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너에게 듣고 싶은 말
임수진 지음 / 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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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사운드포크페스티벌에서 계피를 처음 보았다. 첫인상은 어딘가 원불교 전도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음향을 체크하고 공들여 노래를 부르는 걸 듣고 반했다. 간만에 여자에게 반하는구나. 대체할 수 없는 음색이다. 노래하는 목소리는 목소리대로, 말하는 음성은 음성대로 다 좋았다. 낭독회에도 어울릴 목소리.

 

인터뷰와 강연 등을 찾아보고 음악도 듣다가 아무 기대 없이 어제 이 책을 집어들었다. 실망할 각오를 하고. 그런데 정말 최근 읽은 에세이 중에서 제일 교훈적이다. 나도 계피같이 어느 정도 교훈마니아라 만화나 웹툰을 보면서도 억지로 교훈을 찾곤 하는데 ㅋ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라고나 할까. 의연하고 다감하다. 심심하지만, 지루하지는 않게 잘 살아가는 듯하다. 유년기부터 범상치 않았다.

 

학교에서 한마디도 안했던'고독하고 조숙한 아홉 살' 꼬마는 유년을 이렇게 표현한다.

 

어린 시절을 낙원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박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그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막막함을 느꼈다. 인생이 모래바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분. 물기 하나 없는 거대한 모래 산을 마주하는 기분. p.89

 

나의 유년과 맞닿아 있다.

 

전학간 학교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아 외국에서 온 아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전학간 학교의 담임 선생님 이름은 정말로 홍길동.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노란 은행나무잎이 떨어져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시간은 정말 가지 않았다. 엄마가 일하러 가시면 동생이랑 베지밀 공병에 베지밀과 똑같은 색이 되도록 물감을 섞어서 골목길에 병을 내어두고 누가 가져가나 바라보곤 했다.

 

개들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게 정이 많게 태어났을까? 허구한 날 가슴 아프게 p.68

 

어릴 때 계피는 개를 길렀지만 잘 보살펴주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는 고양이, 물고기 등을 사정이 생기면 공들여 기른다. 작정하고 기른 게 아니라 우연한 기회가 생기면 성심을 다해 돌본다. 이런 점도 너무나 마음에 든다. 동물병원에 알아보고 온갖 수고는 하지만 내가 얘들을 사랑한다고 막 내세우지는 않는다. 난 어릴 때 병아리나 새를 키워본 적이 있지만 언제나 끝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로 길러본 적이 없다. 어릴 때 개와 얽힌 기억이 있어 무서워하는 편이다. 정이 많은 짐승들이 다가와도 한발짝 물러나는 편이다.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개나 고양이의 주인에 대한 정은 무척 깊다고 한다. 얘기를 다 들어보면 정말 뭉클하다.

 

전반부에 유년, 자신의 엄마, 아빠 이야기가 살짝 나오고 후반부에 남편, 시어머니 이야기가 있다. 뮤지션 부부라서 언제나 감각 있고 뭔가 이효리 부부 같지 않을까 같았는데 현실적이라 좋았다.

 

시어머니가 때가 낀 락앤락통이나 원치 않는 먹거리를 부쳐와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

 

"우리 엄마가 예전에는 그릇을 이렇게 쓰지 않았거든요...."

나는 그가 하지 않은 말까지 이해했다. 얼른 받아서 말했다, 그럼요, 우리 엄마도 그러는 걸 뭐, 나이가 드니까 잘 안 보이잖아, 힘도 들고, 똑같은 살림을 하루 세 번 삼십 년 해봐요. 어디 그릇 틈새까지 박박 닦고 싶겠어, 나라도 싫겠다.

나는 아픈 사람이 시장에 가서 버섯을 사고, 식초를 넣어 절이려다가 식초가 없어서 냉장고에 있던 레몬즙을 뿌리는 광경을 상상한다. pp.200-201

 

물론 부부 사이라 가끔은 묵은 감정의 감자 뭉치 같은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남편의 쓸쓸한 유년기라든가 아픈 시어머님에 대한 이야기, 어머니 사후에 남편이 불렀던 붉은 노을의 의미 이런 부분은 작가의 성정을 짐작케 한다. 상대를 한없이 가여워하고 묵묵히 곁을 내어준다. 별 특징없는 사건이나 평범한 인물도 작가의 시선을 거쳐 일본영화의 한 장면같이 살아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이게 아줌마성에서 제일 슬픈 건데.”

“뭔데?”

“남편한테선 이제 내가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걸 이해하게 되어버린다는 거야. 미혼인 경우에는 그래도 희망이란 게 있는데 남편이 있다면 진짜 디 엔드잖아. 다른 남자를 찾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좀 큰, 차원이 다른 액션이란 말이지.”

“아.....”

“그런 거.”

“......결혼한 상태에서만 오는 외로움이 있긴 한 거 같다. ”

 

“그런데 나쁘지 않아. 포기를 하게 되니까. 나쁘게 말하면 포기고 좋게 말하면 인정인데, 결혼 안 하면 영원히 희망을 가지거든. 안 당해봐서. 내 마지막 사람도 내 것이 아니라는 배신감, 함 당해봐야 알지. 그니까 희망이 있는 상태에서는 백 퍼센트는 없다는 걸 절대 인정 안 하려 하거든. ㅈ도 백퍼센트가 어딨냐. 세상에.”

“으하하하하하.”

“이게 ㅈ나 인생의 레슨이거든. 백 퍼센트는 백 퍼 없거든. 백 퍼센트를 요구받는 사람은 또 얼마나 갑갑하겠느냐고, 지는 한다고 하는데. 점점 ‘행복해지려면 이대로를 고마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거를, 이 지하철 ‘사랑의 편지’ 같은 데 나올 것 같은 말을 진짜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

pp.233-235

 

 

 

'아줌마성'에 대해 심히 공감한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더 이상 진정으로 설레지 않고 생기를 잃어가는 상태가 아줌마성의 본질이다. 지하철 '사랑의 편지'나 잡지 '좋은 생각'을 보고 진정으로 감동할 때 난 이제 정말 아줌마가 되었다고 느낀다.

 

아들이 엄마 개미 허리 같아.

아이구, 고맙네 아들.

개미는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져 있지, 우하하.

하고 도망갈 때 난 다 아는 농담이지만(마음의 소리에서 봤다, 요 녀석아) 엄청 분한 척하면서 등짝 스매싱을 날린다.

 

진정한 엄마가 된 기분. 막 의기양양하구나. ㅋ

 

 

의지 없는 인생의 아름다움.

어영부영 가는 인생의 사랑스러움.

의지로는 사랑할 수 없지. 의지로는 사랑을 지속할 수도 없다. 적어도 나는 할 수 없다.

p. 179

 

 

어영부영... 흐지부지...

이런 거 정말 싫었는데 요즘의 생활이 딱 그렇다.

뭔가 막 주장하고 나면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30대에 정말 그렇게 해야 한다,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어떤 사상이라든가 주장보다는 그 속의 사람이나 상황을 보게 된다. 그러니 점점 더 할말이 없어졌다. 애들에게도 얘야, 넌 이렇게 살아라, 하는 게 점점 적어진다.

 

나는 오히려 무언가에 대해 강한 의견을 토로하고 나면 좀 염려가 된다.

다른 이가 그러는 걸 봐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그 의견이 살다보면 변할 수도 있을 텐데.

살다보면 정도가 아니고, 새로운 정보와 경험이 있을 경우 당장 내일이라도 변할 수 있는데.

무엇을 파고 파고 들어가면 입장이 바뀌는 일은 정말 흔하지 않던가.

입장이 바뀌지는 않더라도 이해해버리는 마음이 나지 않던가. 슬쩍 풀어져버리지 않던가.

p.177

 

다 그럴 수도 있지, 를 달고 산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건 정말 사람 수만큼의 주장이 있고 같은 편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도 해도 완전히 같은 생각은 아니라는 거다.

 

다른 사람 충고 듣지 마. 다 자기 맥락에서의 자기 말이야. 충고 안 들어서 망할 거면 망해버려.

네 방식대로 망해버려. 망해서 빨리 알아차리게.다 늦어서 망하면 어떻게 다시 돌아오려고 그래.

그러니까 걱정 말고 확, 알겠지 확, 피어버리자. p.250

 

속시원하다. 충고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자기 입장을 확인받고 싶은 것일 뿐이다. 빨리 시도하고 망하든 흥하든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게 좋다. 그리고 지나치게 걱정 말고.

 

 

*

 

에세이에서는 '놈팡이' 같은 일상을 주로 썼지만 실은 바지런하게 일하고 살림하는 듯하다. 한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사람답게 의지나 생각이 아닌 자동적으로 몸에 밴 부지런함이 있겠지.

 

나보다 계피님은 무려 몇 살이나 어리지만 대학 때 속깊은 후배를 보고 많이 배웠듯이 삶에 대한 태도를 한 수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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