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를
얻는 또다른 방법 [나란 무엇인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괴]를 다시 꺼냈다. 1권을 읽고서 추리소설이지만 꽤 무겁고 읽을수록 우울해지는 것 같아 덮어 둔 책이었다. 군데군데 북다트를
꽂아 넣어둔 흔적이 보였다. 저걸 아직도 빼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었다니...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란 에세이를 앞에 두고 보니, 그의 작품을 꺼내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장편소설 [던]을 간행한 후, 작품
안에서 다룬 ‘분인주의’에 관해 일반인이 좀 더 접근하기 쉽게 정리할 의도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앞부분의 내용이 철학자들의 책에서나
읽었음직한 새로운 개념(분인)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기 때문에 난해하다고 느껴졌다. 곧 뒷부분으로 가서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내용과
연결되기 때문에 계속 골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었지만, 이 작가, 참 진지하게 인간에 대해 성찰하는구나 하는 것이 새삼 피부로 와 닿아서 그의
작품 중 지니고 있던 [달]과 [결괴]를 꺼내보게 된 것이다. 처음 그의 [달]을 읽고 나서 그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해 이런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다, 하여 [일식]을 읽었는데, 완전히 다른 시대, 다른 인물이 나와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결괴]를 보고서는
“정말, 이 작가가 [달]을 쓴 그 사람 맞아?” 쉽사리 연결이 되지 않아 책을 덮어버릴 정도였는데...작품들의 편력이 “정체성”에 대한 탐구의
발자취였다고 생각하니 [달] 이후로 종횡무진 달리던 붓이 아무 맥락 없이 전개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작가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나”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 힘을 쏟는다.
인간관계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때문인지 사람들이 더더욱 정체성의 확립에 혼란을 갖게 되는 현실에 초점을 맞춘 작가는 그래서
‘개인’이 아닌 ‘분인’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고찰을 해 온 작가는 데뷔작 일식 이후로도 달, 장송, 최후의 변신, 그리고 결괴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나/거짓된 나
’라는 모델을 가지고 정체성을 인식하기에 힘써왔다. 하지만 대인관계 속에서 실제로 생겨 나는 여러 인격을 발판으로 놓아 본다면 ‘진정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작가는
“분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개인을 나누어서 분인이라는 단위로 생각해보면 한 인간 안에는 여러 개의 분인이 존재한다. 부모와의 분인,
연인과의 분인, 친구와의 분인, 직장에서의 분인...
“나”라는
인간은 이런 분인들의 집합체다. 관계가 깊은 상대와의 분인은 크고, 관계가 얕은 상대와의 분인은 작다.
이런
식으로 “나”에 접근해 간다면 현대의 우리가 느끼는 자아의 상실감에 대해 어느 정도 위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결괴]의
주인공은 진정한 나라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심각한 공허감에 시달렸고, 결국은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악마” 행세를 하기에 이른다. “악”의
반대는 “행복”이라는 일그러진 관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나의
여러 분인 중에서 나를 긍정하기 위한 입구를 만나기만 하면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논리가 괜시리 마음에 위로가 된다.
“나
자신이든 세상이든, 둘 중 어느 하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있어. 그런데 난 그 무렵에 그 둘 다에 애정을
잃어갔지.”<결괴>
“분인”의
개념을 [결괴]의 주인공에게 적용했더라면 비극적인 결말은 막을 수 있었을까...
이후에
“연과 애”, 죽음과 연관지어서까지 분인의 개념을 적용시키고 마지막으로 유전요인과 환경요인까지 두루 살펴보는 것으로 책은 마친다.
“개인”을
더 나누어서 “분인”의 개념을 성립시키기까지 자신의 작품으로 실험하고 탐구한 작가, 정말 범상치 않다.
책을
읽을 때 행복한 나, 아이들 앞에서는 이상하게 호랑이가 되는 나, 일을 마치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안쓰러우면서도 서운한 나.
페르소나와는
또다른 개념의 분인으로 나를 설명하자 나는 더 이상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 다양한 분인을 지닌 온전한 “나”가 되었다.
이제는
[결괴]2권을 제대로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다. 에세이에서 밝힌 바대로, 작가가 좋아하는 모리 오가이와 미시마 유키오,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을
언급한 부분이 작품에 나오면 어렵다, 며 대충 읽어넘기지 않고 집중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