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 암을 치유하며 써내려간 용기와 희망의 선언
이브 엔슬러 지음, 정소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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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몸과 세계의 몸을 스캔하다 [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영혼 살인"이란 말, 혹시 아시나요?

뒤숭숭한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2015년 초입.

엽기적인 살인 사건과 화재 사건 등에 보태어 또다시 어린이집 아동 폭행 사고가 터졌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를 품고 사는 엄마들을 포함, 전국민을 분노케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죠.

아동이 어린 시절 당한 폭력은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 그 정신적 충격이 미칠 영향을 가늠조차 할 수 없기에 감히 "영혼 살인"이란 말을 써도 결코 과한 것이 아닙니다.

외국과 달리 아동 폭력에 대한 인식이 뒤늦게 깨인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이라고 합니다.

연이어 이런 사건을 보도하며 경각심을 일깨우는 상황을 보면 서서히 인식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하긴 합니다만.

 

어떻게 절묘하게 시기가 맞아떨어졌는데, [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를 읽어보니 주인공 이브 엔슬러 또한 "영혼 살인"의 피해자였군요.

베스트셀러인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저자인 그녀는 여성과 여자아이에 대한 폭력을 없애기 위한 운동인 '브이데이'를 창설하고 온 생애를 바쳐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친부로부터 근친상간을 당한 피해자인데도  엄마를 배신하고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고 극한의 극한까지 자기 자신을 내몰았던 엄청난 혼란의 시기를 보내야만 했죠.

술과 마약, 섹스 중독. 그녀가 속한 곳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습니다.

유혹하는 아빠와 완벽한 엄마라는 어릴 적 사랑의 삼각관계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녀는 완전히 길을 잃은 채 재능과 능력을 마구 낭비하고 있었죠.

가장 중요한 형성기에 뇌세포를 마약으로 망가뜨리며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절망적인 과거를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한 글들을 읽으니 안타까운 마음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그녀의 경험을 읽어나가는 것 뿐이었는데도...

너무 과한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어린이집 폭행 사건의 피해자인 아이들에게도 이런 마음의 상처가 지워져서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남편과 술 한 잔 기울이며 "죽일 놈들..."이라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푸념을 늘어놓았었습니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방편이랄까, 자신의 몸이 기준이 되지 못함을 알기에 다른 여성들에게 "버자이너"에 대해 묻기 시작한 그녀는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버자이너"에 대해 아주 많이 이야기한 결과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말해주기 시작했다고  해요.

극심한 전쟁에 시달리고 있던 나라 콩고-콩고는 그녀의 말에 의하면 가장 극악한 행위가 한없는 선함과 한순간 만나는 곳입니다.-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전염병을 목격한 그녀는 몸의 종말, 인류의 종말, 세계의 종말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폭력의 이야기 안에 피어나는 불굴의 투지와 생명력을 발견한 그녀는 여성들의 갈망과 꿈, 욕구와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해 '환희의 도시'라는 장소를 만들기로 하고 노력한 결과 개원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녀의 몸에서 암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책은 암이 발견된 후 치료를 하는 7개월간의 여정을 암치료과정 중  실시하는 "스캔"의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스캔의 과정에는 그녀의 암 투병기와 함께 그녀의 전 생애가 골고루 비춰집니다.

한치 숨김없이 , 거짓없이.

 

나는 피였고 똥, 오줌, 고름이었다. 화끈거리고 헛구역질 나고 고열에 시달리며 기운을 잃어갔다. 나는 몸을 가진 존재였고, 몸 안에 있었다. 몸이었던 것이다. 몸. 몸. 몸.

비정상적으로 분열되는 세포의 질병인 암은 나를 갈라놓았던 벽을 없애고 나를 내 몸 안에 내려놓았다. 콩고가 나를 세계의 몸 안에 내려놓은 것처럼. -20

 

몸 안의 모든 세포 구석구석까지 거침없이 파고드는 스캔의 빛줄기는 그녀의 몸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몸까지 비추고 있습니다. 

그녀가 콩고의 여성들을 위해 일하는 동안 내팽개쳐두었던 스스로의 몸은 암 투병기간 동안 다시 그녀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멕시코 만 기름 유출이나 여성의 몸에 대한 침탈과 함께 벌어지는 콩고의 광물 약탈 등은 그녀의 글 속에서 "세상의 몸"으로 표현되며 스캔의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지구 한바퀴를 둘러보면 파괴의 양상을 보이는 곳이 있는 반면, 회복의 기운이 뒤덮고 있는 곳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절망적인 현실을 비추는 동시에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한걸음도 더 디딜 수 없고 숨 한 번 더 쉴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제 2의 바람의 찾아온다. 그러면 정말 한 발짝 더 움직이고 숨 쉬게 되는 것이다. -239

 

영혼 살인의 잔인한 과정을 견디고 나의 몸을 똑바로 바라보고 나아가 세계의 몸까지 스캔한 그녀는 마침내 다시 딛고 일어났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외면하고 싶었던 어머니조차 용서한 그녀의 강렬한 내면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단단함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네요.

에너지를 간직한 그녀의 글을 보니 잔잔한 일상을 보내던 저에게도 진동이 이는군요.

무엇을 향한 제2의 바람이든지간에 그 바람을 정면으로 맞이할 마음의 준비는 시작된 셈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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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7
무라카미 하루키.오자와 세이지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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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할배의 우아함 [오자와 세이지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내가 웬만해서는 "할배"라는 단어를 잘 안 쓰려고, 특히 아이들 앞에서는 바른 단어를 쓰려고 노력하는데,

이번만은 도저히 "꽃할배"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음악과 문장에서 거장이라 불릴 만한 두 분이 대담을 나누는데

그 대화가 그렇게 우아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날카로움이 아니라 친근함을 베이스에 깐 것이라

'어르신' 의 진중하고 중후한 대화 느낌이 아닌 '꽃할배' 의 우아한 수다 느낌에 좀 더 가깝다.

 

리듬이 있는 문장, 자음과 모음이 있는 음악

이라는 표현이 거짓이 아니라는 게 표지에서부터 팍팍 풍겨져 나온다.

자음과 모음이 갈라져도 리듬이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 시각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클래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무의식중에 경직되어 있던 마음이

표지를 보는 순간 만둣국에 계란물 풀리듯이

스르륵 풀어져 버린다.

 

 

표지에는 상반신만 나와 있지만 잘 접혀진 부분을 펼치면 두 분의 전신이 짜잔 펼쳐진다.

이거이거, 안 펼쳐 봤으면 어쩔 뻔 했어~

두 분의 신체 비례, 간소하면서도 멋들어진 스타일, 꽃할배의 우아함을  모르고 유머러스한 표정만 기억할 뻔 했다.

가로 결의 무늬가 살짝 느껴지는 맨들맨들한 표지를 이상하게 자꾸 어루만져 보게 된다.

두 분의 얼굴을 쓰담쓰담 하고 있으니 꽃할배들이 더 가깝게 여겨진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재즈에 일가견이 있는 하루키는 재즈 못지 않게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도 좋아한단다.

내가 그의 음악 취향까지 두루 간섭해야 할 일은 없고, 그럴 일이 있을 수도 없지만

하루키가 클래식 음악의 팬인 덕분에

이런 만남이 성사된 것이니

조금쯤은 고마운 마음을 가져본다.

 

항상 음악에 흠뻑 젖어 생활하는 마에스트로 오자와 씨와 하루키는 개인적인 친분으로 가끔 만나 음악 아닌 다른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는데  오자와 씨의 투병 생활을 계기로 음악 얘기를 하기까지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일 뿐이라며 겸손을 떨지만 결코 마에스트로에 뒤지지 않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하루키는 둘 사이의 대담을 그냥 흘려보내기 너무 아까워서 녹음을 하고

기록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장장 일 년에 걸친 특별한 인터뷰. 일본과 하와이, 스위스 등 곳곳에서 진행된 대화들이 소중하게 기록되었다.

 

음악을 들을 때면 무심히 귀를 기울이며 그 음악의 멋진 부분만을 순수하게 취해 몸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음악이란 기본적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13

 

비록 클래식에 심취하지는 않았어도 편안한 가운데 오가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등의 이야기에는 귀와 눈이 저절로 뜨인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를 정식으로 해본 적이 없군요."라는 마에스트로의 감상이 하루키에게는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보수라고 했는데, 내게는 대담집을 내겠다는 하루키의 기획이 더없이 멋진 선물이 되는 것 같다.

 

꽃할배 음악가와 문장가가 만나 나누는 우아한 대화를 편안하게 앉아서 듣는 기쁨이 너무 크다.

말러를 개척하고 대중화시킨 레너드 번스타인, 오자와에게 오페라를 권하고 살뜰히 챙겨주었던 카라얀 등의 전설적인 거장들이 이야기 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고, 그들이 일구어낸 클래식의 역사가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상설 오케스트라가 아닌 사이토 기넨을 창설하고 그 시스템을 음악적 조류로 만들어낸 오자와 세이지의 이야기도 특별하고  개별 악기 주자들에 대한 추억담 또한 쏠쏠한 재미를 안겨준다.

이 책을 읽은 후에는 클래식과 나 사이에 높은 벽이 가로막힌 것 같은 막막함을 토로하게 될 줄만 알았는데, 꽤나 부드럽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어느새 편하게 기대앉아 다음 장을 기대하며 책장을 빨리 넘기게 되었다.

우아한 꽃할배가 소싯적, 유명 지휘자의 지휘봉을 세 개 슬쩍했다는 여담에서 한바탕 폭소 만발!!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파바로티와 <토스카>를 공연한 후 객석에서 받은 야유를 오자와 씨의 어머니는 브라보로 착각했다는 이야기 또한 웃기기로는 뒤지지 않는다.

 

 

클래식 이야기가 그렇게 낯설지 않은 것은,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모두가 칸타빌레]의 영향 탓인지도 모른다.

일본 애니메이션 '노다메 칸타빌레'가 원작인데 원작에도 있는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드라마의 중간에 주인공이 뛰어난 엘리트들만이 참가하는 음악 세미나에 참석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그 세미나가 바로 '오자와 세이지 스위스 국제음악아카데미'.

특별 게스트 자격으로 참가해서 학생들의 변화 과정을 살펴본 하루키는 그 과정을 목격하면서 자신도 배우고 성장한 듯한 감각을 느꼈다고 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신종 동물 하나라 무명의 세계에 탄생한 것 같았다고.

 

그것은 아마도 반세기 이상 세계적인 일류 지휘자로 활약하신 오자와 씨의 '직업상 비밀'일 것이다. 아니,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비밀도, 블랙박스도,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저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오자와 씨만이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좋은 음악'이 완성되는 데 필요한 것은 일단 스파크이고, 그 다음이 마술이다. 둘 중 하나라도 빠지면 '좋은 음악'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316

 

책을 덮고 나서 왠지 하루키의 애장 레코드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애장 레코드까진 너무 욕심인가, 이 책에 소개된 몇 편의 오케스트라 연주 실황 음원만이라도 ...

내 감상은 꽃할배들의 우아함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정녕코 음악이 마법이라는 말에는 동의하는 바,

음악의 마법에 빠져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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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14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 책에 언급되는 팝송을 따로 메모해서 나중에 찾아 듣곤 했어요. 얼추 하루키가 선호하는 음악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었어요.

남희돌이 2015-01-14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노르웨이의 숲] 버전으로 읽었군요. 저는 그 책을 읽을 무렵에는 음악보다는 소세키의 마음, 그후 등. 소개되는 책을 찾아 읽었어요. 물론 비틀즈의 그 노르웨이의 숲이란 건 찾아 들었네요. cyrus 님, 친구수락 감사합니다~

cyrus 2015-01-14 16:0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소개해주세요. ^^
 
나란 무엇인가 - 진정한 나를 깨우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철학 에세이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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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얻는 또다른 방법 [나란 무엇인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괴]를 다시 꺼냈다. 1권을 읽고서 추리소설이지만 꽤 무겁고 읽을수록 우울해지는 것 같아 덮어 둔 책이었다. 군데군데 북다트를 꽂아 넣어둔 흔적이 보였다. 저걸 아직도 빼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었다니...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란 에세이를 앞에 두고 보니, 그의 작품을 꺼내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장편소설 [던]을 간행한 후, 작품 안에서 다룬 ‘분인주의’에 관해 일반인이 좀 더 접근하기 쉽게 정리할 의도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앞부분의 내용이 철학자들의 책에서나 읽었음직한 새로운 개념(분인)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기 때문에 난해하다고 느껴졌다. 곧 뒷부분으로 가서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내용과 연결되기 때문에 계속 골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었지만, 이 작가, 참 진지하게 인간에 대해 성찰하는구나 하는 것이 새삼 피부로 와 닿아서 그의 작품 중 지니고 있던 [달]과 [결괴]를 꺼내보게 된 것이다. 처음 그의 [달]을 읽고 나서 그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해 이런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다, 하여 [일식]을 읽었는데, 완전히 다른 시대, 다른 인물이 나와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결괴]를 보고서는 “정말, 이 작가가 [달]을 쓴 그 사람 맞아?” 쉽사리 연결이 되지 않아 책을 덮어버릴 정도였는데...작품들의 편력이 “정체성”에 대한 탐구의 발자취였다고 생각하니 [달] 이후로 종횡무진 달리던 붓이 아무 맥락 없이 전개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작가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나”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 힘을 쏟는다.

인간관계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때문인지 사람들이 더더욱 정체성의 확립에 혼란을 갖게 되는 현실에 초점을 맞춘 작가는 그래서 ‘개인’이 아닌 ‘분인’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고찰을 해 온 작가는 데뷔작 일식 이후로도 달, 장송, 최후의 변신, 그리고 결괴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나/거짓된 나 ’라는 모델을 가지고 정체성을 인식하기에 힘써왔다. 하지만 대인관계 속에서 실제로 생겨 나는 여러 인격을 발판으로 놓아 본다면 ‘진정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작가는 “분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개인을 나누어서 분인이라는 단위로 생각해보면 한 인간 안에는 여러 개의 분인이 존재한다. 부모와의 분인, 연인과의 분인, 친구와의 분인, 직장에서의 분인...

“나”라는 인간은 이런 분인들의 집합체다. 관계가 깊은 상대와의 분인은 크고, 관계가 얕은 상대와의 분인은 작다.

 

이런 식으로 “나”에 접근해 간다면 현대의 우리가 느끼는 자아의 상실감에 대해 어느 정도 위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결괴]의 주인공은 진정한 나라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심각한 공허감에 시달렸고, 결국은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악마” 행세를 하기에 이른다. “악”의 반대는 “행복”이라는 일그러진 관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나의 여러 분인 중에서 나를 긍정하기 위한 입구를 만나기만 하면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논리가 괜시리 마음에 위로가 된다.

“나 자신이든 세상이든, 둘 중 어느 하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있어. 그런데 난 그 무렵에 그 둘 다에 애정을 잃어갔지.”<결괴>

“분인”의 개념을 [결괴]의 주인공에게 적용했더라면 비극적인 결말은 막을 수 있었을까...

 

이후에 “연과 애”, 죽음과 연관지어서까지 분인의 개념을 적용시키고 마지막으로 유전요인과 환경요인까지 두루 살펴보는 것으로 책은 마친다.

“개인”을 더 나누어서 “분인”의 개념을 성립시키기까지 자신의 작품으로 실험하고 탐구한 작가, 정말 범상치 않다.

책을 읽을 때 행복한 나, 아이들 앞에서는 이상하게 호랑이가 되는 나, 일을 마치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안쓰러우면서도 서운한 나.

페르소나와는 또다른 개념의 분인으로 나를 설명하자 나는 더 이상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 다양한 분인을 지닌 온전한 “나”가 되었다.

 

이제는 [결괴]2권을 제대로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다. 에세이에서 밝힌 바대로, 작가가 좋아하는 모리 오가이와 미시마 유키오,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을 언급한 부분이 작품에 나오면 어렵다, 며 대충 읽어넘기지 않고 집중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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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 문학에서 찾은 사랑해야 하는 이유 아우름 2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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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통달한 마음을 비웃어라 [사랑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책은 장영희가 여러 라디오 방송에서 했던 '문학 강연' 원고를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병으로 떠나면서도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던 그녀가 남긴 글이라서인지 "사랑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란 제목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다.

"오늘"이란 시간을 충분히 가치 있게 써야겠다, 생각하지만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덧 오늘 하루도 손 뻗어 잡기에는 아쉬운 꼬리만을 남기고 슈욱, 자취를 감춰버린다.

 

이 책은 하루를 인생에 비유했을 때, 40 살 언저리 쯤의 나절인 정오 즈음에 읽으면 좋겠다.

하루의 한가운데, 타오르는 태양을 머리 위에 얹어 두고서

마음에 점 하나를 찍듯 가벼운 점심을 즐기며

사랑에 관한 구절을 하나씩 곁들이면 좋겠다.

 

불혹의 나이를 넘기면서 어느 정도 여유롭게 삶에 대한 포용력을 가지고 조금은 호기를 부릴 수도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그녀는 그러면서 불혹을 슬픈 말이라고 했다.

보고 듣는 것에 유혹받지 아니하고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 함.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격하지 않고, 슬픈 것을 보고 눈물 흘리지 않고, 불의를 보고도 노하지 않으며, 귀중한 것을 보고도 탐내지 않는 삶은 다만 허망할 뿐이라고.

그리하여 사랑에 익숙지 않은 옹색한 마음이나 사랑에 '통달'한 게으른 마음을 비웃고 동정하며 열심히 사랑하라고 한다.

 

나 역시 사랑에 '통달'하고 만 게으른 마음을 가지고 널부러져 있는 건 아닌지.

위대한 개츠비의 "위대함"을 비웃으며 불가능한 사랑을 향해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제 한 몸 불살랐던 그를 연민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피츠제럴드는 책의 첫 부분에서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삶 속의 희망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사랑에 실패해도 다시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 즉 언제라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낭만적 준비성'

그리고 삶의 경이로움을 느낄 줄 아는 능력

 

아. 사랑이라는 감정에 게을러진 나를 개츠비의 위대함이 일으켜세운다.

화초에 물을 주면 싱싱함을 되찾는 것처럼, 사랑이란 감정도 날씨와 습도 등을 고려하여 물을 뿌려주면서 살뜰히 챙겨주고 관심을 보여주어야  시들지 않는다.

 

히스클리프가 폭풍우 치는 언덕에서 바람과 싸우며 마음 속에 쌓아 올렸던 지독한  사랑

가슴 속에 언제나 시가 넘쳐 흐르게 만드는 사랑

병마조차도 물러가게 하여 사람을 살게 하는 사랑

 

문학 작품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랑을 소개하며 오래 전에 내게서 잊혀졌던 "사랑"이라는 것을 환기시켜 주는 이 책은 참 좋다.

 

한 번도 사랑해 본 적 없는 것보다

사랑해 보고 잃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을. -테니슨, 사우보

 

지옥이란 다름 아닌 바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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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생명 이야기 아우름 1
최재천 지음 / 샘터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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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두루 공부되는 책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샘터에서 "아우름"이라는 인문교양 시리즈가 발간되었다.

아우름은 라틴어로 '빛나는 새벽'이란 뜻이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에 빛나는 새벽을 여는 책을 만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세대를 아우르는 지혜, 앞 세대가 다음 세대를 껴안는 사랑을 담는다고 한다.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이다.

 

현재 1권부터 3권까지 나와 있고, 4,5권은 근간이라고 한다.

세 권 모두 표지가 다르면서도 은은한 색감으로 통일감이 있다.

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하나 하나 다 소중한 내용을 담고 있어 소장가치가 충분한 책들이다.

 

최재천 교수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는데, 무척 부끄럽게도 그의 책을 제대로 정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곤충이나 동물을 다루는 아동서의 추천사에서 그의 이름을 종종 보았다. 최근에는 [이 사슴은 내 거야] 라는 유명한 그림책의 띠지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꽤 권위있는 학자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새해에 즈음하여 읽은 에세이에서도 또 그를 만났다.  [별이 빛나는 건 흔들리기 때문이야]라는 책은 십대들의 쪽지에 보낸 유명인사들의 글을 모아놓은 책이었는데 거기서 또 청소년들의 멘토역할을 하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이력에 관한 궁금증이 뭉게뭉게 일었다.

 

최재천은 방황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라며 '아름다운 방황'을 적극 권하는 '방황 전도사'.'생명'이라는 화두를 품고 동물학자로 살고 있다고 한다.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고자 설립한 통섭원의 원장이며 40 여 권의 책을 번역하고 저술했다.

 

소문만 무성한 인물의 실체를 이제서야 파악하게 되다니.

과연 이 책 속에는 그의 면면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자칭 촌놈 출신이라며 그는 어린 시절 쥐 새끼를 물고 빨고 하며 데리고 놀던 추억, 쇠똥구리 한 마리를 온종일 손에 쥐고 놀던 기억 등을 끄집어 내면서 자연을 사랑하는 나름의 방식을 이야기해주었다.

집안 어른들의 바람은 의대에 진학하는 것이었지만 연이어 낙방하고 차선책으로 생물학과에 진학하게 된 그는 개울에 직접 뛰어들어 '생물학'을 연구하는 유타 대학의 곤충학 교수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살 수 있습니까?"하고 질문했다. 미래의 일을 찾기 위해 고민하던 그에게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 교수가 있어 그는 유학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진짜 원하는 꿈을 확고히 하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과정을 거쳐 현재의 자신이 되었다는 그의 말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정말로 침팬지입니다. 양쪽 손 다 손금이 가로로 일자인데, 이것이 바로 침팬지 손금입니다. 침팬지인데 털 깎고 여러분 옆에서 수십 년 동안 숨어서 잘 산 것입니다. 대학 교수도 되고, 강의도 하는 그런 침팬지입니다. -25

 

위트 있고 정감 있는 말로 독자에게 다가온 그는 다음 세대에게 왜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전해준다.

"생명은 모두 이어져 있고, 손잡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그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다고 했다. 모든 학문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우리는 왜 태어나 이런 삶을 살고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를 설파한다 싶다가도 다윈의 진화론을 들먹이고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한 뒤에는 그를 통해 얻게 된 결론을 우리의 삶에 접목시켜 교훈을 전달하는 그의 글은 알고자 하는 욕구를 깨운다.

취미로 하는 독서도 좋지만, 내가 모르는 분야의 책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진짜 독서라는 말이 은근, 익숙하고 편한 책들만 편식하던 나를 자극한다.

 

이 책은 2015년을 새로이 시작하는 때에 '통섭'의 대가답게 두루두루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 소개하더니, 결국에는 나의 독서습관까지 다시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준다.

아우름의 시리즈 1권으로 내세울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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