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독서와 학문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3
정재훈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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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리더십의 근원 [영조의 독서와 학문]

 

근자에 들어 사극의 다양한 해석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근엄한 표정으로 왕좌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는 "왕"의 이미지가 사뭇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반갑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오소서."

라는 말은 신하들의 고정 레퍼토리로서 왕에게 납작 엎드린 채 조아려 고하는 신하들의 모습은 왕의 권위적인 모습을 더할나위 없이 효과적으로 보여주곤 했었는데...

이제는 왕의 웃음도, 식탐도, 사랑도 상상 가능한 시절이 되었다.

어디까지나 드라마나 영화 같은 시각적 영상을 통해서 보여지는 왕들의 이미지가 다양화되었다는 말이지, 실상 왕들의 "진짜" 모습은 그 누가 특정지어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왕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역사적 사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후세인들이 "상상 이상"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멋있는 목소리를 입히고 찬란한 외모를 더하고 늠름한 태도를 덧입혀 만들어낸 왕이 진짜일 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짜 왕의 모습을 어디에서 가장 가까이 접할 수 있을까?

물론 세계 유래 없는 꼼꼼한 기록을 남긴 조상들 덕택에 우리는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라는 위대한 유산 안에서 왕의 흔적을 좇을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아 오던 "꾸며진" 왕 말고, 웃음기 싹 거둔 "정색" "영조"를 [영조의 독서와 학문] 속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며 조선후기를 빛낸 임금으로 영조와 정조를 꼽을 수 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장수한 임금이며 가장 오래 재위한 임금 영조는 검소하고 눈물 많고 인간적이며 백성의 삶을 잘 헤아린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영조는 다소 예민한 성격의 임금으로 그려진다.

무수리 숙빈 최씨의 소생이었던 영조는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 더하기 이복형 경종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숙종의 총애와 노론의 역할 덕택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숙종처럼 강력한 왕이 되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열망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영조의 독서와 학문에 대해 고찰하면서 영조의 사상, 대민관, 정책의 기초와 지향 등을 살핀다.

기존 정치 연구에서 영조의 탕평을 주로 연구했던 것과 달리 근원적인 측면에서 영조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지식을 제공한다.

조선후기를 전성기로 이끌고 탕평정치를 구현하였으며 정조와 함께 조선시대 최대의 문화를 만든 영조의 면모는 어디에서, 어떻게 나온 것인가?

 

세제 시절부터 [소학], [강목]등을 공부하고 열심히 학습한 영조는 왕위에 오른 뒤 경연을 통해 본격적으로 독서를 했다. 경연을 학문 탐구의 자리로만 활용하지 않고 신하들이 골라주는 책이 아닌, 자신의 뜻에 맞는 책을 골라 진강함으로써 제도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려고 했다. 자신이 직접 만든 책자인 [어제자성편]이나 [어제심감] 등도 경연에서 진강하면서 국왕 주도로 학문을 전파하기까지 했다니 영조의 학문적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즉위 20년 뒤부터 어제서를 본격적으로 간행하기도 한 영조가 생각한 치국의 방향은 대체로 역대 선왕들을 모범으로 삼거나 나아가서 요순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대로 정조에게 이어졌다. 독서와 학문이 뒷받침 되어 탕평책이 이루어진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성리학이 조선 후기, 18세기의 가장 일반적인 원칙이었던 시기, 독서와 학문을 통해 최고의 성취를 이룩했던 영조가  조선의 문제점을 극복할 방법으로 탕평책을 제시했을 때 사림들은 탐탁지 않아했지만 성리학을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했던 영조의 주장을 거부할 수만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실의 원칙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해 최고의 지식과 안목을 가진 인물이 영조와 같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질문을 작가는 던진다.

200여 년전 성공했던 영조의 리더십을 오늘날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라는 관점에서 이 책을 읽으라고 작가는 당부한다.

예와 지금의 겉모습은 변했지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그다지 많이 다르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만 같다.

영조의 독서와 학문에 대응할 만한 오늘날의 가치는 아마도 창의성이 아닐까?

새로운 인간형이 제시할 리더십이 너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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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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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믿고 갈 길을 가다 [검찰 측 죄인]

 

예로부터 판사나 검사, 변호사 같은 법조인이 한 집안에 탄생하기를

우리네 부모들은 빌고 빌어왔다.

뼛속 깊이 법조인의 피를 이어 받은 유서 깊은 가문이 아닌 다음에야

뼈를 깎는 노력을 하거나 "개천에서 용 나는" 정도의 천지개벽이 일어나야

겨우 얻어 입을 수 있었던 법조인의 검은 가운.

 

힘 없고 무식하다며 무지렁이 취급 당하고 모멸감을 받아 온 세월이

얼마나 서러웠으면

좀 똑똑한 자식이 났다 하니

대번에

"우리 집 기둥은 너 하나다. 꼭 판검사 돼야 한다."라는 말을 하고 또 해서

어리벙벙한 자식의 창창한 앞길을 다른 곁가지를 다 치고 단 하나의 길만을 향해 달려가게 했을까.

 

판검사의 옷을 입으려면 똑똑함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 어르신들은 다 헤아리고 그 길로 밀어넣는 것일까.

 

"정의"의 이름으로 죄인과 죄를 천칭에 나란히 올려 형량을 저울질하고

심판하는 막중한 임무를 띄게 될 판검사가 짊어지게 될 무게는

밀어올리기만 하면 다시 떨어지고 마는 시지프스의 돌덩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법제도 개혁으로 신설된 법과 대학원을 거쳐 신사법시험에 합격한 신 60기 연수원에서 교관과 제자의 연으로 만나게 된 모가미와 오키노.

앞으로 법률이라는 검 한 자루를 손에 쥐고 휘두르게 될 연수원 졸업생에게 모가미는 "검을 든 자는 용자"여야 한다며 용기와 각오를 심어준다.

오키노는 모가미를 마음 속에서 이상적인 검사의 모습으로 기억하며 검사 생활을 하던 중 드디어 모가미와 만나 사건을 배속받는다.

집 안에서 살해된 노부부의 사건을 맡게 된 오키노는 모가미의 지휘를 받는다는 생각만으로 바짝 긴장하여 사건에 임한다.

범행이 발생한 후 시간도 꽤 흘렀고 범인을 단정할 만한 증거가 현장에 남아 있지 않아 여러 명의 피의자를 물망에 올려 두고 조사하고 있었는데...

경찰과 검찰 간 신뢰 관계를 더욱 굳히기 위해서 경험이 적은 오키노에게만 맡겨놓지 않고 직접 사건을 살펴보던 모가미는 부부의 숨은 교우관계를 조사한 목록 가운데서 '마쓰쿠라 시게오'라는 이름에서 눈길이 멈춰선다.

23년 전, 모가미가 대학생 때 생활한 기숙사 관리인의 외동딸 유키가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때의 유력한 용의자였던 마쓰쿠라는 결정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풀려났던 것이다...

 

유키는 23년 전에 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23년간 태평하게 살아서... -96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사건의 용의자였지만 노부부 살해 사건으로 다시 맞닥뜨리게 된 이 이름 앞에서 베테랑 검사 모가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때마침 순수한 정의로 들끓는 마음을 함께 나눈 법학부 동기였던 단노가 불법 정치헌금에 연루되어 자살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접한 모가미는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마쓰쿠라가 노부부를 죽였다면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것이 천벌로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모가미는 마쓰쿠라를 옭아맬 함정을 만들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한다.

마쓰쿠라를 아무리 취조해도 자백하지 않았고 확실한 살인증거도 나오지 않은 때에 갑작스럽게 살인흉기가 나타나면서 마쓰쿠라는 살인죄를 뒤집어 쓰게 되었다.

오키노는 무엇에 씌인 듯 마쓰쿠라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모가미에게 강한 의심을 품게 되면서 급기야 "검사" 의 옷을 벗어던지고 만다.

변호사로 다시 시작하기 전에 이 사건을 끝장내고야 말리라.

오키노는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가  그토록 존경하고 이상적인 검사의 이미지로 품어왔던 모가미가 법의 심판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심판하려 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정의를 좇아 선배 검사에게 반기를 든 오키노라는 남자의 고뇌가 소설 전편에서 드러난다.

그저 검사라는 직업인으로 살아가지 않고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으로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려 했던, 어찌 보면 되게 멋진 '사나이'가 등장했다. 정의를 관철함으로써 자신을 쫓아낸 선배에게 보복했다며 남들은 축하해주지만 그 축하는 이상하게도 공허한 메아리로 들린다.

진정한 정의는 무엇인가?

법이 심판을 벗어난 악인은 누가 심판해야 하는가?

법으로 심판하는 자에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로 전락한 모가미에게는 어떠한 동정도 가해서는 안되는가?

간만에 제대로 "선과 악"의 오묘한 경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검찰측죄인]

우물쭈물하다 흐리멍덩하게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선명한 흑과 백을 잠시나마 뚜렷하게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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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바쁘니까 고양이가 알아서 할게 - 열여섯 마리 고양이와 다섯 인간의 유쾌한 동거
이용한 글.사진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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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독대라는 신세계 [인간은 바쁘니까 고양이가 알아서 할게]

 

 

 

"ㅅ" 자로 입을 다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저 새침한 표정에

가슴을 막고 있던 답답한 것이 툭 떨어진다.

 

저렇게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면서 눈동자에 무얼 담고 있는지

고양이는 말해 주지 않는다.

그저 몸으로 표현할 뿐.

그렇게 두 앞발을 모으로 얌전히 앉아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차분해지는 건 왜일까?

삼각형으로 뾰족 선 귀로 우주의 기운을 받아 마냥 맑은 눈동자로 되쏘는 그 기운에

보는 이가 찌릿찌릿 감전되는 것일까.

 

 

 

고양이의 기묘하고 흥미롭고 아름다운 포즈는 사진 찍기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이 책 속 고양이들은

바쁜 인간을 위해

알아서

척척 포즈를 취해 준다.

 

 

품에 쏘옥 안아 넣고 싶고

그 보송보송한 털에 마구 얼굴을 부비대고 싶은 아기 고양이.

 

이 책에 등장하는 고양이 열 여섯 마리는 모두 한 때 아기 고양이였다.

이 고양이들이 터 잡은 곳은 이용한의 처갓댁.

이름하여 다래나무집이다.

34개월 아들과 고양이들의 알콩달콩한 모습은

이 세상 어떤 장면보다도 보는 이를 흐뭇하게 미소짓게 한다.

 

오디, 앵두, 살구, 보리, 귀리, 미리 등

과일과 곡식의 이름들이 붙은 고양이들과

앙고, 삼순이, 아무, 거나, 몰라, 삼장 등

톡톡 튀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들은

다래나무 집에서 한 식구가 되어

이제는

"냥독대"를 차지하고 산다.

 

 

장독대 위에 고양이들이 오종종하니 올라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깨물어주고 싶을만큼 귀엽기만 하다.

 

저러다 누구한테 혼나지, 정말~

싶지만

그렇기에 더욱

저 순간이 소중해 보인다.

 

장독대와 고양이가 어우러진 풍경이 한국의 고양이를 가장 한국적으로 표현한 사진이라나.

내 맘에도 쏙 드는 사진이긴 하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고양이 사진들이

책 한 가득 실려 있어

이 책은 어느 때고 부담 없이 들춰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한다.

아파트에서 쉽게 기를 순 없는 것은 개나 고양이나 마찬가지인데

고양이 사진이 담긴 책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아이들 눈에도 고양이가 가진 귀염성이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양이 울음 소리가

아기 울음소리를 닮아

동생처럼 어여삐 여길 마음이 생긴 것 때문일까.

 

어쨌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고양이의 매력에 푹 빠지기에는

10분도 길~다.

 

다양한 매력을 뽐내는 고양이 사진들과

톡톡 튀는 발상의 멘트들이 어우러진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면

우울했던 마음이

싹 씻겨 나간다.

 

 

누구나 가슴에 고양이 한 마리쯤 있는 거잖아요~

 

네~ 맞아요.

 

내 마음 속에 고양이 한 마리, 아니 열 여섯 마리가

쏘옥~ 들어왔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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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18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가 꾹꾹이 해줄 때가 귀엽고 매력 터져요! ㅎㅎㅎ

남희돌이 2015-06-24 11:04   좋아요 0 | URL
동감!
 
소녀를 사랑하는 방법
헤일리 태너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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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심으로 꺼내는 "거짓말"이라는 마술 [소녀를 사랑하는 방법]

 

우리는 사랑 이야기를 애타게 그리워한다.

수많은 고전 중에서 "사랑"을 테마로 한 이야기들은 오랜 시간을 견디고 변주되면서 살아남아 지금까지 우리 곁에서 '영원한 사랑'을 들려준다.

사랑이란 테마는 손에 잡힐 수 없는 무지개의 형태였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인지,

 

소설가 한창훈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산맥을 넘고 지옥을 다녀온들, 어떤 지랄을 해도 성공한 사랑은 월급봉투와 싸움과 아이들 울음소리의 일상으로 바뀌기 마련이며, 그래서 다들 혼자였을 때가 그리워 땅을 친다고.

 

물론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일구어가며 남다른 자태를 뽐내는 "사랑" 이야기도 있지만 말랑말랑한 구름같은 안온함과 폭신함을 선사하는  천상의 사랑은 우리의 현실로 내려오면서  곧장 구질구질한 사랑으로 변질된다.

그렇기에 현실에서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랑 이야기에 더욱 열광하게 되는 건 아닌지.

나 또한 젊은 시절, 연애의 가벼움에 대해 나름 소신을 펼칠 수 있을 만큼 살짝 발을 담궈 본 사람.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남편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글쎄~ 하고 한참을 뜸들이게 되는  지극히 평범한 아줌마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만...

 

계산적이지 않은 풋풋한 첫사랑의 설레임을 같이 느끼고픈 여린 마음이 조금은 남아 있다.

그 여린 마음 틈으로 [소녀를 사랑하는 방법]속 두 주인공, 바츨레프와 레나가 살풋 걸어 들어 왔다.

어떤 시련도 겪지 않고 순수함 그 자체를 지닌 채 이 사랑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바츨레프와 레나가 함께한 시간은 아름다웠다.

 고대의 비밀이 살아 숨쉬고 신비로운 옛 지식이 전해 내려오는 환상의 땅 러시아에서 기회의 땅, 마법의 땅인 미국으로 이민을 온 바츨레프는 뉴욕 브루클린 코니아일랜드에서 마법사의 꿈을 꾸며 살고 있었다.

옆에는 멋진 황금빛 술을 늘어뜨린 의상을 입은 조수 레나가 바츨레프의 환상적인 마술에 함께 할 것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레나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바츨레프의 집에 있을 때는 냉장고에서 음식을 훔쳐 먹기도 하고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같다. 영어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해 주눅든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운 수학문제엔 맥을 못 추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츨레프의 엄마는 둘이 함께 숙제하러 들어가 있는 방 안에 불시에 들이닥쳐 "너희 둘이 뭐했어, 엄마 없을 때?"라며 감시의 눈길을 번득인다.

 

바츨라프의 엄마가 자기 전에 들려주는 이야기속 공주님과 소년은 사랑에 빠진 모든 사람이 하는 일을 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어떤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지, 가랑비가 좋은지 소나기가 좋은지에 대해.>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소년과 소녀도 그랬다. 학교 숙제를 함께 하고 맛있는 것을 나누어 먹고 심지어 비밀리에 마술쇼를 계획하기도 했다. 부푼 가슴으로 꿈의 무대 코니아일랜드에서 마술쇼를 기대하던 소년은 마술쇼 전날 소녀가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덜컥 불안해진다. 마술쇼 날은 레나가 나타나지 않은 채 지나갔고, 바츨라프의 엄마가 레나의 이모를 경찰에 신고하는 나쁜 일이 벌어졌다. 그 이후 레나는 바츨라프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하나뿐인 친구를 엄마가 빼앗아갔다는 분노 속에서도 바츨라프는 매력적인 남자로 컸고, 여전히 레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 새엄마를 만나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가던 레나는 학생회 임원으로 선출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지만 내면은 여전히 연약했고 과거에 대한 기억도 희미했다.

열일곱 되던 날, 레나는 바츨레프에게 전화를 걸었고 만나야 할 운명인 두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된다.

이제는 해피엔딩만 남은 것 아닌가?

꼭 그렇게 되기를...남은 페이지 가득 다시 만난 어린 커플들이 나누는 순수한 사랑으로 행복함만이 가득하기를 빌었지만

현실 속 고통이 싹 사라지게 만드는 환상적인 마술은 그저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듯이

그들의 행복한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레나가 사라졌을 때 이미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다며 엄마에게 소리지르던 바츨레프에게 이제야 진실이 전해진다. 예전에 소년의 엄마는 어린 아들에게 진실을 감당할 힘이 없을까봐 에둘러 말했던 것 뿐인데...

 

이미 내면에 충실하게 내리뻗은 뿌리를 간직한 강직한 남자로 성장한 바츨라프는 무엇보다도 제대로 사랑을 할 줄 아는 남자 중의 남자였다. 

간절하게 기다리던 첫사랑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느꼈던 고통보다도 상대의 처지를 먼저 배려할 줄 아는 진정한 남자.

용기를 내어 레나를 찾아간 바츨라프는 레나와 레나의 새엄마 앞에서 일생일대의 찬란한 마술을 펼친다.

현란한 손동작과 눈속임 대신 진심으로 꺼내는 "거짓말"이라는 마술을.

 

바츨라프는 자신이 진실을 말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레나는 그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사랑했고 믿었다.

동화처럼, 노래처럼, 마술처럼.

-368

 

마지막 구절은 "그 둘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와 비슷한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 마지막 한 구절을 완성하기까지 둘 사이에 벌어진 일은 어떤 동화나 사랑의 위대한 고전보다도 가슴 아프다.

사랑 이야기는 딱 여기에서 끝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 후의 둘의 이야기가 또 구질구질하게 이어진다면 더이상 사랑의 환상에 기대 오늘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 같 기에.

잠시 가슴 먹먹해지는 레나의 아픔은 묻어두고 둘 사이에 흐르는 애틋하고 충만한 사랑의 감정을 거미줄 에 얹힌 아침이슬 바라보는 심정으로 한없이 바라보고 싶다.

아침해가 뜨면 사라질 물방울이라도 거미줄 위에 맺혀 영롱하고도 투명하게 세상을 비춰내는 순간을 눈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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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옛상인의 지혜 인간사랑 중국사 5
리샤오 지음, 이기흥 옮김 / 인간사랑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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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업 문화의 근원을 살피다  [商賈智慧-중국 옛 상인의 지혜]

 

 

 

200년 전 쯤, '청나라'는 세계 최대의 경제 규모를 갖춘 나라였을 것이라고 일부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2015년 현재 시점에서 중국 경제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으로 성장했다. 중국은 이제 거의 200년 만에 세계 1위 경제국의 지위를 되찾아 온느 중이다. 제조업에서는 이미 미국과 일본을 앞서는 세계 최대의 강국이고 세계 최대의 인터넷과 모바일 사용자 기반을 보유한 국가다. 소비 시장의 규모도 크다. 그러나 양적 성장의 빛나는 모습 뒤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도 보인다. 저질 식용유, 멜라민이 함유된 우유,공업용 색소가 든 오리알 등 식품 안전 사고가 연일 뉴스에 보도되면 보는 이들은 "중국은 어쩔 수 없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된다.

규모로 세계를 제패하던 중국이 질적인 측면에서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를 어떤 이는 일종의 성장통으로 이해한다. 이 책이 저자 또한 오늘날 중국이 식품 안전 문제를 포함하여 시장의 수많은 난맥상을 보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시장의 경쟁 체제가 아직은 건전하지 못하고 법률 제도도 완전하지 못하며 소비자도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데다 경영자의 천박한 도덕적 수준 등의 요인 때문이라고.

저자는 상도덕을 높이며 신용과 자율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자기에게 배우기,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기, 옛사람에게서 배우기를 들며, 그 중 세 번째인 옛 사람에게서 배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국은 수많은 전적 즉, 고전 속에서 지혜를 끄집어내곤 하는데, 저자는 그 중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뽑아 상도를 논한다.

 

사마천의 [사기] 맨 앞에 나오는 <백이열전>이 순결하고 고고한 정신을 옹호하는 것인 반면, <화식열전>은 물질주의를 긍정한다. '먹고 사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신과 물질 둘 다의 균형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바라는 바이며, 인간은 누구나 물질에 지배된다."

저자는 바로 이 <화식열전>에 나온 인물들에 대해 고찰하면서 짤막하게 남긴 사마천의 글에 고사를 보태고 살을 덧붙여 오늘날 부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진정한 상도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길로 안내한다.

 

 

 

 

 

금문에서 상 자는 어떤 사람이 '붕'을 가득 메고 뱃머리에 서 있고 그 곁에는 또 한 사람이 배를 젓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돈을 가지고 온 세상을 골골샅샅 돌아다니며 오가는 것이 바로 장사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겠는가?-100

 

'붕'朋과   '우'友는

원래 돈으로써 물건을 사고판다는 원시적인 뜻에서 출발하여 뒷날 좋은 동반자라는 새로운 뜻으로 파생되었다.- 103

 

진시황의 접견을 받으며 표창까지 받은 과부 청 몇 대나 이어온 가업이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기업을 날로 번영시켰다.

전국 시대의 대상인 백규는 '다른 사람이 버리면 나는 거두어들이고 다른 사람이 취하면 나는 준다'는 비결로 역발상의 대가인 워렌 버핏보다 앞선 경영 비결을 이야기했다.

한나라 무제 때의 복식은 애국심, 인의의 마음을 가졌으며 존경할 만한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 자신의 재물의 절반을 헌납함으로써 모범을 보였다.

또한 돈벌이에 가장 뛰어난 황제인 한무제의 지지를 얻은 이재의 고수 상홍양은 관아에서 상공업을 기획하고 관리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는 또한 중국 역사에서 다른 방면으로 유명했던 인물들의 '상도'에 대한 비범한 재능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놀라움을 안겨 준다.

주나라 건국에 뛰어난 기여를 했던 강태공의 '낚시' 이야기는 자기의 총명과 재지를 팔아넘기려는 인물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광고를 날린 뒤에 자기를 사줄 사람을 기다린다는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우정의 대명사격으로 자주 거론되곤 하는 '관중과 포숙아'의 다정한 교제가 '관포지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의 상인이 서로 이해하고 서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월왕 구천이 승리하며 치욕을 씻는 데 도움을 준 범려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자기의 성과 이름을 '치이자피'로 바꾸었다. 백지상태로 바닷가에서 농사를 지으며 고통과 어려움을 겪은 범려는 <계연지책>이라는 이론적 지식을 바탕으로 운용하여  결국 부자가 되었다. 가물 때는 배를 준비하고 큰물이 날 때는 수레를 준비한다, 값이 오를 때는 똥 버리듯이 내다 팔고, 값이 내릴 때는 금은주옥 취하듯이 사들여라,상품의 질은 완전하게 보존하고, 돈은 수중에 잡고 있지 말고, 가격이 오른 상품을 보물 취급하듯 쥐고 있지 말라.는 것이 계연지책의 주요 내용이다.

범려가 아들을 교육시킨 이야기에는 나아감과 물러섬, 그리고 적당한 정도에서 멈출 줄 아는 지혜가 담겨 있어 '삼대를 넘어가는 부'를 실현한 비결이라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고금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로 여겨지는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이야기가 여기에서는 상업과 결부된다.

상업으로 큰 성과를 이룬 집안의 후계자 탁왕손이 상업 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뛰어난 상업적 수단을 가진 이(사마상여)에게 철저하게 당하는 로맨틱 코미디로 각색된다.

 

사마천이 <화식열전>을 쓴 목적은 이들의 일을 후세에 전하여 뒷사람들이 거울로 삼으며 깨우침을 얻도록 하는 데 있다고 했다.

갑골문 중 커다란 조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작은 사람의 모습에서 부를 중시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으나, 우리가 물질 앞에 작아지는 모습이 그리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사마천이 부를 추구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 했듯이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는 소망일 것이나, 고전을 통해서 성공과 부에 대한 지혜를 배웠으면 좋겠다.

저자가 재미있게 풀어내는 <화식열전> 속 인물들에 푹 빠져 있었다.

중국 상업 문화의 근원을 살피며 많은 이들에게 올바른 상도를 전해준 저자가 바라는 대로, 중국이 양적 성장 뿐만 아니라 질적 성장까지 이루었으면 좋겠다.

그 바람은 우리 나라의 현실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전 속 깊은 지혜를 읽고 깊이 체득하여 뼈와 살이 되고, 땡그랑 땡그랑 돈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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