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 O.S.T
라이언 고슬링 외 노래, 저스틴 허위츠 (Justin Hurwitz) 작곡 / 유니버설(Universal)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가끔 동굴속에 들어간다. 영문도 모르는 채로. 그러니까 내가 왜, 어째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동굴속으로' 들어간다. 그때의 나는 누구와도 어떤 말도 하고 싶지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아무것도 내 기분을 바꾸지 못하고 아무도 내 기분을 바꾸지 못한다. 주기를 알 수도 없어서 대비할 수도 없다. 아, 동굴속이다, 하고 내가 느낄 뿐이다.


일전에는 동굴 속에 들어와있다는 걸 깨달았는데, 그 날 저녁에 약속이 있었다. 너무나 취소하고 싶었지만, 당일에 취소하자니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내 안에는 약속 취소를 싫어하는 내가 있다. 그래서 오늘 만나지 말자고 말하는 대신 꾸역꾸역 그 자리에 나가서는 억지로 말을 하고 억지로 웃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평소의 나와 다름 없이 보여야한다고, 그렇게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이미 내가 평소의 나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었다. 자리가 파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너 오늘 무섭고 조심스러웠다, 라는 얘기를 듣고, 아 그냥 약속을 취소할걸...했었더랬다. 


어제가 바로 그 동굴 속으로 들어간 날이었다. 나는 이 때, 금세 나올 수 있다는 걸, 나오게 된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노력이나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저 시간이 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룻밤이면 된다. 하룻밤. 오늘 밤만 자고나면 나는 다시 세상을 향해 나올 것이다, 라는 걸 나는 알고 있지만, 이조차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 의욕도 의지도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어제 퇴근 길에 라라랜드 앨범을 재생시켰다. 정말 입을 꾹 다물고.




라라랜드의 음악들은 영화를 보지 않은 자들이 그저 노래로써 들었을 때 좋아할 만한 곡들은 아니다. 만약 내가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이 앨범을 재생시킨 후에 좋다고 생각했을 리가 없다(그 전에 재생했을 리도 없지만). 아, John Legend 가 부른 <Start a Fire>는 좋아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다른 노래들에 대해서라면 '어?'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봤다면 달라진다. 영화를 보면서도 나는 이 영화속의 음악들이 좋다고 생각하진 않았더랬다. 딱히 와닿는 곡들은 아니었달까.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영화에 대한 감상이 채 지워지지 않은 채로 듣게 된 음악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쑥쑥 귀에 들어왔고 그렇게 나를 만져줬다. <Start a Fire>는 물론 노래 자체로 좋았고, 제일 처음에 나온 <Another Day of Sun>은 영화의 도입부가 생각나 흥겨웠다. 군중 속의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한 미아가 파티에 가기 싫어 집에 처박혀 있으려다가 파란 드레스를 챙겨입고 밖으로 나와 친구들과 함께 부른 <Someone in the Crowd>를 듣는 것도 즐거웠고. 그렇지만,



<Epilogue>를 듣는 내 마음은 너무나 너무나 아팠다. 분명 흥겹고 신나는 노래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슬펐는데, 에필로그가 나와버리면, 진짜 너무 슬픈 거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이 곡은 진짜 너무 치명적인 것 같아 ㅠㅠ



어제 퇴근길에 그렇게 걸었다. 사무실에서 출발해 매봉역을 지나 도곡역, 대치역, 그리고 학여울역에 이르기까지 걸으면서 들었더니 앨범 전체가 한 번 재생이 되어 끝났다. 그 음악들을 들으며 한껏 슬퍼하고 그렇게 걸었다. 한시간이 채 안되는 시간이었는데, 누구와도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 발로 걸으면서, 그렇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음악을 듣는 일은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줬다. 그리고 동굴 속에서 곧 나갈거야, 라고 내가 나에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오늘 밤이 지나면 동굴 속에서 나갈 수 있어,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 더 들었다. 이번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엘에이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영화속 아름다운 풍경들이 생각났다. 그때, 미아와 세바스찬이 아직 연인이 되기 전에, 저녁해가 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별 거 아니지 뭐' 라고 했던 장면이 떠올랐고, 아, 여름에 캘리포니아에 갈까, 라고 생각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그러다가 미아와 세바스찬의 이야기가 생각나 울컥 슬퍼지고. 나는 그렇게 한껏 감상에 취했더랬다. 



길동역에 내려 집에 걸어가려는데, 아아, 무슨 퇴근 시간이 두 시간 가까이 걸리냐..물론 한 시간 정도는 내가 걷기로 선택한거지만...아니, 지치잖아.... 내일은 걷지 말아야지, 이건 뭐 퇴근하다 날 다 새겠네 ㅠㅠ 가도 가도 집이 안나오는 느낌적 느낌..




집에 돌아가 동생들과의 단톡방에서 여동생에게 라라랜드 꼭 보라고 했다. 너도 좋아할거라고. 어바웃 타임이, 뻔한 얘기인데도 뻔하지 않게 우리를 즐겁게 했잖아, 근데 라라랜드도 그래. 뻔한데도 뻔하지 않게 좋아, 날 믿고 보렴, 하고 추천했다. 그리고는 엘에이 엄청 예뻐, 라고 덧붙였는데, 이에 남동생이 이렇게 답했다. 



- 강동구가 젤 이쁨



ㅋㅋㅋㅋㅋㅋ 여동생하고 나는 빵터졌다. 오, 강동구여!




라라랜드 앨범을 두 번 반복해 들은 어젯밤, 나는 아홉시부터 잤다. 그리고 오늘 아침, 동굴 속에서 걸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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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6-12-13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 동생에게 문자메시지를 받았어요. 언니 이 영화 꼭 보라고요. 그런데 엘에이 얘기는 없고 콜로라도 볼더가 나오니 꼭 보라고.
주말에 보려고 맘 먹고 있어요.

다락방 2016-12-13 13:27   좋아요 0 | URL
네, 나인님. 여자주인공의 고향이 볼더에요. 여자가 남자를 만나서 자신의 고향이 볼더라는 얘기도 하고, 또 여자가 상처 입고 볼더에 돌아가기도 하는 장면들이 나와요. 네, 볼더가 나옵니다! >.<
나인님은 보시고나서 어떠실지 궁금해요. 감상 적어주세요!

2016-12-13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3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몬스터 2016-12-14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달 ( 꼬박꼬박 ) 생리 3-4일 전 즈음해서 정말 기분이 바닥을 쳐요. 이유없이 가라앉고 우울함에 쩔고 운전하다 울기도 하고 ㅎㅎㅎ. 그러다가 생리 시작되면 다시 괜찮아지고. ( 미칫나보아요 ). 시간이 해결하는게 참 많지요?




다락방 2016-12-14 08:19   좋아요 0 | URL
몬스터님, 저도 생리전증후군이 심해요. 이제는 아, 때가 됐구나, 하고는 미리 우먼스타이레놀을 먹어서 생리전증후군으로 찾아오는 우울증에 대비할 수가 있지요. 약 먹는다고 감쪽같이 없어지는 건 아닌데, 그래도 좀 나아요. 저도 생리전 증후군에 기분이 바닥을 치고, 술 마시다가 울기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은 ‘다 지나갈 것이다‘ 하고 스스로를 다독다독해요. 말씀하셨듯이, 시간이 해결하지요. 생리 시작하면 또 나아지니 말예요.

그렇지만 동굴은 다른 문제에요. 이건 생리전에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언제 어떻게 왜 찾아오는지를 몰라서 제가 대비할 수가 없어요. 어떤 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고, 이도 저도 아무것도 소용이 없어요. 이거야말로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지기 때문에, 그저 시간이 가기를 기다려야 한답니다. 때로 인간은 정말 무력한 존재인 것 같단 생각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