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으로 꺼내는 "거짓말"이라는 마술 [소녀를 사랑하는 방법]
우리는 사랑 이야기를 애타게 그리워한다.
수많은 고전 중에서 "사랑"을 테마로 한 이야기들은 오랜 시간을 견디고 변주되면서 살아남아 지금까지 우리 곁에서 '영원한 사랑'을
들려준다.
사랑이란 테마는 손에 잡힐 수 없는 무지개의 형태였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인지,
소설가 한창훈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산맥을 넘고 지옥을 다녀온들, 어떤 지랄을 해도 성공한 사랑은 월급봉투와 싸움과 아이들 울음소리의 일상으로 바뀌기 마련이며, 그래서 다들
혼자였을 때가 그리워 땅을 친다고.
물론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일구어가며 남다른 자태를 뽐내는 "사랑" 이야기도 있지만 말랑말랑한 구름같은 안온함과 폭신함을
선사하는 천상의 사랑은 우리의 현실로 내려오면서 곧장 구질구질한 사랑으로 변질된다.
그렇기에 현실에서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랑 이야기에 더욱 열광하게 되는 건 아닌지.
나 또한 젊은 시절, 연애의 가벼움에 대해 나름 소신을 펼칠 수 있을 만큼 살짝 발을 담궈 본 사람.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남편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글쎄~ 하고 한참을 뜸들이게 되는 지극히 평범한 아줌마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만...
계산적이지 않은 풋풋한 첫사랑의 설레임을 같이 느끼고픈 여린 마음이 조금은 남아 있다.
그 여린 마음 틈으로 [소녀를 사랑하는 방법]속 두 주인공, 바츨레프와 레나가 살풋 걸어 들어 왔다.
어떤 시련도 겪지 않고 순수함 그 자체를 지닌 채 이 사랑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바츨레프와 레나가 함께한 시간은 아름다웠다.
고대의 비밀이 살아 숨쉬고 신비로운 옛 지식이 전해 내려오는 환상의 땅 러시아에서 기회의 땅, 마법의 땅인 미국으로 이민을 온 바츨레프는
뉴욕 브루클린 코니아일랜드에서 마법사의 꿈을 꾸며 살고 있었다.
옆에는 멋진 황금빛 술을 늘어뜨린 의상을 입은 조수 레나가 바츨레프의 환상적인 마술에 함께 할 것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레나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바츨레프의 집에 있을 때는 냉장고에서 음식을 훔쳐 먹기도 하고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같다. 영어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해 주눅든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운 수학문제엔 맥을 못 추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츨레프의 엄마는 둘이 함께 숙제하러 들어가 있는 방 안에 불시에 들이닥쳐 "너희 둘이 뭐했어, 엄마 없을 때?"라며 감시의 눈길을 번득인다.
바츨라프의 엄마가 자기 전에 들려주는 이야기속 공주님과 소년은 사랑에 빠진 모든 사람이 하는 일을 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어떤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지, 가랑비가 좋은지 소나기가 좋은지에
대해.>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소년과 소녀도 그랬다. 학교 숙제를 함께 하고 맛있는 것을 나누어 먹고 심지어
비밀리에 마술쇼를 계획하기도 했다. 부푼 가슴으로 꿈의 무대 코니아일랜드에서 마술쇼를 기대하던 소년은 마술쇼 전날 소녀가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덜컥 불안해진다. 마술쇼 날은 레나가 나타나지 않은 채 지나갔고, 바츨라프의 엄마가 레나의 이모를 경찰에 신고하는 나쁜 일이 벌어졌다. 그 이후
레나는 바츨라프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하나뿐인 친구를 엄마가 빼앗아갔다는 분노 속에서도 바츨라프는 매력적인 남자로 컸고, 여전히 레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 새엄마를 만나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가던 레나는 학생회 임원으로 선출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지만 내면은 여전히 연약했고 과거에 대한
기억도 희미했다.
열일곱 되던 날, 레나는 바츨레프에게 전화를 걸었고 만나야 할 운명인 두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된다.
이제는 해피엔딩만 남은 것 아닌가?
꼭 그렇게 되기를...남은 페이지 가득 다시 만난 어린 커플들이 나누는 순수한 사랑으로 행복함만이 가득하기를 빌었지만
현실 속 고통이 싹 사라지게 만드는 환상적인 마술은 그저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듯이
그들의 행복한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레나가 사라졌을 때 이미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다며 엄마에게 소리지르던 바츨레프에게 이제야 진실이 전해진다. 예전에 소년의 엄마는 어린
아들에게 진실을 감당할 힘이 없을까봐 에둘러 말했던 것 뿐인데...
이미 내면에 충실하게 내리뻗은 뿌리를 간직한 강직한 남자로 성장한 바츨라프는 무엇보다도 제대로 사랑을 할 줄 아는 남자 중의
남자였다.
간절하게 기다리던 첫사랑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느꼈던 고통보다도 상대의 처지를 먼저 배려할 줄 아는 진정한 남자.
용기를 내어 레나를 찾아간 바츨라프는 레나와 레나의 새엄마 앞에서 일생일대의 찬란한 마술을 펼친다.
현란한 손동작과 눈속임 대신 진심으로 꺼내는 "거짓말"이라는 마술을.
바츨라프는 자신이 진실을 말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레나는 그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사랑했고 믿었다.
동화처럼, 노래처럼, 마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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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구절은 "그 둘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와 비슷한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 마지막 한 구절을 완성하기까지 둘 사이에
벌어진 일은 어떤 동화나 사랑의 위대한 고전보다도 가슴 아프다.
사랑 이야기는 딱 여기에서 끝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 후의 둘의 이야기가 또 구질구질하게 이어진다면 더이상 사랑의 환상에 기대 오늘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 같 기에.
잠시 가슴 먹먹해지는 레나의 아픔은 묻어두고 둘 사이에 흐르는 애틋하고 충만한 사랑의 감정을 거미줄 에 얹힌 아침이슬 바라보는 심정으로
한없이 바라보고 싶다.
아침해가 뜨면 사라질 물방울이라도 거미줄 위에 맺혀 영롱하고도 투명하게 세상을 비춰내는 순간을 눈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