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도 밥 같은 건 이제 네 손으로도 해 먹을 줄 알아야지! 귀하게 컸다고 언제까지 받기만 하냐. 아비가 됐으면 식구부터 챙기고. 어떻게 너 혼자 오냐. 너도 참 모질다.˝ (『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비밀들>, p.197)


김이설의 소설 <비밀들>에서 베트남 여자와 결혼한 남자는 아내가 아파 밥을 먹지 못해 이웃집에 밥을 얻어 먹으러 온다. 아내가 아파 밥을 먹지 못하는 건, 아내가 아파서 자신의 마음도 아파 못먹는 게 아니라 아내가 아파 자신의 밥을 차려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아파 밥을 먹지 못한다고 이웃집 아저씨가 우리집 와서 먹어라, 한것. 이에 그 집 아주머니가 저렇게 말한다. 야, 밥 같은 건 이제 네 손으로도 해 먹을 줄 알아야지, 하고. 아니 진짜, 언제까지 받기만 할거야? 소설속에서 그는 아이가 있는 아버지이지만, 설사 아버지가 아니라도 다 큰 성인 남자라면 자기가 먹을 밥을 자기가 차려 먹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일전에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에서 에쿠니 가오리가 여행을 간다고 하자 남편이 "그럼 내 밥은?" 하고 물었다는 일화가 나왔었는데, 남자들아, 왜 밥을 못차려 먹어요???? 왜야???? 왜지??????? 당신 입이고 당신 배에요, 굶기 싫으면 당신 손으로 차려 먹어요... 엄마가, 아내가, 누나가 니네 밥 차려 줄라고 사는 거 아니에요... 그걸 말해줘야 알아요?



아, 갑자기 김이설 소설의 저 부분이 떠오른 건 빡치는 시 두 편을 내리 읽었기 때문이다. 



공갈빵


                    손현숙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하던 봄날, 우리 엄마 갑자기 내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걸음을 떼지 못하는 거야 저

쯤 우리 아버지,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오다가 우리하

고 눈이 딱, 마주친 거지 "현숙이 아버……" 엄마는 아버지를 급

하게 불렀고, 아버지는 "뭐라카노, 아주마시! 나, 아요?" 바바리

자락 휘날리며 달아나버린 거지



먹먹하게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배가 고

픈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웠거든 우리가 대문 밀

치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어디 갔다 인자 오노, 밥 도

고!" 시침 딱 갈기고 큰소리쳤고 엄마는 웬일인지 신바람이 나

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렸던 거야 우리 엄마 등신 같았어



그러면서 오늘까지 우리 엄마는 아버지의 밥때를 꼬꼭 챙기

면서 내내 잘 속았다, 잘 속였다, 고맙습니다, 그 아버지랑 오누

이처럼. 올해도 목련이 공갈빵처럼 저기 저렇게 한껏 부풀어 있

는 거야




다른 여자랑 팔짱 끼고 나갔다온 주제에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를 보자마자 밥을 달라고 한다.. 이 나라 남자들은 밥을 자기 손으로 차려 먹으면 지구가 망한다고 생각한걸까...




엄마는 출장중


                   김중식



또 석 달 가량 집을 비우신단다

산 사람 목에 거미줄 치란 법은 없는 모양이군, 나는 생각했다

집 앞이 집 앞이니만큼

질펀한 데서 허부적거리다가 저녁에 들어오니

그저께 밥상보 위의 흰 종이


머리라도 자주 빗어넘기고

술 한잔도 두세 번에 나누어 마시거라

엄마 씀.

잠은 좀 집에서 자고


아무리 이래도 저래도

한世上 한平生이라는 각오를 했지만

내 삶이 점차 생활 앞에서 무릎꿇고 있다

한량 생활도 사는 건 사는 건데 이건 아닌 것 같고


치욕 없이 밥법이할 수 있으리요마는 나는 이제 밥벌이 앞에서

性고문이라도 당할 용의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밥상 앞에서

먹고 사는 일처럼

끊을 수도 있는 인연이 따로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감기 들면 몸살을 앓으시는 어머니

아! 한가하면 딴 생각 드는 법

또 석 달 가량 나는 自由다, 라고 외치자꾸나, 내 젊음에 후회는 없다, 라고

그런데 냉장고에 양념된 돼지 불고기가 있어서 그만

엄마, 소리만 새어나왔다.



밥벌이도 엄마가 하고 밥상도 엄마가 차린다. 나도 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잘 먹기를 바라는 마음. 엄마는 아마 그런 마음으로 아들을 염려하고 밥상을 차려놓고 그리고 밥벌이 하러 나간 것일게다. 그래,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안다. 집에서 술만 마시는 아들이 걱정되어 술 한잔을 세 번에 나누어 마시라고 쪽지를 써놓고 밥벌이 하러 나간 엄마의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엄마가 없는 3개월간은 자신의 밥상을 자신이 차릴 수밖에 없겠지만, 이 시를 읽노라니 그 밥상이 제대로 된 밥상이라기보다는 그저 술상일 확률이 클 것같다. 생활 앞에서 무릎꿇는다고 표현하는 시인의 처지가 딱하지만, 딱한데, 나는 내내 김이설의 소설 인용구만 생각났다. 



˝야, 너도 밥 같은 건 이제 네 손으로도 해 먹을 줄 알아야지! 귀하게 컸다고 언제까지 받기만 하냐. "

















워낙에 시를 잘 못읽는 사람이라 그런지 실린 시도 딱히 마음에 드는 게 별로 없고 그에 대한 감상도 딱히 와닿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러나 형식만은 좋구나 싶어서 이렇게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에 드는 시 몇 편을 추려내어 그에 따른 나의 감상을 덧붙이는 일. 그리고 위의 두 시도 선택해서 내 식대로 감상을 적어보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시에 대한 감상을 적기 보다는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공감으로 감상을 적어나갈테고-어쩌면이 아니라 확실하겠구나-, 그래서 나는 이 시들을 이 책에서 황인숙이 그랬듯이 좋은 감상으로 써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이래서 나는 시를 못쓰고 못읽는구나 새삼 깨닫는다. 등장인물이 되려고 하니 시를 시로써 감상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내용으로 감상하려고 해서. 난 위의 두 시들이 너무 화가나.....하아- 그런데 이 책속에서 황인숙은 위에 인용한 첫 시 <공갈빵>에 대한 감상으로는 '재밌는 시' 라고 한다.. 두번째 시 <엄마는 출장중>은 '재밌지만 속살이 쓰라리'며, '독한 마음을 먹어도 해결이 안되는 '생활'의 징그러움' 이라 표현한다. 


난..

나는...

시를 읽기에 맞춤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아......




그렇게 책을 읽어가다가 왈칵, 잠시 페이지에 시선이 멈추어 고정되었던 글이 있다. 시에 대한 황인숙의 설명 부분이었는데, 이런 구절이 나오더라.



"어떻게 사랑은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 대사를 읊은 주인공처럼 풋푹하게 젊은 남자가 아니더라도, 사랑의 백전노장이 아니라면, 대부분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게 사랑의 속성이라는 환상을, 미신을 갖고 있다. 그러나 모든 감정처럼, 사랑이라는 감정도 계속 움직인다.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이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이지만, 그 흐름이 향하는 "사랑하는 이"가 바뀔 수 있다. 그럴 뿐 아니라 그 강물의 온도도 늘 같지 않다. 어느 날은 90도까지 올라가기도 하지만, 대개는 60도나 70도고, 때로 30도로 내려가는 날도 있다. 물은 100도가 돼야 끓는다. 99도에도 끓지 않는다. 펄펄 끓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90도의 사랑에도 사랑이 변했다고 느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늘 움직이고 변하게 마련인 사랑의 속성에 마음이 불안하게 요동친다. (p.176-177)



아아. 갑자기 뭔가가, 내가 잡으려 했지만 잡지 못한 무엇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은 감상이다. 펄펄 끓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90도의 사랑에도 사랑이 변했다고 느낀다, 라는 구절에서. 그렇구나. 그런거구나. 그래, 그런 거였어,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나는 왜 사랑이 변했냐고 울부짖기 보다는, 100도까지 펄펄 끓었었구나, 하는 것에 감사해야겠구나. 늘 비슷하게 유지되는 60도나 70도이기 보다, 100도까지 끓기를 선택했고, 그렇게 된거였구나, 하고. 이거야말로 가슴 쓰라린 일이구먼..



이런 근사한 감상이 나온 시는 이것.



냇물에 철조망


                       최정례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이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이다

어제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바람이 불었는데

한 가지에 나뭇잎, 잎이

서로 다른 곳을 보며 다른 춤을 추고 있다

저 너머 하늘에

재난 속에서 허덕이다가 조용히 정신을 차린 것 같은 모습으로

구름도 흘러가고 있다

공중에서 무슨 형이상학적 추수를 하는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펄펄 끓었다가 90도가 되어 한쪽이 변했다 느껴졌는데 상대가 여전히 펄펄 끓고 있다면, 그렇다면 펄펄 끓던 쪽은 그대로 계속 끓어 끓어 쫄아버리게 되는걸까..그러다 냄비도 다 타고...불나서 타버리게 되나...소방차 불러야 되나.....



그리고 이 책 한 권을 통틀어 가장 좋은 시는 아래에 옮길 '김경미'시인의 시다. 일전에 <쉿, 나의 세컨드는>이라는 시를 좋아했었는데, 어쩌면 시도 취향이란 것이 있는걸까. 좋아했던 시를 쓴 시인의 시가, 이번에도 또 좋으네.



봄, 무량사



                      김경미



무량사 가자시네 이제 스물몇살의 기타소리 같은 남자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어 무엇이든 깨도 좋을 나이

겨자같이 싱싱한 처녀들의 봄에

십년도 더 산 늙은 여자에게 무량사 가자시네

거기 가면 비로소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며



늙은 여자 소녀처럼 벚꽃나무를 헤아리네

흰 벚꽃들 지지 마라, 차라리 얼른 져버려라, 아니,

아니 두 발목 다 가볍고 길게 넘어져라

금세 어둡고 추워질 봄밤의 약속을 내 모르랴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좀 짧게 자른 머리를 차창에 

기울이며 봄마다 피고 넘어지는 벚꽃과 발목들의 무량

거기 벌써 여러번 다녀온 늙은 여자 혼자 가네

스물몇살의 처녀, 오십도 넘은 남자에게 무량사 가자

가면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 재촉하던 날처럼




아, 좋다. 좋구먼.. 크.. 좋다.


올림픽공원 생각난다. 일전에 아빠랑 올림픽공원 근처를 걸으면서 '아빠, 내가 올림픽공원에 데리고 온 남자가 몇인줄이나 알어?' 했더랬다. 그러자 아빠는 '좋겠다, 넌 남자 바꿔서 계속 가도 되잖아, 싱글이라. 난 안되는데..' 라고 하셨더랬지...아빠.... 

김경미 시인에게 무량사는 나에게 올림픽공원 같은건가.....



그런데 저 마지막연좀 보라지.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라니. 아아. 인생은 어차피 혼자 가는 거야... 김경미 시인이 자신의 시, 쉿 나의 세컨드는, 에서 그랬었지. 새끼 손가락을 들며 나는 세상의 이거야, 이거, 라고.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인생.....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5-24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4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조기후 2016-05-2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림픽공원이라면 다락방님과 술먹고 토하고 술먹고 토하자고 백만년전에 약속했던 그 곳이군요 ㅋㅋㅋㅋㅋ 아 아닌가 음.. 그냥 술먹고 토하자고 했지 올림픽공원은 아니었나 ㅋㅋㅋㅋㅋ 저는 왜 올림픽공원에 가기로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ㅋㅋㅋ 그나저나 우리는 무려 토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6-05-24 11:0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술멈고 토하고 술먹고 토하자고 약속한 건 기억나는데 그게 올림픽공원이었는지는 저도 잘 기억이 안나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올림픽공원도 좋죠. 좋아요. 요즘엔 좀 많이 덥겠지만요.
우리 좀 멋진 사람들이네요. 토하자고 약속하다니 ㅋㅋㅋ 남들이 하지 않는 약속을 하는 우리 ♡ 건조기후님과 나♡

2016-05-24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4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4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