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에서의 '에미'가 불행한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열려있는 상태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처럼. 나 역시 늘 다른 곳을 보고 다른 무엇을 기다리는 상태였는데, 새벽 세시의 에미가 그래서 나같았다. 지금이 불행해서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저 너머 어딘가에 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렇기 때문에 에미는 레오와 이메일 교류를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나는 이미 결혼한 여자이니 다른 남자와는 일절 연락을 삼가야해' 라고 생각하는 대신, 그저 흐르는대로 맡겨두고 메일을 보내고 메일을 기다리고 했던 일들이, 나는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생각하질 않았다. '앤드루 포터'의 단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완벽하게 충족시킨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사람으로부터 이걸 느끼고 또 저 사람으로부터 다른 걸 취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라 느꼈다. 그렇게 해서 나를 다 충족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런데, 보바리 부인도 그때의 나와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항상 저 너머에, 아직 오지 않은 무엇을 기다리는 여자였다. 그녀가 나보다 더 심각한 위험(!)에 놓인 것은, 그녀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지극히 불행하고 공허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에미의 경우엔 '아 지금도 좋아, 그런데 또다른 무언가 있지 않을까?' 를 생각했다면, 보바리 부인의 경우에는 '아 지금이 너무너무 싫어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해' 라고 하면 적절할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돌발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난당한 선원처럼 그녀는 삶의 고독 위로 절망한 눈길을 던지면서 멀리 수평선의 안개 속에서 혹시 어떤 흰 돛단배가 나타나지 않는지 찾고 있었다. 그 우연이, 그녀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어떤 기슭으로 그녀를 데리고 갈 것인지, 그것이 쪽배일지 삼층 갑판의 대형선일지, 고뇌를 싣고 있는지 아니면 뱃전까지 가득한 행복을 적재하고 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바로 그날 그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나기도 했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놀라곤 했다. 그러다가 해가 지면 언제나 더 한층 마음이 슬퍼져서 어서 내일이 오기를 바랐다. (p.94-95)
그런 그녀에게 신비롭게 느껴지는 자작이 나타난다. 그와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게 아니지만 며칠간 자꾸 생각난다. 그와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정도이다. 그 후에는 아름다운 청년 레옹이 나타난다. 레옹과는 대화가 너무너무 잘통한다. 자작은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레옹과는 매일 만난다. 그에게 어떤 감정 같은 것이 생기고 또한 상대 역시 자신에게 무슨 감정이 생기고 있는 것 같음을 그녀는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성큼 앞으로 나아가는대신 주저한다. 망설인다. 남편은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람인데, 그래도 자신은 결혼한 여자니까, 하고는 세상이 옳다고 말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레옹 역시 아직 어렸으므로 더 나아가기를 포기한다. 아, 이 여자랑은 정말 대화하는 게 좋지만, 우리는 여기까지인가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정하고 덤비는 로돌프에게 보바리 부인은 대응할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기다려온 것이 바로 이것일지도 몰랐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로돌프는 '작정하고 덤볐다'.
「그놈은 아주 멍청한 것 같아. 그래서 여자는 아마 지겨워하고 있을 거야. 더러운 손톱에다 수염은 사흘 동안 못 깎은 꼴이거든. 그놈이 환자를 보러 터덜거리고 다니는 동안 마누라는 집에서 양말이나 꿰매고 있는 거야. 그래서 따분하겠지! 도회지에 살면서 매일 저녁마다 폴카를 추고 싶겠지! 가엾은 여자! 도마 위의 잉어가 물을 그리워하듯 조것은 사랑이 그리워 입을 딱딱 벌리는 거야. 서너 마디 달콤한 말만 걸어주면 틀림없이 홀딱 반할걸! 고거 삼삼하겠는데! 매력적이야! ……그래, 그렇지만 나중에 어떻게 떼버리지?」 (p.190-191)
사귀기도 전부터 '어떻게 떼버리지?'를 고민하는 남자를, 보바리 부인은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너무 속이 상해 ㅠㅠ 옆에 있었다면 뜯어 말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나는 보바리 부인을 뜯어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데, 맹목적으로 좋아한다는 데, 그것이 누구의 말로 멈추어질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다른 사람의 사랑 이야기엔 끼어들지 않는다는 게 내가 그간 살아오면서 세워둔 스스로의 룰 같은 거다. 다른 사람의 연애에 함부로 끼어들어 조언하지 말 것. 그것이 나중에 상처가 될지라도, 그것은 당사자가 감내해야 할 몫이다. 내가 그간 내 연애, 내 사랑을 하면서 지금의 내가 되었듯이,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네가 상처 받을까 두려워' 라는 말로 시작하는 사랑에 대한 조언은 대부분 쓸모없다. 그래도 독자인 나는 너무나 속이 상해. 게다가 로돌프는 보바리 부인을 너무나 잘 꼬셔대고 있다. 이렇게.
「언젠가, 절망에 빠져 단념하고 있을 때, 돌연 말입니다. 그때 지평선이 열리면서 <자, 행복이 여기 있다!> 하고 외치는 목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겁니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당신의 지나온 생애를 고백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모든 것을 다 희생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입니다! 설명도 필요없이 서로를 직감합니다. 서로가 꿈속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토록 찾았던 보석 같은 그가 바로 여기, 당신의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빛을 발합니다. 불꽃을 튀깁니다. 그래도 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아 감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밝은 빛 속에 나선 것처럼 눈이 부신 것입니다」 (p.209)
그러나 떼버리기로 작정하고 시작하지 않았는가. 그들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온다. 아니, 그 말은 적합하지 않다. 로돌프가 보바리 부인을 떼버리는 순간이 왔다. 눈앞에 닥치기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달콤한 꿈에 젖어있던 그녀는, 그래서, 몹시 아프다. 앓는다.
아프고 기운 없던 그녀가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게 된건, 다른 사랑을 만나고난 후다. 예전의 어렸던 레옹이 이제는 청년이 되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고, 그간 다른 여자들을 만나왔던 레옹은 이제야말로 보바리 부인과 제대로 사귀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레옹은 보바리 부인을 좋아했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보바리 부인이 느꼈던 것도 아마 로돌프로부터 느꼈던 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작정하고 꼬시는 것과 좋아서 유혹하는 건 좀 다를테니까. 어쨌든 보바리 부인에게 '다시'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는 생기넘치고 의욕넘치는 삶을 산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문간에 꺼먼 어망을 걸쳐놓은 어느 술집의 천장이 낮은 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바다빙어 튀김과 크림 그리고 버지를 먹었다. 그들은 풀 위에 눕기도 했고 사람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포플러나무 밑에서 키스했다. 그들은 마치 두 사람의 로빈슨 크루소처럼 이 조촐한 곳에서 영원하도록 살고만 싶었다. 자신들만의 행복에 취해 있는 그들에게는 그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으로 여겨졌다. 물론 그들이 나무와 푸른 하늘과 잔디밭을 보고 물 흐르는 소리와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드는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예전에는 자연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혹은 그들의 욕망이 충족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았다는 듯이, 그들이 그 모든 것의 감동을 이토록 강하게 느낀 적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p.370-371)
이 책은 읽기 시작할 때부터 어쩐지 슬펐다. 고독하고 외롭고 공허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조차 불안에 떨게 한다. 보바리부인이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불어 그녀의 아이도 엄마의 행복한 기운을 전달받을 수 없었고, 그녀의 하인도 불평과 두려움이 쌓였다. 내가 강해서 그 공허하고 외로운 사람이 옆에 있어도 꿋꿋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족이라면 일단 휘둘리기가 너무나 쉽고, 아이는 어렸으며 하인은 지위가 낮았다. 시작부터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님은 게린느하고 똑같네요. 제가 여기 오기 전에 디에프에서 알았던 폴레의 어부 게렝 영감님이ㅡ 딸이었죠. 표정이 어찌나 슬퍼 보였는지 이 아가씨가 그 집 문간에 서 있는 걸 보면 마치 그 집에 초상이라도 난 걸로 생각될 정도였어요. 그 아가씨 병은 꼭 머릿속에 안개가 끼어 있는 것 같은 증세였는데 의사 선생님도 신부님도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었어요. 병이 심해지면 혼자서 바닷가에 나가서는, 세관 관리가 순회하면서 보니까, 파도가 밀어닥치는 자갈 위에 뒹굴면서 울더래요. 그렇던 것이 결혼을 하고 나자 깨끗이 나았다는 소문이더군요.」
「하지만 내 경우는」 하고 엠마는 대답했다. 「결혼을 하고 난 다음부터 생긴 병인걸」(p.161)
엠마(보바리 부인)는 결국 충족되지 못했다.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완전한 충족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이제 아는데, 엠마는 결국 생이 다할때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조금 더 살았다면 그런 사람(혹은 어떤 존재)을 만날 수 있었을지 어쨌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녀에게 닥친 삶이란 것, 그녀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이란 것은 출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집과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구입했던 것들, 연인에게 선물해주려고 했던 것들, 그 모든 것들의 비용을 지불하지 못해 그녀의 집은 차압당했고,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기를 거부했다. 이 모든것은 결국 공허함과 외로움의 결과였을까? 결국 그녀가 출구 없는 삶이 눈 앞에 도달할때까지 깨달은 것이라곤, 남자들은 죄다 그모양이란 것이다. 믿을 만한 놈이 없더라, 하는 것. 달콤하게 사랑을 말해놓고 떠나고, 돌아서버리고, 도움을 요청하면 외면하는... 그렇다면 그가 그런 남자들을 사랑한 게 잘못이었을까?
결혼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처지였다면, 그렇다면 처음부터 모든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렇다라도 모든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녀는 아들을 갖고 싶었다. 튼튼한 갈색 머리의 애였으면 했다. 이름은 조르주라고 지으리라. 이렇게 사내아이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치 과거의 모든 무력감에 대하여 희망으로 앙갚음하는 느낌이었다. 남자로 태어나면 적어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온갖 정념의 세계, 온갖 나라를 두루 경험할 수 있고 장애를 돌파하고 아무리 먼 행복이라 해도 붙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여자는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어떤 체면에 발목이 잡혀 있다. (p.131-132)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히터가 고장나서 내가 지금 매우 춥다.
서비스 기사님은 오후에나 오실 수 있단다.
오후까지 나는 계속 춥겠지.
새로 온 이 하녀는 쫓겨나는 것이 두려워서 불평도 못하고 참았다. 그리고 마나님이 보통 때는 식량 찬장의 열쇠를 잠그지 않은 채로 두기 때문에 펠리시테는 매일 밤 설탕을 조금씩 훔쳐서는 기도를 끝낸 뒤 잠자리 속에서 몰래 먹었다. (p.91)
엠마 쪽으로 말하면, 자기가 그를 사랑하는지 어떤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연애란 요란한 번개와 천둥과 더불어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에서 인간이 사는 땅 위로 떨어져 인생을 뒤집어엎고 인간의 의지를 나뭇잎인 양 뿌리째 뽑아버리며 마음을 송두리째 심연 속으로 몰고가는 태풍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집 안의 테라스에서 물받이 홈통이 막히면 빗물이 호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태연히 안심하고 있다가 문득 벽에 금이 간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p.148)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내겐 당신이 전부예요. 그러니까 당신한테는 내가 전부일 테죠. 난 당신의 가정이 되고 고향이 되겠어요. 당신을 잘 보살피고 사랑하겠어요. (p.286)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나도 알아버려서 기쁨을 백 배나 더해주는 저 경이로운 소유의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레옹이 그녀에게 싫증이 난 것만큼 그녀 역시 상대에게 물려버렸다. 엠마는 간통 속에서 결혼 생활의 모든 진부함을 그대로 발견하고 있었다.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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