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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 왕의 말을 훔친 아이
이반 레필라 지음, 정창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아틸라 왕의 말을 훔친 아이]
얇고 가벼운 책이라
쉽게 집어들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무게감이 느껴진다.
어린 두 소년이
우물에 빠졌다.
숲 한복판에 있는 우물은 깊이가 7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아이들의 힘만으로 빠져 나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꼭대기가 잘려나간 피라미드 형태의 우물 속에서 어린 형제는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며 빠져나가려 한다.
먹을 것을 제대로 못 먹어 움직일 기력조차 없어지기 전에 형은 동생을 빙빙 돌린 후 가속도를 이용해 던져 올려 보지만 실패.
온 세상의 고통을 압축시켜놓은 듯한 진짜 고통을 느끼며 그들은 우물 속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끈질긴 목숨은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이어지는 것일까,
남아 있는 육체적 기력 때문에 살고자 하는 욕망이 되살아나는 것일까.
어느 것이 먼저고 뒤고라 할 것도 없이
나중에는 한데 뭉뚱그려져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만이 오직 매일매일을 버틸 힘이 되어 준다.
우물 속에 떨어진 동생이 형에게 사람들이 왜 지저분한 곳에 사냐고 묻자 형은 위쪽엔 넓은 공간이 있고 사람도 적다고 대답한다.
"근데 왜?"
"저 위에는 권력이 있거든."
"권력? 그게 뭔데?"
"날아다니는 개가 자기 뿔을 핥고 있어. 간지러운가 봐."-24
이쯤 되면 작가가 말하는 것이 단지 잔혹 동화만은 아닐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누가 이들을 우물 속에 버렸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즈음에는 구더기를 먹고 그 즙을 어느새 즐기며 기아 상태에서 체험하는 망상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거의 동화되다시피 하게 될 것이다.
가장 믿는 사람으로부터 버려진 형제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말들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회고발, 혹은 사회비판의 우회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한계상황이 닥쳐오면서도 형은 죽어가는 동생을 살려서 내보내기 위해 꾸준히 몸을 단련한다. 자신들을 버린 이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비극적인
상황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쓴 시점이 마드리드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이 정부와 은행의 전횡과 무능에 반발하여 자발적 시민운동을
벌이던 때라고 회상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변혁할 필요가 있는데, 그럼으로써 다음 과정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면서 이 책을 변혁의 진전을 위한 상징적인 작품이라 말했다.
아틸라 왕은 전설적인 훈족의 왕으로서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이 아틸라 왕의 말을 훔친 아이는 동생이며, 작가는 동생에게 새로운
인간형, 즉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아틸라의 무시무시한 권능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아틸라 왕의 말을 훔친 아이]는 잔혹한 우화로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격의 글로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며, 누리기만 하면서
현실에 안주해 있는 이들에게 비판적 상상력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비뚤어질테다, 분노할 테다.
소년들의 참혹한 상황을 보면 이런 느낌은 한층 더 강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