 반려동물에 대한 순수하지만 위험한 생각들까지. 작가의 독특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책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래서 자꾸 책날개에 실린 작가 소개를 읽게 된다.

동물과 사람 사이에 로봇을 등장시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알면서도 외면했던 생명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나 존재하는 생명은 없다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살아 있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 ‘비스’라는 이름의 개를 키운 적이 있다. 서면 육교 위에서 산 똥개였고, 2~3년 정도 함께 생활했던 것 같다. 그런데 가족이 며칠간의 겨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 개는 딱딱하게 얼어 죽어 있었다. 아마도 동네를 뛰어놀다가 쥐약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죽은 것 같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죽음은 낯선 것이었지만, 따뜻한 체온을 가진 동물이 통나무처럼 굳어 있던 모습은 더욱 낯설게 다가왔다. 마치 강아지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말티즈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예전처럼 쥐약을 먹을 일도 없고, 밖에서 키우는 환경도 아니지만, 예방접종과 관절 수술까지 하며 비교적 오래 함께 살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팔자’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식은 밥을 먹으며 집을 지키는 똥개였다면, 지금은 건강관리와 생일상까지 챙김 받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여전히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만들어낸 기구한 운명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누구에게는 단순한 소유물일 수 있지만, 누구에게는 부모나 형제 이상의 가족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p286)

빠른 속도로 달려 가장 먼저 결승선에 도착해야 하는 경주마의 세계는 “빨리빨리”를 외치며 끝없는 경쟁을 강요하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이런 숨가쁜 순간 속에서도,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나 이외의 존재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콜리는 가지고 있었다. 차가운 알루미늄 속에 숨겨진 따뜻함은, 빠르게 다가올 미래에도 우리가 간직해야 할 ‘파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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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있는 리플리 리플리 5부작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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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를 검색하다가 <리플리: 더 시리즈>(2024)를 알게 되었다. 스토리도 탄탄하고 평가도 좋아 재생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원작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검색해 보니 다섯 권으로 된 동명의 소설이 나왔고, 이 외에도 알랭 드롱의 <태양은 가득히>, 맷 데이먼의 <리플리>라는 영화로도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플리>는 총 5권으로 이뤄진 연작 소설로, 1편에 해당하는 <재능있는 리플리>는 별 볼 일 없이 살아가는 청년 리플리가 부유한 디키 그린리프를 살해하고 그의 삶을 살아간다는 범죄소설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얼굴과 생각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는 인간의 욕망을 다룬 심리, 스릴러물이라 보는 것이 맞겠다.

허접하고 볼품없는 삶을 사는 리플리는 디키의 귀국을 설득해 달라는 그의 아버지 요청으로 이탈리아로 떠난다. 리플리는 그곳에서 호화롭게 생활하는 디키를 만나게 되고, 그의 화려한 생활을 동경하게 되면서 질투를 넘어 심한 모욕감까지 느끼게된다. 결국 디키로 살기로 결심하고 바다에서 그를 살해한다. 리플리는 점점 디키처럼 입고 말하고 생각했다. 그의 풍족한 삶에 빠져들며 동일시하게 되고, 이를 숨기려 또다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또 다른 삶, 어쩌면 우리 안에 숨겨진 희망이자 욕망이 아닐까. 첫사랑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선생님 말을 무시하고 그 대학을 지원했다면,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그 주식을 계속 갖고 있었다면... 과 같은 일상적인 바램부터, 내가 톱스타이거나 대기업의 상속자라는, 혹은 엄청난 금액의 로또 당첨자였으면 하는 다소 엉뚱한 바램 역시 내가 갖지 못한 상황이나 대상에 대한 리플리의 욕심이 아닐까 싶다.

그 연장선에서 본다면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 책을 읽고 영화나 유튜브를 보는 것도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살아보지 못한 삶을 느끼고 경험해 보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여행사나 작가, 감독, 유튜버는 나를 대신하는 디키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상상은 현실이라는 단단한 기반이 있기에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저 멀리 떠날 수 있다는 것도 돌아올 곳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되돌아올 현실이 있기에 더 재미가 있고 의미가 있으리라. 현실이 상상 속에 갇혀 벗어날 수 없다면 정해진 알고리즘을 따라가는 모니터 속 게임 캐릭터와 무엇이 다를까 싶다.

리플리는 디키의 껍데기를 쓰고, 그의 삶을 살아보지만 결국 현실의 벽에 막혀 리플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내던지고 모든 것을 속이려 했지만 이는 거울 속의 일시적인 허상일 뿐 실재할 수 없었다.

그의 기행은 자극적인 릴스에 갇혀 단편적인 흥밋거리만 쫓아가는 우리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불로초를 찾아 세상천지를 돌아다니는 진시황의 꿈처럼, 있지도 않는 허상을 찾아 액정 화면 속에 머리를 처박고 사는 우리의 모습과 무엇이 다를까.

리플리의 일탈이 멋있고 낭만적이게 보일 수는 있어도 영원할 수 없는 허상이라는 점은 변함없어 보인다. 전원 코드만 뽑아버리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화면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신기루가 매혹적이기는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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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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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용의자 X>(한국, 2012)라는 류승범 주연의 영화를 보고 그 원작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헌신'이라는 단어가 잘 와 닿지 않았는데, 용의자와 X, 그리고 헌신이라는 단어가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헌신'이라는 단어가 퇴마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주술적인 느낌으로 다가와 선뜻 영화 보기가 망설였는데, 책에 대한 찬사가 워낙 많고, 영화평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주저하지 않고 봤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살인사건을 둘러싼 치밀한 두뇌 싸움과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 매력적이었고, 덩달아 일본판 영화까지 찾아봤었다.

이번 <용의자 X의 헌신>은 추리소설을 즐겨 본다는 지인에게 선물하려고 구매한 책인데, 긴 연휴가 있어 내가 먼저 읽게 되었다. 사실 영화와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400페이지가 넘는 두께가 첫 장을 넘기기에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대략적인 이야기와 결말을 알고 있기에 더 쉽게 접근했던 것 같다. 추리소설에서 내용과 결말을 안다는 것이 흥미를 반감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겠지만, 추리소설이나 두꺼운 외국소설 같은 복잡한 이야기나 등장인물이 잘 혼동하는 나(?)의 경우에는 오히려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영화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섬세한 묘사와 깊이 있는 구성까지 찾아보는 재미가 있으니...

기대처럼 책은 술술 넘어갔다. 일주일이 넘는 긴 연휴 기간 중 초반 며칠 만에 다 읽었으니 말이다. 수학 이외에는 잘하는 것도, 흥미있는 것도 없는 이시가미는 옆집에 이사온 야스코라는 이혼녀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재결합과 돈을 요구하며 막무가내로 접근하는 야스코의 전남편을 그녀와 그녀의 딸이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을 알게된 이시가미는 야스코 모녀의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해 천재적인 머리로 사건을 재구성한다.

경찰은 그녀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사건을 풀어나가려 하지만 이를 예상한 이시가미의 계획에 따라 좀처럼 실마리를 잡지 못한다. 사건 당일 야스코의 행적은 뚜렷했고 별다른 용의점도 없었다.

이때 이시가미의 옛 친구이자 물리학자인 유가와가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조금씩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이시가미도 이럴 경우를 대비해 최후의 대책을 세워놓았던 것. 그는 야스코를 짝사랑하고 있는 스토커로 위장해 사건을 마무리하려 한다.

이시가미와 유가와의 두뇌 싸움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치밀함에 더욱 놀라게 된다. 이미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주지시킨 후 진행되는 소설이지만, 그 풀이과정에서 보이는 치밀함과 반전이 눈을 땔 수 없게 만든다.

이시가미는 야스코에 대한 끝없는 헌신으로 더 큰 사건을 만든 뒤, 그녀에게 향한 화살을 자신에게 돌려놓고자 했다. 양파 껍질같이 여러 겹으로 위장된 사건은 야스코의 범죄는 물론 모녀가 느낄 수 있는 미안함과 죄책감까지 돌려놓게 설계되었다.

소설은 수학 밖에 모르는 한 범생이를 한 여자를 흠모하던 순박한 청년으로 만들다가 갑자기 편집증적인 스토커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는 무자비한 살인자로 바꿔버리면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했다. 치밀한 구성과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은 깊은 탄식과 놀라움으로 책장을 덮게 한다. 소설 속 주인공보다 이를 구성하고 창조한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감탄하게 된다.

소설 속 용의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을 이야기했다. 야스코는 단란했던 지난날의 가족과 지금의 딸을 지키며, 이시가미는 수학에서 찾기 힘든 출구를 그녀에 대한 무한한 헌신으로, 이시가미의 계획을 확인하고 찾아낸 유가와는 친구와의 신뢰와 과학적 사고에서... 모두 이유와 방식은 다르지만 자기 나름의 길을 찾고 있지 않았나 싶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여러 인물들의 행복 회로를 살인사건과 추리라는 톱니바퀴에 맞춰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들어 냈다.

인터넷에 나와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파일을 보니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로 일했다고 나온다. 아직 그의 많은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전후가 깔끔하고, 사건을 풀이하는 설명과정이 상당히 친절하고 상세했다. 복잡한 전자제품의 상세 설명서를 보는 것 같이 꼼꼼히 읽기가 수월했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한번 우리 영화 <용의자 X>를 볼까 하고 넷플릭스를 열어보니, <자네 잔: 용의자 X>라는 이름의 인도영화도 올라온 것이 보였다. 과연 인도 버전에서는 어떻게 묘사하고 이야기를 꾸려갈지 벌써 궁금해진다. 책도 좋지만,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본, 한국, 중국, 인도의 다양한 영화도 비교해서 보면 재밌을 것 같다.

늦가을, 긴 연휴가 히가시노 게이고에 의해 치밀해지는 느낌이다.


* 다음은 영화화 된 <용의자 X의 헌신>(왼쪽부터 한국, 일본, 중국,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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