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마음이 많이 안좋았다. 좋은 날이었고, 온전히 축하를 받아야 했던 날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안좋았다. 명치 끝에 뭐가 탁, 걸린 것 같고, 이걸 어쩌나 싶어 발을 동동 굴렀던 날이었다. 미안해서 울고 이해받지 못하는 것 같아 서러워 울었다. 좋은 날인데, 그냥 축하만 해주면 안되는걸까, 몇 번 생각하며 원망스런 마음도 들었다. 이동하는 시간들에 읽으려고 시집을 챙겼지만, 마음이 안좋은 데 글이 들어올 수가 없었다. 나는 이동하는 긴긴 시간 동안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더랬다.
가방에 어제 챙겨두었던 시집을 오늘 아침 펼쳐보았다. 마음이 시끄러울 땐 시를 읽고 싶어지는 구나,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이마를 만났다.
이마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보았다
이마의 크기가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난한 나의 이마가 부끄러워
뺨 대신 이마를 가리고 웃곤 했는데
세밑의 흰 밤이었다
어둡게 앓다가 문득 일어나
벙어리처럼 울었다
내가 오른팔을 이마에 얹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자세 때문이었다
오른팔을 이마에 얹고 누워있는 나를 그려보노라니, 벙어리처럼 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싶었다. 엉엉 울면 조금은 후련해질거라고, 어제 나도 생각했더랬다. 그래서 누군가 엉엉 우는 소리를 한참 들으며 놔두었고, 옆에서 나는 훌쩍였더랬다. 오른팔을 이마에 얹고 누워있다 보면, 벙어리처럼 울고, 울다가 그 채로 잠이 들런지도 모르겠다.
소수 3
남자가 김치를 찢는다 가운데에다 젓가락을 푹 찔러넣는다 여자가 콩자반을 하나 집어먹는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남자가 젓가락을 최대한 벌린다 다 찢어지지 않는다 여자가 콩자반을 두 개 집어먹는다 왼팔을 식탁 위에 얹고 고개를 꼬고 있다
남자가 줄기 쪽에 다시 젓가락을 찔러넣는다 젓가락을 콤파스처럼 벌린다 김치 양념이 여자의 밥그릇에 튄다 여자가 쳐다보지 않는다 콩자반을 세 개 집어먹는다 남자가 김치를 들어올린다 떨어지지 않은 쪽이 딸려 올라온다 여자가 콩자반을 네 개 집어먹지 않는다 딸려 올라가는 김치를 잡는다 남자와 여자가 밥 먹는 것을 중단하고 말없이 김치를 찢는다
김치를 전부 찢어놓은 남자와 여자가 밥을 먹는다 말없이 계속 먹는다 여자는 찢어놓은 김치를 먹지 않는다 깻잎 장아찌를 집는다 두 장이 한꺼번에 집힌다 남자가 한 장을 뗀다 깻잎 자루에서 남자의 젓가락 끝과 여자의 젓가락 끝이 부딪친다 찢어주느라 찢어지지 못한 늦은 아침
늙은 냉장고가 으음 하고 돌아간다
어제 내 기분이 울적한 걸 알고, 나의 다정한 남자사람 친구 망고남은, '돈은 내가 벌테니 당신은 쓰고 싶은 글을 써' 라고 했더랬다. 그 말이 너무 예쁘고 고와서, 기분이 너무 좋아서, 헤벌쭉 해졌었는데, 오늘 아침 이런 시를 읽으니, 그와 내가 밥상에 마주보고 앉아, 익숙한듯 함께 밥을 먹으면서, 김치가 잘 안찢어지면 잡아주고 찢어주고 하면서 지낼 수도 있을까? 라고 잠깐 생각했다. 나의 울적함을 알고서는 저녁무렵, 툭, 사진 한 장을 보내왔는데, 나는 그 사진을 받아보고서는 소리 내서 웃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내가 웃을 수 있는지 너무 잘 아는 친구라서 한없이 고마웠다. 소리 내어 웃으면서, 그리고 그와 통화하면서, 아 좋으네, 했다. 좋고 고맙다. 우리가 이런 은밀한 사진을 서로에게 보낼 수 있는 사이라서, 너무 좋구나.
저녁엔 여자사람친구 D를 만났다. 울적한 기분을 안고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친구는 내게 줄 케익을 사가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예쁜 케익이었다. 꼭 축하해주고 싶었다고 친구가 말해서, 울컥, 고마웠다. 우리는 와인을 마셨고, 스테이크를 먹었다. 나는 내가 왜이렇게 울적해졌는지 친구에게 말했고, 친구는 가만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내가 어제 하루 얼마나 힘들었을지 충분히 짐작한 친구는, 레스토랑 바깥에서 나를 포옹해주었고, 또 그렇게 가만가만 내가 택시에 타는 걸 지켜봐주었다. 택시에 타고 나서 울어버렸다. 나 오늘 진짜 축하 받고 싶은 날이었는데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너무 서러운데, 그런데 이렇게 나에게 잘해주고 신경써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해서, 그나마 잠들기 전에 고마운 마음을 만나서 너무 좋아서, 울어버렸다. 택시 안에서 훌쩍,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망고남이 왜 울어 울지마, 다정하게 속삭여 주었다. 당신은 나한테 어떻게 이렇게 잘하지? 내 친구는 또 왜이렇게 나한테 잘해주지? 서러운 날이었는데 또 고마운 날이었다. 계속 관심을 가져주고, 물어주고, 들어주는 사람들.
아니 근데 오전에는 돈을 자기가 벌겠다던 망고남이, 오후에는 주식으로 손해를 봤다며, '안되겠다, 당신이 글도 쓰면서 돈도 벌어'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육성 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니가 좀 벌어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제, 이러저러한 일들로 마음을 다치고 서럽고 서운하고 그래서 약간 어색해진 남동생을 집에 돌아가 만났는데, 남동생이 별 말을 안하고 내 코를 잡아당겼다. 내가 "아퍼!!!" 하고 소리지르는데, 그 순간 우리 사이에 있었던 먹구름도 걷히는 것 같았고, 어색함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이렇게, 얘랑은 이렇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고마웠다. 누나 괜찮지, 나도 괜찮아, 하는 게 코를 잡아당기는 그 행위에 다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속 시끄러운 밤, 씻고 내 침대에 누워 나는 이내 잠들어버렸다.
다음날이 왔고, 또 다음날은 올것이고, 다 괜찮아 질것이다.
나는 잠깐 설웁다
'잠깐' 일 것이다.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