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 암을 치유하며 써내려간 용기와 희망의 선언
이브 엔슬러 지음, 정소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몸과 세계의 몸을 스캔하다 [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영혼 살인"이란 말, 혹시 아시나요?

뒤숭숭한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2015년 초입.

엽기적인 살인 사건과 화재 사건 등에 보태어 또다시 어린이집 아동 폭행 사고가 터졌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를 품고 사는 엄마들을 포함, 전국민을 분노케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죠.

아동이 어린 시절 당한 폭력은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 그 정신적 충격이 미칠 영향을 가늠조차 할 수 없기에 감히 "영혼 살인"이란 말을 써도 결코 과한 것이 아닙니다.

외국과 달리 아동 폭력에 대한 인식이 뒤늦게 깨인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이라고 합니다.

연이어 이런 사건을 보도하며 경각심을 일깨우는 상황을 보면 서서히 인식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하긴 합니다만.

 

어떻게 절묘하게 시기가 맞아떨어졌는데, [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를 읽어보니 주인공 이브 엔슬러 또한 "영혼 살인"의 피해자였군요.

베스트셀러인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저자인 그녀는 여성과 여자아이에 대한 폭력을 없애기 위한 운동인 '브이데이'를 창설하고 온 생애를 바쳐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친부로부터 근친상간을 당한 피해자인데도  엄마를 배신하고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고 극한의 극한까지 자기 자신을 내몰았던 엄청난 혼란의 시기를 보내야만 했죠.

술과 마약, 섹스 중독. 그녀가 속한 곳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습니다.

유혹하는 아빠와 완벽한 엄마라는 어릴 적 사랑의 삼각관계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녀는 완전히 길을 잃은 채 재능과 능력을 마구 낭비하고 있었죠.

가장 중요한 형성기에 뇌세포를 마약으로 망가뜨리며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절망적인 과거를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한 글들을 읽으니 안타까운 마음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그녀의 경험을 읽어나가는 것 뿐이었는데도...

너무 과한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어린이집 폭행 사건의 피해자인 아이들에게도 이런 마음의 상처가 지워져서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남편과 술 한 잔 기울이며 "죽일 놈들..."이라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푸념을 늘어놓았었습니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방편이랄까, 자신의 몸이 기준이 되지 못함을 알기에 다른 여성들에게 "버자이너"에 대해 묻기 시작한 그녀는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버자이너"에 대해 아주 많이 이야기한 결과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말해주기 시작했다고  해요.

극심한 전쟁에 시달리고 있던 나라 콩고-콩고는 그녀의 말에 의하면 가장 극악한 행위가 한없는 선함과 한순간 만나는 곳입니다.-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전염병을 목격한 그녀는 몸의 종말, 인류의 종말, 세계의 종말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폭력의 이야기 안에 피어나는 불굴의 투지와 생명력을 발견한 그녀는 여성들의 갈망과 꿈, 욕구와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해 '환희의 도시'라는 장소를 만들기로 하고 노력한 결과 개원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녀의 몸에서 암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책은 암이 발견된 후 치료를 하는 7개월간의 여정을 암치료과정 중  실시하는 "스캔"의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스캔의 과정에는 그녀의 암 투병기와 함께 그녀의 전 생애가 골고루 비춰집니다.

한치 숨김없이 , 거짓없이.

 

나는 피였고 똥, 오줌, 고름이었다. 화끈거리고 헛구역질 나고 고열에 시달리며 기운을 잃어갔다. 나는 몸을 가진 존재였고, 몸 안에 있었다. 몸이었던 것이다. 몸. 몸. 몸.

비정상적으로 분열되는 세포의 질병인 암은 나를 갈라놓았던 벽을 없애고 나를 내 몸 안에 내려놓았다. 콩고가 나를 세계의 몸 안에 내려놓은 것처럼. -20

 

몸 안의 모든 세포 구석구석까지 거침없이 파고드는 스캔의 빛줄기는 그녀의 몸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몸까지 비추고 있습니다. 

그녀가 콩고의 여성들을 위해 일하는 동안 내팽개쳐두었던 스스로의 몸은 암 투병기간 동안 다시 그녀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멕시코 만 기름 유출이나 여성의 몸에 대한 침탈과 함께 벌어지는 콩고의 광물 약탈 등은 그녀의 글 속에서 "세상의 몸"으로 표현되며 스캔의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지구 한바퀴를 둘러보면 파괴의 양상을 보이는 곳이 있는 반면, 회복의 기운이 뒤덮고 있는 곳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절망적인 현실을 비추는 동시에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한걸음도 더 디딜 수 없고 숨 한 번 더 쉴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제 2의 바람의 찾아온다. 그러면 정말 한 발짝 더 움직이고 숨 쉬게 되는 것이다. -239

 

영혼 살인의 잔인한 과정을 견디고 나의 몸을 똑바로 바라보고 나아가 세계의 몸까지 스캔한 그녀는 마침내 다시 딛고 일어났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외면하고 싶었던 어머니조차 용서한 그녀의 강렬한 내면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단단함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네요.

에너지를 간직한 그녀의 글을 보니 잔잔한 일상을 보내던 저에게도 진동이 이는군요.

무엇을 향한 제2의 바람이든지간에 그 바람을 정면으로 맞이할 마음의 준비는 시작된 셈이라고 할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