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페이지까지 읽었다. 어려운 문장이 아닌데 뭔가 '바로 이거지!'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건 왜때문일까? 더 읽어볼 일이다.
어제 퇴근길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저자는 자신의 과거 시절부터 반성하며 책을 시작한다. 그 탓인지, 자기 전에 몹시 괴로웠다. 내가 과거에 했던, 아주 어릴 적에 했던 나쁜 짓, 나쁜 말들이 떠올라서. 나 역시 성차별과 성희롱으로부터 무죄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한다. 어린 시절이라 해도 그로 퉁쳐버릴 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잠들기 전에 너무 괴로웠어 ㅠㅠ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죄 하나 없는 깨끗한 인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어젯밤에 많이 생각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국민학생때부터 시작해서)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물론 이 저자만큼 괴로운 기억을 갖기도 힘들 것 같다. 십대 소년 시절 저자는 지적 장애 소녀를 강간하는 장소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시간을 보냈다. 비록 자기 자신은 직접적으로 그 소녀를 강간하진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그것이 나쁜 짓이라 말하지 않고, 그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하여 강간한 '척'을 했으니까. 몇 년후에 조금 더 자랐을 때에는 '니네 뭐하는 거야!' 라고 말하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말리는 대신 그저 그 자리를 뜨는 것으로 그의 행동을 다했는데,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그 집단 성폭행에 대한 책임이 없는 줄로만 알았었다고 했다. 이 부분 읽는데 진짜 너무 힘들어서 ㅠㅠ 씨발 ㅠㅠㅠㅠㅠ 힘들어 ㅠㅠㅠㅠㅠ 세상에 얼마나 많이 이렇게 말하여지지 않은 성폭행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ㅠㅠㅠㅠㅠㅠㅠㅠ 왜 (어떤) 남자들은 자신의 남자다움을 섹스로만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게다가 십대 소년이 자신의 무리에서 인정 받는 길은 섹스를 하는 길이라고 아는 것 자체가 너무 끔찍하잖아. 우리는 조금 더 많이 '아니'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서도.
어제 위 부분에 대한 내용을 읽는데, 며칠 전에 읽은 어린이 그림책 《좋아서 껴안았는데, 왜?》가 생각났다. 그 부분의 이 내용과 확 겹쳐지는 거다.
위 책 《맨박스》에서 지적 장애 소녀는 강간을 당하면서 '싫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 소녀가 '싫다'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괜찮다'는 얘길 한걸까? 그렇지 않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인지 하지 못해서 '싫다'고 말하지 않았든, 싫다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는 게 너무 어려워서 말하지 못했든,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싫은 건 아니야'를 뜻하는 건 아니다. 상대가 싫다고 하지 않았어도 나쁜 짓은 나쁜 짓이다. 못생겼다, 뚱뚱하다 등등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일이 '하지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해도 되는 짓이 아니지않나.
실라가 '싫어!'라고 거부하지 못한 건 그녀의 지능 수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라고 동의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에야 이런 행위가 강간으로 인정되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피해자에게 동의할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No'라고 말하거나 거부에 해당하는 명확한 행동으로써 의사를 표현하지만 실라는 그렇지 못했던 것뿐이다. (p.34)
싫다고 말하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싫다는 말을 여러가지 이유로 입밖으로 꺼낼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일전에 회사에서 성희롱문제가 터졌을 때, 한 여자 직원이 '싫다고 말을 분명히 하면 안그랬을텐데 자기들이 싫다고 말을 안했어요." 했더랬다.
하아-
싫다고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성희롱을 당했다면, 잘못은 피해자에게 돌리는 게 되어버린다. 너가 싫다고 안했잖아? 그러니까 이런 일이 일어났지, 니 탓이야... 니가 반항을 안했잖아? 니가 소리를 안질렀잖아? 이런 식이 되어버리면...대체 가해자는 어디로 가는가? 왜 당한 사람의 잘못이 되어야 하는가. 나쁜 짓은 나쁜 짓이다. 피해자가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도 나쁜 짓이다. 실라가 '하지마' 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저들의 강간이 합의하에 이루어진 섹스가 아닌거다. 실라가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남자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려 그녀를 강간해서는 안되는 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를 뚱뚱하다고 놀려도 되는 게 아니다. 놀리는 거 자체가 잘못이니까. 그건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하지 말아야 되는 짓인 거다.
이 책을 다 읽으면 남동생에게 권할 예정인데, 그 때도 나는 이것이 남자다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말하는 책이라고 말을 하진 않을 것 같다. 한 번 읽어봐 술술 넘어갈거야, 정도로 얘기하면서 줄텐데, 하하하하, 저자는 그 점을 이미 잘 알고 있더라.
나를 초대하는 여성들은 와서 남자들에게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하곤 한다. 이 책 역시 여성 누군가가 골라서 남성에게 선물했을 가능성이 크다. 남성이 스스로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껴 구매했을 가능성은 훨씬 낮다. 그리고 자신의 남자 친구나 아들, 아버지, 오빠, 직장 동료에게 이 책을 선물한 여성이라면 이렇게 책 소개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 한번 보세요. 그냥 휙 읽을 수 있는 짧은 책이거든요. 두껍지도 않죠? 재미있는 얘기도 많아요." 이렇게 가볍게 소개하지 않는 이상 남성들 대부분이 이 책을 열어보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p.23)
내가 남동생에게 이 책을 건네며 칠 멘트와 너무 똑같아서 소오름.. ㅎㅎㅎㅎ 그렇게 권해도 남동생이 한 두장만 읽고 '안읽어'이러면서 내게 돌려줄 확률이 너무 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저 멘트 그대로 권할 생각이다. 하하하하하.
어제는 족발에 소주를 먹으면서 남동생과 뉴스룸을 시청했다. 여러가지 소식들을 접하며 남동생과 함께 분노하고 욕하고 그랬는데, 그와중에 안희정 인터뷰가 나오더라. 손석희와 안희정이라니, 어디 한 번 들어봐야지, 하고 유심히 듣는데, 아아, 말을 너무 어렵게 한다. 안희정이 하고자 하는 말은 무슨 말인지 안다. 대화에 임하는 그 자세, 상대의 말을 일단 경청하고 시작하겠다는 그 태도에 대해서는 무슨 말인지 내가 잘 알겠다. 그 태도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태도를 표현하는 건 서툴렀다 생각된다. 안희정은 발언 내내 '정치가의 입장'에서 말한다고 했는데, 말이란 것이 아무리 좋은 뜻을 가졌다 해도 상대에게 제대로 전해져야 의미가 있을텐데, 했던 말 또하고 또하고 또해도 사람들이 명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표현을 못하는 거다. 듣다가 남동생도 '대체 뭐라는 거냐.. 뭐가 저렇게 어려워' 했는데, 아니, 대통령을 생각하는 사람이 저렇게 대다수 국민을 이해시킬 수 없는 문장으로 말을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믿고 따라가란 말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했던 말 또하고 또 풀이하고 또 하고 또 풀이하면서 보내는 사람이라면, 아이코야, 나는 글쎄올시다... 안희정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뭔가 자기 말에 자기가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어. 하아- 발언 내내 상대의 선의를 믿고 시작해야 한다고 그렇게나 부르짖었지만, 그렇지만 손석희의 말, 국민의 말을 듣고는 있는건지 의심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 가 닿지 않는 느낌, 자신의 태도만 제발 이해해줬으면 하는 느낌이랄까...
뉴스를 보면 전부 화내고 욕할 일만 나오는데, 남동생과 족발을 먹고 소주잔을 부딪치면서, 계속 화내고 투덜댔다. 그런 한편, 아 이 순간은 참 소중하네? 하는 순간이 동시에 들었는데, 하나의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 하나의 소식을 들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은 거다. 우리 모두 하루의 업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고, 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 얘기를 좀 나누고 있었는데, 그렇게 함께 맛있는 걸 먹으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하다가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다니, 이게 너무 좋은 거다. 언젠가부터 뉴스를 혼자 보는 시간이 싫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어제는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뉴스를 함께 보는', 그래서 함께 이야기나누는 시간이었던 거다. 크- 좋은 시간이었어.
삶이란 게 이런 순간들로 그나마 유지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얘길 하고 니가 듣고 또 니가 얘기 하고 내가 듣고, 맛있는 걸 함께 먹고,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면서, 또 각자에게 일어난 별거 아니지만 개인에겐 아주 큰 부분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렇게 다음날을 맞이하면서, 그렇게 유지되는 게 아닐까. 소중한 순간이었다.
어제 아빠는 한의원에서 침맞고 나가는 길이라며 너는 어디까지 왔냐 내게 전화하셨다. 마침 길동역에서 내릴 거라 했더니 아빠가 길동역에서 만나 같이 들어가자 하셨다. 알겠다고 답하고 나는 '내가 조금 기다리겠군' 하는 생각을 했는데, 길동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다가 아빠가 날 혼내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왜 계단 올라오면서 책을 봐!!"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빠 왔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보고 있었어? 그랬더니 아빠는,
야, 내가 내 딸 보고 있지 그럼 안보고 있냐? 그런데 왜 계단을 오르면서도 책을 보냐. 그러지마!!
하고 버럭하시는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면서 책을 가방에 집어 넣었다. 가방 들어줄까? 하셔서 아니, 라고 했는데, 내가 그렇게 계단을 오르면서 읽던 책이 바로 저 《맨박스》였다. 예전에도 걸으면서 책보고 집에 가다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쪽 맞은편에서 가던 엄마 딱 마주쳐서 엄마가 횡단보도 너머로 내게 소리치신 적이 있었다.
"야! 책 보지 말고 걸어!"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딱 걸렸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고 책 집어넣고 집에 갔었는데, 집에 와서 엄마한테 또 지청구를 들었다. 사람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또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더 오래전에 굽은다리 역에 내려서 가고 있는데 내 앞에 시커먼 물체가 딱 서면서 "그렇게 재밌냐?" 하는 거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남자사람친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니가 여긴 왜?? 했더니 이 동네에 볼일 있어서 왔는데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너를 딱 보게 됐다고, 그런데 너는 나를 안보고 계속 책을 보고 걷는다고, 무슨 책이길래 계단 올라오면서도 보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 읽다가 딱 걸린 적 많구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 3년 전이었나, 신경정신과 찾았을 때 닥터가 나한테 걸으면서 책 읽지도 말고 영상도 보지 말라 그랬는데...아아, 나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살고 있었네. 버릇 고치기가 쉽지가 않구먼....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