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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김보영 지음 / 기적의책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가 늙어간다는 것 역시 그러하다. 나는 십년전보다 일년전보다 그리고 다섯시간 전보다 조금 더 '늙어'버렸지만, 그것이 내가 쇠락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과거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어있고 과거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되어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좀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있다.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또 그렇게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는 당신을 만난다면,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서로에게 갖는 신뢰란 것은, 그렇게 조금 더 커지지 않을까. 오래전이 아니라, 오년전이 아니라, 지금이라 다행이다.
나는 나이를 먹었어. 하루에 하루씩, 한 달에 한 달씩. 한 해에 한 살씩, 시간을 몸에 쌓으며 살았어.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야. 10년 전보다 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어. 몇백 년 전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어. 내일은 하루만큼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야. 내년에는 또 한 해만큼 그렇게 될거야. (p.76-77)
시간과 공간이 뒤섞이고 좀처럼 만나지 못하는 이 남자와 여자 때문에, 아, 이 소설은 대체 무어란 말이야, 했다가, 기다리는 사람 때문에 마지막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당신에게 닿기 위해 당신에게 갈 수 있지만 당신에게 닿기 위해 기다릴 수도 있다.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를 기다리다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시간이 흘러버리는 이 소설은, 그러나 읽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쫙 편 손바닥 하나 만큼의 크기를 가진 이 작은 소설이, 그러나 엄청난 무게의 달콤함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랑 결혼한다는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좋아서 깨. 애처럼 바둥거리다 베개를 끌어안고 콧노래를 부르며 자곤 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옆에 누워 있는 상상을 하면 좋아 죽을 것 같아. (p.13)
시간이 많이 흘렀고 여기까지 오는데 아주 오래 걸렸다. 그렇게 내가 당신을 기다렸는데, 이토록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언젠가 방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고 몇 달 살았던 적도 있다고 했었지?
이제 알 것 같아. 그건 혼자 산 것이 아니었어. 난 한 번도 혼자 살았던 적이 없어. 누군가는 내가 내놓은 쓰레기를 치워 갔고 정화조를 비워 주었어. 발전소를 돌리고 전기선을 연결하고, 가스를 점검하고 물통을 갈고 하수관을 청소했어. 어느 집에선가 면을 삶고 그릇에 담아 배달하고 다시 그릇을 가져가 닦았어. 나는 한 번도 혼자 살았던 적이 없어. 내가 무슨 수로 혼자 살 수 있단 말야?
그저 살아 있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거야. (p.47-48)
당신은 한 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다. 인류가 멸종하고 당신만 혼자 남은 게 아닌 이상, 세상이 세상으로 존재하는 이상, 당신은 당신이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관계하며 살았다. 당신은 한 순간도 그러므로, 혼자인 적이 없다. 그러나 세상이 더이상 세상이지 않고 지구상에 인간이라고는 당신 밖에 남아있지 않아도,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닐 것이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된 나도, 지구상에 함께 남아 있을테니까. 모두가 사라져도 내가 남아 있을테니까. 어딘가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달콤한 말인 것 같아.
기다릴테니까 와줘,
결국은 와락 끌어안게 되는 말인 것 같아.
당신에게 어울리는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