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의 비밀 수영 클럽 VivaVivo (비바비보) 53
하이은 지음 / 뜨인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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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에서 수영과 관련된 책을 검색하다가 찾은 청소년 소설로, 유광으로 처리된 번쩍이는 파란 표지엔 아주 잘 생긴 남녀 한 쌍이 수영장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너무 비현실적이거나 만화 같은 느낌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청소년 소설이 갖는 특징, 가령 읽기 부담 없는 분량과 머리 아프지 않고 술술 읽을 수 있지 않을지 하는 마음에 책을 펼쳤다.

고등학교 수영 선수인 유영은 최근 기록이 향상되어 한국 신기록을 세우는 등 온 나라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아빠의 기대와 주변의 부담감으로 결승전에서 기절하게 되고 긴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유영은 잠시 쉴 목적으로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는데 이때 전학 온 무명 아이돌 그룹의 재현이 자신이 곧 있을 수영 대회에서 1등을 해야 한다며 유영에게 수영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그녀는 돈만 생기면 수영을 그만두고 어디로든 도망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승나하고, 한밤의 비밀 수영 과외를 시작한다.

삼류 드라마 같은 비현실적인 주인공 조합과 조금은 뻔해 뵈는 스토리, 단편적인 인물 설정이지만, 주변의 관심이 두렵기만 한 유영과 그 관심에 목말라하는 아이돌 가수인 재현의, 상반되지만 은밀한 관계(?)가 나름 재미난다.

아무도 없는 백화점이나 마트에 들어가 자기 마음대로 난장을 부리는 상상처럼, 불 꺼진 수영장에 홀로, 혹은 단둘이 들어가 수영한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좀 손발이 오글거리긴 하지만,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두루 재밌는 요소를 갖춘 것 같다.

특히, 폭발해버린 유영과 아버지와의 고조된 갈등이 사랑과 우정, 믿음으로 하나씩 치유되는 과정이 흐뭇하다. 좀 뻔한 결말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안정감이랄까... 아무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화려한 빛과 이를 지탱하는 그림자가 항상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공감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심야의 비밀 수영 클럽>은 물과 함께하는 수영과 비슷한 것 같다. 물은 한없이 부드러운 듯하지만 차갑고 강하며, 잡힐 듯하면서도 모두 빠져나가 버린다. 이런 물에서 균형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절대 이기려거나 맞서면 안 된다.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나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수영이 되고, 편안해지는 것 같다.

"팔을 쭉 뻗으며 발끝을 움직였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니, 부드러운 물결이 나를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수영을 하고 있으면 꼭 물과 포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묘한 편안함이 있다고나 할까."(p97)

수영을 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다. 머리를 들면 몸은 가라앉고 머리를 숙이면 비로소 나아갈 준비가 된다. 팔과 다리의 힘보다 부드러움과 균형으로 물을 가른다. 물살을 가르며 나아갈 때 수영장 바닥에 박힌 타일은 흘러가 버린 시간처럼 아득하다. 거친 파도에 떠다니며 보는 해안 도심의 풍경은 가소롭다. 수영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재현의 시합을 보며 느꼈다.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 노력이 퇴색되는 건 아니라는걸. 나는 지금껏 잘해야 된다는 생각에 매몰돼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쉽게 단정 지었다."(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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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자전거 여행 4 - 세상 끝으로 창비아동문고
김남중 지음, 오승민 그림 / 창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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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9박11일 일정으로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인근의 몬세라트와 시체스, 토사 데 마르와 지중해에 위치한 마요르카 섬까지 둘러보는 일정으로, 가우디와 바다를 컨셉트로 즐겁게 돌아다녔다.

이때 톱니 모양의 몬세라트 산을 트레킹했는데, 푸른 하늘과 대비된 기암은 그 분위기만으로 우리를 압도했었다. 나를 둘러싼 거대한 바위는 크기는 물론이고 모양까지도 사람의 형상과 비슷해 마치 천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신들의 모습 같았다. 속세에 찌든 우리가 감히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서려 있었고, 나의 속마음까지 꽤 뚫어보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얼마 후, 창비에서 한 책의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말에 신청했는데, 책을 받고 보니 중학교 1학년 호진이가 할머니를 따라 엄마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행하는 내용이었다. 앗,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얼마 전에 다녀왔던 몬세라트도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에 속한다고?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해 스페인 서부,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는 800km 길이의 도보 여행길이지만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다른 지방에서 출발하는 루트도 있다고 했다. 바르셀로나를 출발해 몬세라트를 지나는 까탈란 루트인데, 내가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기라도 한 것 같이 반갑고 신기했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호진이의 말동무가 되어, 스페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동행하게 되었다.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겠다고 경비까지 마련해 놓은 할머니(조순례)를 따라 호진(신호진)과 엄마(임봉선)는 프랑스 생장으로 떠난다. 여행이란 것이 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즐겁고 순탄했지만 피로가 누적되고 할머니가 다치면서 위기가 닥쳐온다. 설상가상으로 할머니가 암 환자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여행을 계속해야 할지, 여기서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호진이가 활동하고 있는 '여자친구'(여행하는 자전거 친구)의 도움으로 '당나귀'라는 이름의 삼륜 자전거를 만들게 되고, 이 자전거를 타고 순례길을 계속한다.

나도 여행을 좋아해 땅끝에서 강화도까지 도보여행을 시도하고,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 일주와 부산에서 삼척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나흘 동안 지리산을 종주하거나 울릉도를 혜집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사흘 이상의 장거리 여행, 그것도 도보나 자전거 여행을 떠나 본 사람은 알리라. 출발 전에 가졌던 낭만과 기대는 길어지는 여행 속에 피곤과 짜증으로 쌓이고, 먹는 것이나 씻는 것이 부족하다 보니 행세는 거의 노숙인처럼 변해 간다. 갈 길은 멀지만 계획은 어긋나고 의견도 분분해진다. 목숨마저도 아깝지 않았던 가족과 친구는 거추장스러운 짐이나 방해꾼처럼 변해버린다.

그 어려움을 알기에 호진이의 가족 여행이, 자전거 여행이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 결국에는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리라는, 그래서 해피엔딩이 될 거라고 예상은 되지만, 매 페이지마다 담겨있는 고된 여정과 그 속에 남아있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다.

여행이 갑갑한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접하거나, 먼 이국땅에서 멋진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여행이 갖고 있는 조금은 본질적인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바로 자신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여행이 고되고 힘들수록, 일정이 길고 팍팍할수록 더 명확해지는 것 같다.

힘들고 극한으로 치닫게 되는 어려움 속에 말은 물론이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생각은 줄어든다. 오히려 오랫동안 감추어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저 깊은 곳에 숨겨진 마음들이 하나씩 고개를 쳐들며 튀어나온다. 그때 왜 그랬어? 꼭 그랬어야만 했니? 라며 되물으며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이런 생각마저도 들지 않는 고요함에 이르게 되고, 자신의 발걸음, 땀방울, 심장 소리에 깨어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이것이 진정한 여행임을 알게 된다.

호진이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었던 엄마의 숨겨진 이야기이자, 그런 딸의 꿈을 펼쳐주지 못한 미안함과 인생의 끝을 향해가는 나이에 세상의 끝을 걷고 싶은 할머니의 이야기인 샘이다. 그리고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고 싶은 호진이 자신의 바램이지 싶다.

그래서 호진이와 엄마, 할머니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외부적인 여행을 통해, 자신 속에 응어리진 마음을 풀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자기로부터의 순례를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등이 우리의 이정표였고, 우리의 뒷모습이 뒤따라오는 순례자들의 이정표였다. 우리가 걷는 대로 길이 만들어졌다."(p196)"

얼마 전, 내 개인 블로그와 유튜브에 지난 스페인 여행의 영상을 정리해 올리면서 당시에는 놓쳐버린 많은 이야기를 새롭게 되새김하게 되었다. 몬세라트 트레킹은 물론 140년째 만들어지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뜨거운 지중해에서의 바다수영, 쇼팽의 빗방울 행진곡과 함께 둘러본 발데모사... 이 모든 것들이 어제 일처럼 선명해지며 즐거운 여행 후유증을 즐겼다.

인생은 여행이고 순례길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통해, 책을 통해 인생을 음미하고 나를 되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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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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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체코슬로바키아(현재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를 중심으로 벌어진 '프라하의 봄'이 중요 배경이기에 이것부터 살펴보는 게 좋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에서 소련은 아군에서 적군으로 바뀌는 미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소련은 2차대전 막바지에 독일의 점령하에 있던 체코슬로바키아를 해방하기 위해 진군했던 천사 같은 존재였지만, 종전 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화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어 반감을 사게 된다. 이때 체코슬로바키아의 둡체크의 개혁(1968년)을 통해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소련의 무력 침공으로 무산되었다. '프라하의 봄'은 이 7개월 동안을 일컫는 말로, 세계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박정희 정권 후반(1979년)에 터져 나온 민주화 열기(5.18 광주민주화운동)를 '서울의 봄'으로 비유해 표현하기도 한다.
  아무튼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알면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책은 무거운 시대 상황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만큼이나 가벼웠던 사랑'을 이야기한다. 순박했던 테레자는 가벼운 사랑을 찾아다니던 바람둥이 토마시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그녀는 토마시가 자신에게 좀 더 충실하기를, 깊고 무거운 사랑을 원했다. 그리고 토마시가 가볍게 만나던 사비나 역시, 모험적인 삶을 동경하는 유부남 프란츠와의 밀회를 즐기고 있다.
  테레자가 원했던 깊은 사랑과 이를 단순한 놀이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토마시는, 앞서 말한 체코와 소련의 정치적 상황과 비교되면서 교차한다. 자신에게 자유를 안겨 주며 영원히 자기편인 줄 알았던 상대방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더욱 구속하고 통제하려는 존재가 되었다. 가볍게 시작한 사랑은 깊은 존재감으로 다가오고, 현실을 마주하는 시선의 작은 차이는 서로 간의 상이한 성장 과정과 생활방식으로 무거운 거리감을 만들었다.

  프란츠는 부인 마리클로드에게 사비나와의 사랑을 이야기하며 의무감처럼 유지해오던 부부관계를 끝내지만, 정작 사비나는 뜨거운 정사 뒤에 프란츠를 떠난다. 그 뒤 프란츠는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며 다른 젊은 여자를 만났고, 파리에 머물던 사비나는 전 연인이었던 토마시와 테레자의 부고를 듣게 된다.

  가정이라는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의 사랑은 허울만 남긴채 사그라들었고, 대신 가볍게 시작된 외도가 점차 그 깊이를 더해간다. 사랑은 형식이나 방향도 없이, 의도하지 않게 흘러가면서, 나름의 이유와 가치를 스스로 찾아내게 된다. 가볍게 시작된 사랑은 깊은 존재로 남게 되었다.

  소설은 텍스트가 난해하고 철학적인데다, 화자의 시점과 시간이 뒤섞여있어 등장인물 간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외국 소설이 갖는 번역 과정에서의 거리감인지, 나의 짧은 문해력으로 인한 이해 부족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각 문장이 가진 세부적인 의미를 파악하기보다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문장과 챕터 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편이 밀란 쿤데라의 글을 이해하는 쉬운 방법인 것 같다.

  하긴 청소년 소설이나 에세이의 쉬운 책도 좋지만, 이런 두껍고 이해하기 힘든 책도 읽어 줘야 내 정신의 폭도 깊어지지 않을까 한다. '참을 수 없는 독서의 어려움'이랄까! ^^

  유명한 책인데 명작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보니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내가 이전에 읽었던 <책은 도끼다>(박웅현)에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글이 있다고 해서 다시 읽어봤다.
  확실히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니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막연하게 흘려 읽었던 문장들의 관계와 의미가 이해되면서 단순한 사랑놀이 뒤에 숨겨진 다양한 연결고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밀란 쿤데라가 말한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가는 사랑의 깊이를 가름해볼 수 있었다.
  이렇게 중도에 읽는 것을 포기해버릴까도 생각했던 506쪽에 이르는 책을 겨우 마무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명작이라는 말에 집었고, 사랑에 취해 읽었지만, 난해함에 포기하려던 책을 주변의 도움으로 다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참을 수 없이 가벼웠던 텍스트가 거부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자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p506)
  결국 토마시와 테레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인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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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다이브 소설Q
이현석 지음 / 창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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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서 서핑을 가르치는 태경에게 다영이 찾아온다. 다영은 지금 잘나가는 인기 유튜버지만, 병원 간호사로 일했을 때는 천대받고 멸시받던 왕따였다. 오죽했으면 창고에 처박혀 나오지 말라는 소리까지 들었겠는가. 이런 그녀가 지금은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는 스토리텔링으로 유명인이 되었고, 많은 이의 관심을 받으며 서핑을 배고 있다.

하지만 다영을 지켜보는 태경의 마음은 편치 않다. 병원에서 함께 일했을 때, 그녀가 다영의 처지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방관자로 배회했을 뿐 다영을 돕거나 위로하지 못했다. 힘들게 버텼던 다영과는 달리 태경은 강자들이 구축한 세계에서 편안히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푸른 파도 위를 화려하게 날아다니는 서핑에는 어쩔 수 없는 위험 요소가 숨어있다. 파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 혹은 화려한 기술을 익히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만, 해변의 지형과 바람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는 파도를 이해하기는 너무 어렵다. 크고 완벽한 파도일수록 그 밑에 감추어진 암초는 더 위험했고, 거친 파도에 휘말리거나 보드, 서퍼 간의 충돌로 심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피해 갈 수 있는 작은 방편 중에 하나가 어쩌면 덕다이빙이다.

"경사면 아래로 보드를 찔러 넣은 태경은 숨을 참았다. 잠영을 하며 눈을 흡뜬 태경 뒤로 해파리 한 마리가 굴러갔다. 파도가 머리 위를 지나가자마자 태경은 오른발로 보드 뒤쪽을 찍어 눌렀다. 보드 앞이 들리며서 수면 위로 솟아오른 그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는 얼굴을 닦았다.

바늘을 꿰는 것처럼 수면 아래로 파고들어가 타지 못할 파도를 피하는 이 기술을 서퍼들은 '덕다이브'라고 부른다."(p18)

서핑과 마찬가지로 세상일도 기대처럼 되지 않는다. 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을뿐더러, 타인의 머릿속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모두 한 방향을 보고 웃는 것 같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 같이 칼을 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억지 웃음을 짓고, 야근에 지원한다. 혹은 병원에 다니거나 내부고발자가 되기도 한다.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덕다이빙 방법을 찾아보지만, 그 뒤에는 더 큰 파도가 있을 뿐이다.

나만의 덕다이빙은 누구에게 배워서 얻어지기보다는 오랜 시간과 경험을 통해 습득되는 것 같다.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조율과 균형만이 인생의 파도를 타고 넘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는 말.

태경은 이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우리의 오해가 비록 영원할지라도, 앞으로도 내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이곳에서 함께였다는 사실만큼은 진실이니까."(p284)

아무튼, 밀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파도를 공유한다는, 아니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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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 - 제2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대상 수상작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권석 지음 / &(앤드)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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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일 새벽, 졸린 눈을 비비고, 나를 조용히 반겨줄 바다로 간다.
  힘차게 물살을 가른 팔은 리커버리하며 수평선을 향해 길게 뻗는다.
  검지부터 차례로 입수하자 발끝까지 긴 유선형을 만들어 물을 가른다.
  상체를 틀고 꺾어진 팔꿈치부터 한 아름 잡은 물은 가슴을 지나 허벅지 아래로 밀어낸다.
  암청색의 바닷속에는 하얀 거품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수심 아래로 사라진다.
  나는 넓고 고요한 바다를 날카롭게 가르며 미끄러진다.

  바다는 반복된 일상의 갑갑함을 뒤로 밀어내고 나를 전진하게 한다.
  호흡과 함께 사선으로 모습을 드러낸 도시는 이내 찰랑거리는 물결 속에 잠겨버린다.
  나를 잡고 있던 책임과 의무, 질서와 규칙은 긴 물보라 속으로 사라진다.



  최근 수영하는 시간이 늘었다.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빡세게 수영하다 보니, 여기에 몸이 맞춰져 버렸는지 체중도 약간 줄면서 수영에 재미가 들기 시작했다. 주말 새벽에 진행하는 바다수영 외에도 약간의 틈이라도 주어지면 풀장이나 바다를 찾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수영과 관련된 읽을거리가 없을까 찾게 되었다. 수영과 관련된 책은 기술적인 입문서 외에 몇 권이 나와 있지만 수영의 과거사만 나열한 인문학 서적이나 수영 입문자가 겪은 일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한 에세이, 혹은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이 대부분이라 수영에 관한 소설은 의외로 찾기 힘들었다. 거기다 청소년 도서로 분류되어 있어 무더운 여름날에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책의 가치를 보증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수경과 수모를 쓴 소년이 힘차게 물을 가르고 있는 모습의 표지가 너무 시원했다!

  바다고에 다니는 박욱은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바다고 수영부인 스피드(SPEED)에 가입하고, 거기서 아프리카에서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다 죽은 아버지가 바다고 재학 시절에는 최고의 수영선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인생 최고의 정점에서 도핑 사건에 연류돼 수영을 그만두게 되었다. 욱은 아버지가 남겨둔 수영 일기를 보며 수영에 관한 기술과 자신감을 갖는 한편, 아버지가 수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정확한 사연도 함께 조사하게 된다.
  한편 저조한 실적의 스피드는 해체 통보를 받게 되면서,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하늘고와의 수영 라이벌전에서 무조건 이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과연 욱은 아버지의 도핑 사건 뒤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고, 하늘고와의 수영 시합에서 이길 수 있을까?

 바다고 수영부의 해체를 막기 위해 이사장님 댁을 방문하던 욱은 동행한 수빈 선배의 폰에서 공성전 게임을 보게 된다. 곧이어 소설은 수영부 해체냐, 유지냐를 놓고 벌였던 이사장님과 담판을, 철옹성을 지키고 선 적군과 맹렬한 공격으로 성을 함락시키고자 하는 아군의 전쟁에 빗대 리얼하게 표현해 놓았다. 텍스트로 쓰인 아날로그 매체에서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긴박함을 느낄 줄이야~
 바다고 수영부에게 스피드 해체는 전장에서의 패배와 같았다.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되었기에, 수영부 유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쟁에 이겨야 했다.

  반면 아버지의 도핑 사건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방점을 둔다. 전쟁 같은 극한의 한바탕 승부가 끝나고 난 뒤의 고요함, 아니 허무함이랄까. 결과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어떠한 결과를 일으키고 피해를 불러오는지 이야기한다.
  아버지가 거둔 최고의 성적은 주변의 감각을 마비시켰고, 1등이라는 결과물에 취해 결과만을 맹목적으로 추앙하게 되었다.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득권의 모든 혜택을 내려놓게 되는 것이었기에 아버지의 주변에서는 약물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겨야만 했다.

  무한의 속도 경쟁 속에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경쟁에서의 순위나 그에 따른 포상이 아니라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경쟁과 승패의 결과보다는 그 과정을 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했다면 그 결과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스피드가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코어의 힘이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지속적인 연습으로 내 안에 내재한 가치를 높이는 것이야말로 일생을 살아갈 수 있는 최고의 힘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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