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편견]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다정한 편견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곳을 펼쳐도 생각이 마구 달려간다 [다정한 편견]

 

 

[손홍규의 로그인]이라는 경향신문 칼럼이 묶여 책으로 나왔다.

일주일에 한 편씩 꼬박꼬박 써나왔던 정성도 대단하거니와 그 다양한 생각들의 물꼬를 어디서 틔웠을까, 상상하니 더 이상 헤아릴 엄두조차 안나왔다.

아무리 원고지 4,5매 내외라는 분량이라지만 꾸준히 꼬박꼬박 써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제목을 쭉 훑어내려와 본다.

 

우산, 길고양이, 사내들의 대화, 싸목싸목, 여름 밥상, 곶감, 존재를 엿듣다, 마음의 창, 명절의 쓰임새, 남의 일, 영혼으로 난 길, 다음 생, 밥 먹는 이유, 지상의 방 한 칸, 아름다운 막말, 장마, 팔을 번쩍 드시오, 장기려 선생, 비정규직 소설가, 사람 소리, 작가의 말, 모국어, 문학과 질문, 왜 사냐건, 포퓰리즘, 은어의 귀환, 소문들, 만석보와 사대강, 행복 레시피, 모순어법들...

 

 

초등학생의 일기 제목 같은 단순한 것에서부터 조금 진지하려나...생각되는 단상들, 그리고 민감한 정치적 현안을 건드리려는 것 같은 꽤 세 보이는 제목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의 칼럼을 모은 것이니 5년 동안의 글들이 모인 셈이다.

목차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나도 지금부터 한 5년 부지런히 짧은 단상들을 모아 볼까...하는 것이었다.

누가 보상해주는 것도 아니고 알아봐주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일주일에 한 편씩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4,5매 내외의 규칙을 적용시키면 글쓰기에 발전이 있지 않을까, 하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에헴~ 그럼,

내용을 한 번 볼까.

짤막한 글이니 쉽게 읽어내려가겠다, 마음 먹고 잡았는데,

웬걸.

<어머니의 잠든 얼굴>을 지나 고작 두 번째 글 <라면엔 계란>을 읽었을 뿐이었는데,

라면 속에 들어가서 탁 깨어져야 할 계란이

고이 삶겨진 다음 물도 없이 맨목에 삼켜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만 가슴에 꽉~ 막혀버렸다.

 

어머니라는 단어에 이어, 아버지라는 단어가 생각지도 못하게

암흑의 우주를 날아다니다 지구에 툭 와서 부딪치는 소행성처럼

가만 있는 나를 세게 치받고 가버렸다.

 

이놈아, 라면엔 계란을 넣어야지! 라면만 먹으면 죽어!

-14

 

뜬금없이 작가의 아버지라는 분이 저렇게 빽 소리를 질렀다지.

 

그 뒤로 의뭉스럽게 이어지는 작가의 부연설명이

이 시대 우리네 아버지들의 심사를 대변하는 것만 같아 그만 가슴이 메이고 만 것이다.

 

물론 내가 라면에 계란을 넣지 않아 아버지가 그토록 분개했다고 믿지는 않는다. 사는 꼴이 탐탁지 앟은 내게 무언가 훈계를 하고 싶어도 머리가 굵은 아드리 들어줄 리 만무일 테고 분통을 터뜨리고는 싶은데 마땅한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마침내 아버지는 기회를 잡았고 라면에 계란도 넣지 않은 걸로 짐작건대 네 사는 꼴이 얼마나 한심하고 망측할지 눈앞에 훤하다는 힐난을 했던 거다.-15

 

부모님의 마음이란, 자식이 어리든 장성했든 가리지 않고 언제나 물가에 어린 자식 내놓은 것 마냥 안절부절이겠지.

 

라면에 계란이라는 단순한 조합 속에 이런 감동이 스며 있을 줄 어찌 짐작이나 했겠나.

손홍류는 그렇게 짧은 글 속에 나름의 농도와 오미를 가미하여 멋들어진 한 상을 차려 주었다.

 

나의 여행과 작가의 여행에서 얻는 체험이 다를 것이고

나의 장마와 작가가 겪었던 장마가 다를 것이다.

(실제로, 나는 지난 주 내내 겪었던 장마가 주는 습기와 끈끈함 덕분에 태풍이 저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중임에도 오늘 갑자기 날이 쨍~ 하자 이불빨래부터 해야지, 하고 허둥거리는 주부다. 작가는 윤흥길의 [장마]를 읽은 소감을 기가 막히게 풀어내 놓았다.)

 

[다정한 편견]은 물론 작가의 편견이 100%

스며 있는 사적인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어느 곳을 펼쳐도 작가의 짧은 글 위로 내 생각이 빠르게 덧입혀지고

어떤 부분은 공감을, 어떤 부분은 눈썹 위로 당겨지며 찌푸리게 되는 반발을 경험하게 된다.

다시 말해 모든 글감을 다시 내 식으로 덧입혀 생각하게 되고, 상상하게 된다는 뜻이다.

큰 제목 하나로 내용을 끌어 안는 소설에서는 흠뻑 빠져들어서 다 끝나고 난 뒤에 다시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면,

작은 제목 100개 넘는 단상들의 모음인 이 책에서는 한 꼭지를 읽고 나면 다시 튕겨져 나오게 되는 재미있는 경험을 한 셈이다.

노래에 맞춰 탱탱한 고무줄 위로 발을 얹어 가며 살짝, 넣었다 뺐다 했던 학창시절의 고무줄 놀이가 떠오른다.

흥겹게 뛰어노는 사이에 땀은 비오듯 흐르고 집에 가서 보면 놀 때는 못 느꼈던 생채기가 여러 줄 발목이며 종아리에 나 있다.

그 흔적을 보며 괴롭다, 다시는 안하고 싶다, 할 아이는 없을 것이다.

또 다시 내일이면 뛰어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고무줄 놀이에 열을 올린다.

손홍규의 [다정한 편견]도 고무줄 놀이와 같아서 작가의 편견 투성이 글을 읽고서 가끔은 내 생각을 얹기도 하고 튕겨져 나가기도 하면서 다시금 달려들게 된다.

흥겹고 재미있고 신 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혼의 동반자, 이오덕, 권정생[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몽실아, 몽실아, 뭐하니~~

목이 드러나게 단발머리를 하고 아기를 등에 둘러맨, 그래서 왠지 등이 더욱 시려워보이는 착한 아이 <몽실이>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존재로 환하게 피어날 밝은 노랑꽃, 민들레를 위해 아낌없이 저를 희생한 <강아지똥>

 

권정생은 가난 속에서 살다 갔지만, 그의 맑은 영혼이 진하게 피워낸 작품들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우리 곁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 있다.

 

이 세상 어떤 어른보다도, 또 그 어떤 아이들보다도 천진난만한 세계 속에서 살면서 영롱한 글들을 길어올렸던 권정생.

많은 것에 욕심을 내며 살아가는 나에게, 비움의 미학을 실제 삶으로 보여주고 떠난 그와 이오덕 선생과의 정감 어린 편지글들은  그 어떤 말보다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힘겨운 가운데 한 자 한 자 손편지로 정성스레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기도 하고, 문학론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도 하고, 한국의 아동문학을 걱정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위로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권정생은 누가 쓴 글이라도 잠시만 일별하고도 글 속에 삿된 것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알아보았다고 한다.

엄마가 아이의 눈을 보면 거짓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귀신같이 알아내는 것처럼^^

엄마가 아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이 가능했듯이, 맑은 마음을 오로지 글에만 투사한 권정생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강아지똥>같은 글은 결코 아동의 눈으로 보는 척해서는 나올 수 있는 글이 아니었던 것이다.

읽는 이에게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힘이 있는 글이 진짜 글이다. 가짜 글에는 진짜 글이 낼 수 있는 향기가 없다.

 

아무리 어렵고 고달픈 시절을 보냈더라도 이렇게까지 “비움”의 미학을 완벽하게 실천하고 간 이가 있었을까. 아니, 오히려 간난신고의 세월을 보낸 이이기에 더욱 세상에 대해 원망하고 미워하며 더욱 자신을 위해서 이 악물고 ‘보란 듯이 성공하리라...’ 부르짖는 사람들이 얼마나 넘치고 넘쳐나는 세상인데...

날마다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차갑고 이 시린 우물물처럼 “맑음, 순수” 그 이외의 것은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은 권정생이 생전에 친하게 지냈던 몇 안 되는 친구였다는 이오덕, 이현주 등등은 정말로 천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광경의 배후엔 후광이 드리웠을지도...

 

 

도무지 현대인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

동심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초등학생 고학년만 되어도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삶.

가장 낮은 곳에 살며 교회 종지기로 인생을 살다 갔지만, 권정생은 밤하늘에 걸려 있는 강아지똥별이 되었다.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갔지만, 이땅에 살고 있는 나는 평생을 우러르며 그의 마음 한자락을 닮아가고 싶다.

 


 

솔직히 저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더욱이 거짓말 잘하는 어른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께 살다 죽겠습니다. (...)

 

이오덕 선생님.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떳떳함만 지녔다면, 병신이라도 좋겠습니다. 양복을 입지 못해도, 장가를 가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세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13 (권정생)

 

 


 

 

 

생활에서 도피한다는 것, 저는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활이 없이 어떻게 글을 씁니까? 제 동화가 무척 어둡다고들 직접 말해 오는 분이 있습니다만, 저는 결코, 제가 겪어 보지 못한 꿈 같은 얘기는 쓸 수가 없습니다. 쓰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습니다.

팔 병신은 팔 병신다웁게 몸을 움직이고, 다리 병신은 다리병신다웁게 절뚝거리는 것이 정상이라 봅니다. 잘못된 교육은 인간의 결함을 숨기려는 데서 비인간화시켜 버린다고 봅니다.-159 (권정생)

 

 


 

 

거기 일직 교회는 햇볕이 앉을 곳도 없었던 것 같은데 얼마나 추울까요. 약을 계속해서 잡수셔야 할 터인데 걱정입니다. 어디 돈을 빌려서라도 약을 잡수시면 제가 가서 갚겠습니다. 그렇게 쇠약하신데도 책을 읽고 싶어하시니, 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반성됩니다. -(이현주 )

 

 


 

 

 

모든 것을 훌훌 벗어버리고 단출한 차림으로 어깨를 마주대고 한적한 오솔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만 같다.

영혼의 동반자, 권정생, 이오덕.

그들이 나눈 아름다운 편지에 집중하자, 한여름의 땡볕도 잠시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하는 듯이 옆으로 비켜선다.

밖은 쨍하고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 구름도 그림처럼 움직임 없이 멈춰서 있는데, 가슴 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휘~ 지나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키아벨리를 위한 변명, 군주론 나의 고전 읽기 23
조한욱 지음, 니콜로 마키아벨리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키아벨리를 위한 변명 [군주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얼핏 보기에도 무척 어려운 책처럼 보인다.

고전에 속하는 저작이기도 하지만 일반 고전문학처럼 쉽게 손에 들고 읽으려려면 막상 용기가 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즘 이란 용어를 탄생시킬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책인데  그 마키아벨리즘이란 표현 자체에 묘한 거부감을 갖게 되는 건 왜일까?

그것은 [군주론]이 목적을 위해서는 권모술수나 배신, 살인 같은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극단적인 현실주의 정치 이론의 대명사로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공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은 대개 창작되었을 당시 대다수 사람들에게 환영받았을 것이라는 전제를 기초로 한다.

또한 우리는 고전을 읽으면서 보편이 가치를 찾아내 교훈을 얻어내야 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군주론]은 그 두 가지 전제에서 어긋나 있어도 한참 어긋나 있으며,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서 비난을 받음과 동시에 마키아벨리라는 사람 자체도 사악한 모습으로 정형화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고, 역사, 정치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이에 작가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마키아벨리에 대한 변명에 착수한다.

 

 

 

피렌체와 이탈리아를 사랑했고 그를 위해 헌신했던 한 인간의 진정을 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며 르네상스의 시대적 배경과 마키아벨리의 상황을 연계시켜 이야기한다.

 

국가의 유형을 분류하는 것으로 [군주론]을 시작한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에 대한 믿음을 [군주론]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인 것이며, 국민의 독립에 대한 열의가 강한 공화국을 지배하는 방법으로는 멸망시키는 것이 최선이라 말한 것일 뿐이다.

 

그 외에도 인간의 힘과 운명의 힘, 훌륭한 군대의 중요성, 인간성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고찰, 현실적인 조언들, 이탈리아 통일의 염원 등의 단원을 통해

마키아벨리가 악인으로 남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변명해 나간다.

 

시대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독서의 방법이 달라지는 것일까.

[마키아벨리를 위한 변명 군주론]은 [군주론]을 다른 눈으로 다시 보게 하는 책이므로

독서의 길잡이로 삼아 한 번 읽어볼 만 하다.

[군주론]을 막연하게 어렵게 느꼈던 사람이라면

색다른 재미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 - 조선의 왕실 복식
이민주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왕실, 로열 패밀리의 의복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진, 선, 미에 대한 탐구의 마음이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은 당연지사.

그 중에서도 "미"에 대한 추구는 가장 강렬하면서도 파괴적인 동기를 지닌다.

 

이 책을 받아들고 아름다운 표지와 묵직한 책의 무게에 감동받았다.

한쪽 귀퉁이라도 이지러질까봐 살짝 책장을 떠받들듯 넘겨 구성과 내용의 대략을 살폈다.

영화 [상의원]의 영향 탓인지, 좀 더 대중적인 내용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조선 왕실복식에 대한 논문 수준의 정교한 구성이 일단 눈에 띄었다.

역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함부로 지은 책이 아님을 한순간에 간파할 수 있었다.

 

 

병풍같이 죽죽 둘러쳐진 목차는 총 4부로 나뉘어져 있다.

조선 왕실 복식 연구에 매진한 학자의 피땀어린 정성이 한 땀 한 땀 실려 있는 듯 하여

그 목록 앞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1부. 로열 패밀리를 위한 옷

2부. 용을 그린 왕의 복식

3부. 봉황을 수놓은 왕비의 복식

4부. 왕실복식을 책임진 기구

 

일반인들도 충분히 일독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짜임새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벼이 보아 넘길 만한 것이 아니다.

 

저자는 왕실복식을 직접 입고, 만들고, 공급하는 기관과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 왕실복식이 완성되는 과정을 입체적,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고 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기에 앞서

영화 [상의원]을 먼저 본 것이 도움이 되었으려나.

감히 왕실 복식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저자의 노고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허구로 지어올려진 영화 [상의원] 속 어침장과 기생의 옷을 짓던 이공진이

옷에 대해 보인 놀라운 열정과 집중력이 돋보이면서

실제 "상의원"이라는 곳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어침장이라는 역할에 뿌듯함을 느끼던 조돌석은

세간의 인기를 한몸에 얻고 있는 천재 사내 이공진에게 묘한 질투를 느낀다.

하루만에 면복을 지어내고 왕의 칭찬도 한몸에 얻었으니 오랜 세월

왕의 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켜왔던 어침장으로서는 그럴 만도 하다.

그리하여 가시돋힌 한 마디를 먼저 날리는데..

 

"면복이 무엇인지는 아는가?"

 

답을 못할 줄 알았던 이공진의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면복이라 하면, 규,면, 의, 상, 대대, 중단, 패, 수, 방심곡령, 폐슬, 말, 석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이런 식으로 뜻하지 않게 줄줄 면복에 대한 지식이 이어진 것이다.

 

영화에서 그 장면을 보면서,

아~

이 하나의 대사를 위해

시나리오 작가는 아마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를 읽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상의원이란 특수한 곳을 영화 제목으로 내세우려면 그에 대한 사전조사가 얼마나 치밀해야 하겠는가.

일반인이 관심조차 가지지 않던 곳인데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킴과 동시에 공감대도 형성하려면

영화 속 세세한 장면들에 대한 고증이 얼마나 철저해야 하겠는가.

 

저자와 같은 연구자, 저술가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영화관에서 혹은 안방에서

영화, 드라마를 통해

그 때 그 시절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영화에서 그저 화려한 눈요깃 거리 정도로 여겨지는 복식이라도

겉모습만 대충 꾸며서는 절대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왕과 왕비는 이런 순서로 옷을 입었다고 한다.

 

많은 옷과 부속물을 착용하려면 반드시 일정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 면복을 입을 때 특히 의와 상을 입을 때 의가 상을 덮어서는 안 된다. -82

 

면복의 착장 순서-

발에서부터 어떤 순서로 착용했는지 확인해보자. 먼저 적석과 적말이 보인다. 그 위로 청색의 중단과 훈상이 차례로 보이며 그 위로 다시 현의가 있고 그 위를 훈색의 폐슬이 덮고 있다. 그러므로 현의 밑으로 훈상이 보이고 있어 상에 현의를 입고 하에 훈상을 입은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84

 

왕실복식에 대한 이야기라면,

왕과 왕비 등 이른바 로열패밀리를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저자는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왕실복식을 누가, 어떤 기관이 담당했을까?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복식을 입는 사람, 만드는 사람, 공급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조선의 왕실복식을 밝혀 낸 책이

바로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 이다.

 

'조선의 왕실복식'을 논하되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라는 좀 더 부드럽고 현대적인 이미지에 걸맞는 제목을 차용한 것이 의도한 바는

아마, 많은 대중들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서일 것이다.

 

이 책 한 권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수많은 참고문헌과 많은 이들의 연구저작들이 참고가 되었겠지만

이 책은 그것들의 집대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상의원]의 히트와 더불어

대중적으로도 많이 어필해서  일반인에게까지 알려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틸라 왕의 말을 훔친 아이
이반 레필라 지음, 정창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아틸라 왕의 말을 훔친 아이]

 

얇고 가벼운 책이라

쉽게 집어들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무게감이 느껴진다.

 

어린 두 소년이

우물에 빠졌다.

숲 한복판에 있는 우물은 깊이가 7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아이들의 힘만으로 빠져 나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꼭대기가 잘려나간 피라미드 형태의 우물 속에서 어린 형제는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며 빠져나가려 한다.

먹을 것을 제대로 못 먹어 움직일 기력조차 없어지기 전에 형은 동생을 빙빙 돌린 후 가속도를 이용해 던져 올려 보지만 실패.

온 세상의 고통을 압축시켜놓은 듯한 진짜 고통을 느끼며 그들은 우물 속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끈질긴 목숨은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이어지는 것일까,

남아 있는 육체적 기력 때문에 살고자 하는 욕망이 되살아나는 것일까.

어느 것이 먼저고 뒤고라 할 것도 없이

나중에는 한데 뭉뚱그려져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만이 오직 매일매일을 버틸 힘이 되어 준다.

 

우물 속에 떨어진 동생이 형에게 사람들이 왜 지저분한 곳에 사냐고 묻자 형은 위쪽엔 넓은 공간이 있고 사람도 적다고 대답한다.

 

"근데 왜?"

"저 위에는 권력이 있거든."

"권력? 그게 뭔데?"

"날아다니는 개가 자기 뿔을 핥고 있어. 간지러운가 봐."-24

 

이쯤 되면 작가가 말하는 것이 단지 잔혹 동화만은 아닐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누가 이들을 우물 속에 버렸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즈음에는 구더기를 먹고 그 즙을 어느새 즐기며 기아 상태에서 체험하는 망상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거의 동화되다시피 하게 될 것이다.

가장 믿는 사람으로부터 버려진 형제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말들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회고발, 혹은 사회비판의 우회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한계상황이 닥쳐오면서도 형은 죽어가는 동생을 살려서 내보내기 위해 꾸준히 몸을 단련한다.  자신들을 버린 이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비극적인 상황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쓴 시점이 마드리드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이 정부와 은행의 전횡과 무능에 반발하여 자발적 시민운동을 벌이던 때라고 회상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변혁할 필요가 있는데, 그럼으로써 다음 과정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면서 이 책을 변혁의 진전을 위한 상징적인 작품이라 말했다.

 

아틸라 왕은 전설적인 훈족의 왕으로서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이 아틸라 왕의 말을 훔친 아이는 동생이며, 작가는 동생에게 새로운 인간형, 즉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아틸라의 무시무시한 권능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아틸라 왕의 말을 훔친 아이]는 잔혹한 우화로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격의 글로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며, 누리기만 하면서 현실에 안주해 있는 이들에게 비판적 상상력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비뚤어질테다, 분노할 테다.

소년들의 참혹한 상황을 보면 이런 느낌은 한층 더 강렬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