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상황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고 헤매이는, 아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 책은 구성된다. 문체는 시종일관 조용하고 착 가라앉아있는데, 나는 이런 식의 문체가 정말 좋다. 나폴리 시리즈 1권 읽고는 2권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가(나는 좀처럼 이 책에 열광이 안된다), 그러다 이렇게 차분한 문체를 만나니 세상 살 것 같은 거다.



정원에서 마커스가 눈을 뜬다. 누군가가 다가와 햇빛을 가린 느낌인데, 아무도 없다. 편지와 소식과 방문은 떠난 자들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가끔씩, 그리고 아주 잠깐씩, 죽은 자들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런 기대는 아주 짧은 순간 지속되다가, 곧 마음이 현실을 기억해 내고 어떤 부재는 다른 것보다 더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p.24-25)



이거봐, 초반부터 이렇게나 좋아. 맞아. 소식은, 방문은, 늘 떠난 자들로부터 오는 것. 내가 책장에서 이 책을 골라내게 된 건, 제목 때문이었다. 제목이 너무 아파서. '헛된' 기다림인 게 싫어서. 그래서 얼른 읽고 이 책을 팔아버릴 셈이었다. 그러니까, 내 책장에서 기다림을 헛되다고 말하는 것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겠어! 하는 다짐을 하며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것. 그렇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데 ... 내가 결국 이 책을 다 읽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제발, 기다림이 헛되다고 말하지 말아줘. 내가 사랑하는 많은 책들은, 결국 기다림이 간절하면 원하는 것에 닿는다고 말해. 나는 그런 걸 원해.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가다가 발견한 이런 문장.



어떤 서정시에도 나오듯, 달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녀는 유리창을 통해 석류나무들을, 아침 이슬을 똑똑 떨어뜨리는 석류꽃과 이파리들을 바라본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마침내 표트르 다닐로비치가 사는 곳을 알아낸 그녀는 지난해 12월 그를 찾아갈 때 석류 한 개를 선물로 가져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그는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전쟁터에서 귀환한 군인들이 흔히 그렇듯 점점 더 말수가 줄어들었다. (p.96)



보석처럼 반짝이는 달과 유리창을 통한 석류나무들이 눈에 선명히 보이는듯하고, 그 아름다움에 고요해진다. 그런데,



"남편이 죽었다니 유감이군요." 표트르 다닐로비치가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건물 앞에 쌓여 가는 눈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른 체격에 눈동자 색이 짙어서 성화에서 걸어 나온 사람처럼 보였고,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였다.

석류는 벽난로 옆에 있는 탁자에 놓여 있었다.

그녀가 석류를 쪼갰다. 난로 옆에 있었던 터라 진홍색 씨앗의 표면이 따뜻했다. 생리혈의 온도, 남자의 몸에서 금방 분출된 정액의 온도.

"아프가니스탄 과일 장수들 중에는 우리 소련군 병사들에게 파는 오렌지와 멜론과 석류에 독약을 주입해서 파는 놈들도 있었죠." (p.97-98)



벽난로 옆에 있는 탁자의 석류가 따뜻해졌을 것은 잘 알겠다. 그런데 그걸 쪼갰을 때의 온도를 왜 생리혈과 정액으로 표현했을까? 저 문맥 어디에서도 갑자기 생리혈과 정액이 필요하지 않은데. 너무 뜬금없잖아? 왜? 왜 생리혈과 정액이 튀어나와? 나는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지만, 저기, 생리혈의 온도, 정액의 온도, 저 문장은 이 책에서 들어내어버려도 진행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김훈도 최근 그의 책에서 갓난 여자아기의 성기 안의 온도가 따뜻할 것이라는 글을 썼었는데, 대체, 성기 안의 온도가 왜 책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거야? 성기 안의 온도를 말하는 상황은 그저 성인 남자와 성인 여자가 원하는 상태로 섹스를 할 때, 그럴 때 말해질 수 있는 거 아닌가? 성인 남자가 갓난 여자아기 성기 온도를 짐작해 말한다는 것-그것도 아버지가!!-, 나는 도무지 이 문장이 용납되어지질 않고, 갑자기 저기서 뜬금없이 생리혈의 온도와 정액의 온도를 말하는 것이 뜨악스럽다. 왜?


나는 여자작가가 이런 글을 썼다면, 그러니까 난로 옆에서 데워진 석류에 대한 글을 썼다면, 거기다 대고 생리혈의 온도를 운운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 젖도 없는 놈들은 젖얘기를 하고 생리를 안하는 놈들은 생리혈의 온도에 대해 입을 털까? 왜? 나는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않았고, 그리고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읽고 있었고, 이것과 저것과 이 상황과 저 상황은 이렇게 저렇게 얽혀서 인간사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는구나, 차분한 마음으로 읽고 있는데, 대체 왜 석류를 따뜻하게 만들고서 생리혈과 정액 얘기를 꺼내는지 모르겠어... 왜 그러는거야? 그 다음 문장들도 아름답게 읽고 있지만, 자꾸 생리혈과 정액의 온도를 생각하게 된다. 그 얘긴 왜했어? 대체 왜? 아직 조금 밖에 안읽어서 읽다가 탁탁 걸리는 부분이 혹여 또 나올지 모르지만, 생리혈과 정액의 온도는 말하여질 필요가 없었다. 왜 썼을까? 이 문장이 거기서 왜나와요? 무슨 생각으로 넣은거예요?



그렇지만, 당신과 내가 보내는 밤.



라라는 러시아에서 왔고 데이비드는 미국에서 왔다. 그리고 이곳은 아프가니스탄, 마커스의 집이고, 이들 모두는 상실을 겪었고 침잠해 있는 상태이다. 라라와 데이비드가 마커스의 집에서 처음 만나고, 그리고 그 밤, 잠들지 못한 깊은 밤에 그들의 집 안에서 마주친다. 아니, 이들에게 어떤 성적인 긴장감은 전혀 없다. 이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이성으로 생각하고 하는 것도 전혀, 전혀 없다. 그런 거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이 너무 좋았다.



데이비드는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아프간인들은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지난 사반세기 동안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넋이라고 믿는다. (p.94)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 위에는 별들이 떠있는데, 그 밤에 함께 있다는 것, 그 밤을 함께 보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너무나 다정하게 느껴지는 거다. 나는 이런 게 너무 벅차는데, 세상 아름다운 게 밤을 함께 보내고 밤의 소리를 함께 들으며 또 그 밤의 소리를 함께 장식해가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밤을 함께 보낸다는 것이 에로틱한 섹스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좋다고 느껴지는 밤이라는 건, 그 밤의 공기, 기운, 온도, 색깔, 별과 달, 밤으로부터 파생되는 그 모든 소리들, 그 소리들 속에 섞이는 당신과 나의 목소리. 그래서 새로이 만들어진, 그전과는 전혀 다른 밤. 나는 이런 게 진짜 너무 좋아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별들을 보고, 거기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게 너무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거다. 비록 그들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지만.



"학교를 세우지 말아야 했어요." 그가 라디오를 끄고 나서 말한다. "테러리스트들을 도발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아침 일찍 잘랄라바드로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겁니다. 아버님께 전해 줄래요?"

"물론이죠."

"고마워요. 잘 자요."

그가 방으로 올라간 후, 그녀는 의자에 앉아 이따금씩 윤곽으로만 보이는 나무들을, 그리고 심리테스트의 잉크 얼룩처럼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놀라게 하는 박쥐들을 보고 있다. (p.95)



내일 마커스에게 얘기좀 전해줘, 응, 잘자... 이게 전부인 대화인데, 나는 이 아무것도 아닌 대화를 나누는 이 장면에, 밤하늘이 있고 별이 있어서, 그래서 그곳의 공기가 전해지는 듯해서, 그런데 거기에 둘이 함께 깨어 있고 그 밤을 온전히 함께, 그 순간만큼은 함께 해서, 너무 좋은 거야. 나는 이런 게 진짜 너무 좋아. 그들은 아무 사이도 아니고, 저기엔 아무런 긴장감도 없는데, 나는 그냥 이런 게 너무 좋고, 그래서 책장을 덮고 하염없이 이 생각 저 생각 해보게 되는 것이야... 밤은 왜이렇게 특별할까? 밤을 같이 보내는 건 왜이렇게 특별할까? 나는 밤 열한시도 되기 전에 졸음이 쏟아지고 자야 되는 사람인데, 그런데 어째서 밤을 함께 보내는 게 이렇게나 특별하게 느껴지는걸까? 어쩌면 내가 열한시도 되기 전에 자야되는 사람이라서일까? 영화 [들어는 봤니, 모건 부부?] 생각도 난다. 시골에 함께 머무르게 됐던 그들의 시골의 밤소리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함께 했던 도시의 밤소리를 그리워하는 장면. 그들은 이혼한 후였고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도, 함께 했던 곳의 소음에 대해 그리워한다. 그래서 한 쪽이 그 소리를 인터넷으로 찾아내어 들려주고, 그걸 함께 듣는 장면이 나오는 거다. 어떤 순간은 함께 하는 것 만으로도 너무나 특별해지는 것 같다. 그것이 그저 밤하늘이고, 별이고, 달이고, 풀벌레 우는 소리만 있다 하더라도.



아주 오래전의 걸그룹 노래 가사도 생각났다.

너와 함께 지내고 싶은 밤,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지만~ ♪








나는 이제 허락이 필요없다.


편지와 소식과 방문은 떠난 자들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가끔씩, 그리고 아주 잠깐씩, 죽은 자들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런 기대는 아주 짧은 순간 지속되다가, 곧 마음이 현실을 기억해 내고 어떤 부재는 다른 것보다 더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p.24-25)

여기 도착하자마자 쓰러지지 않았더라도, 마커스에게 잠깐이라도 이곳을 피신처로 삼게 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삶의 무거운 짐을 잠깐이라도 내려놓고 싶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실패를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현명하거나 강하거나 용감하지 못해 길을 잃으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커스는 눈길이 머무는 모든 것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소수에 속하는 것 같았다. 꿈을 통해 우리 삶에 들어오는 성자처럼. 라라는 그에게라면 지난 세월이 그녀로 하여금 인생에서 길을 잃게 만들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46-47)

갑자기 그의 삶에 등장한 이 여자는 아주 내성적이어서 남에게 말을 걸거나 남의 눈을 보는 것도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어서더니 그에게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을 못 자서 퀭한 눈과 검푸른 멈이 든 목이 보였다. 피곤과 커다른 멍은 육체적인 것이었지만 여자의 영혼도 그렇게 지키고 멍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p.50)

님로드(세계 최초의 왕이자 최고의 사냥꾼)가 알라의 예언자 이브라힘을 불에 태워 죽이기 위해 장작을 쌓고 불을 피웠을 때, 후투티 한 마리가 부리에 물을 담아 와 불길에 뿌렸다. 한 구경꾼이, 그 당시의 딕 체니(9.11 테러 당시 미국의 부통령)같은 놈이, 후투티에게 두 방울의 물로 거센 불길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새가 대답했다. "모르죠. 내가 아는 건 알라가 이 불을 피운 자들과 끄려고 노력했던 자들의 명단을 작성할 때, 나는 후자에 이름을 올리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p.87)

"카트리나가 그랬어. 우샤에 해마다 아내를 임신시키는 남자가 살았어. 남자의 아내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는데, 6년 사이에 아이를 일곱이나 낳았지. 카트리나가 그렇게 경고하고 간청했는데도, 그는 아내의 몸이 회복될 틈을 주지 않았어. 그가 여덟 번째 출산을 앞둔 아내를 우리에게 데려왔을 때, 아내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어. 그때는 저 나무가 아직 어린 묘목이었지만 그래도 꽤 튼튼했는데, 내가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카트리나가 이곳으로 나왔어. 화풀이할 곳을 찾던 카트리나는 그 어린 살구나무를 도끼로 내리쳐 두 동강을 냈어. 어쩌면 그 남자를 흠씬 두들겨 패 줄 채찍을 만들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p.99)

"약자들의 용서는 당신들 강자들이 들이마시는 공기 같은 거예요, 데이비드. 몰랐어요? 눈에 보이지는 앟지만, 조금 전에 분명히 느꼈을 거예요. 약자들의 용서가 있어야 당신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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