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인종주의, 계급 차별‥‥‥)는 일종의 색안경이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육안이 되어버린 그 색안경을 벗어야, 여성의 현실이 보인다. 눈을 감아야 보인다. 나는 갑자기 색안경이 `벗겨져서` 눈이 먼 상태인데, 그는 이제 다 보이니 얼마나 좋으냐, 그러니 그만 보라고 말한다. 나는 아무 말도 못했는데, 내가 연단으로 나오는 사이, 세상은 내가(여성이) 말하려고 폼 잡는 것 자체에 이미 충격받은 듯했다.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평소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동료라고 믿었던 그에게마저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이지 절망스러웠다. (p.21-22)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더욱이 편안할 수는 없다. 다른(alternative)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empower).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대안적 행복, 즐거움 같은 것이다. (p.23)
여성주의는 우리를 고민하게 한다. 남성의 경험과 기존 언어는 일치하지만, 여성의 삶과 기존 언어는 불일치한다. 남성 중심적 언어는 갈등 없이 수용된다. 하지만 여성주의는 기존의 나와 충돌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에게, 공동체에, 전 인류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지성을 제공한다. 남성이 자기를 알려면 `여성 문제(젠더)`를 알아야 한다. 여성 문제는 곧 남성 문제다. 여성이라는 타자의 범주가 조재해야 남성 주체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p.23)
모든 물음은 질문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질문 내용은 질문자의 입장과 관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물음에는 이미 특정한 형태의 답이 전제되어 있다. (p.26)
물론, 남성들도 같지 않다. 남성들 중에는 좌파도 있고 우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고, 지식인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남성들은 개인 혹은 인간으로 간주되지만, 여성들은 여성으로 여겨진다. 여성이나 페미니즘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자 내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억압이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여성 해방이다. 여성을 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 (p.29)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Luce Iregaray, 1932~, 서구 전통 철학의 `남근이성중심주의` 사유를 비판하는 프랑스의 페미니즘 철학자)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p.44)
하지만 여성들은 안다. 장애인이나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대와는 다르게, 자기 권리를 외치는 여성을 사회가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여성에게는 언제나 권리보다 도리(의무)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는 사실을‥‥‥. (p.47)
여성이 자궁이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하는가? 성대를 가진 사람이 가수가 되는 것은 선택과 노력의 결과이듯이, 어머니가 되는 것 역시 개별 여성들의 선택에 따른 문제이다. (p.58)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개인으로서 여성의 차이는 의미가 없다. 모든 여성은 어머니라는 생각 대문에 여성은 다 같다고 간주된다. 그래서 한 여성의 실수나 무능력은 언제나 전체 여성을 욕 먹이는 일이 된다. (p.59)
모든 여성이 어머니의 의무나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출산은 전쟁에는 미달하되 전쟁만큼 사망률이 높은 유일한, 위험한 사회 활동일 뿐이다. (p.61)
우리 사회가 여성을 그토록 어머니로 호명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머니로 간주되는 여성은 성적 주체가 될 수 없고, 자신의 몸을 가질 수 없다. 그녀의 몸은 남성만이 주체가 되는 가족과 국가의 소유다. (p.65)
문제는 어머니의 권력과 여성의 권력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지위가 높은 사회일수록 여성의 지위는 낮다. 어머니는 아들의 대리인이다. 고부 갈등은 여성과 여성의 갈등이 아니다. 시어머니/며느리는 여성의 관점에서 비롯된 정체성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과 맺고 있는 힘의 관계를 설명할 뿐이다. 어머니의 권력은 결국 출세한 아들의 권력에서 나온다. 어머니의 행복한 삶은 잘난 아들을 통해서(정확히 말하면 아들의 아내의 노동을 통해서) 보장된다. 그런 어머니가 남녀고용평등법을 찬성할 리 없다. (p.70)
대개 남성들은 인과 관계나 의사 전달 위주의 말하기 방식(report-talk)에 익숙하지만, 여성들은 원칙적이기보다는 맥락적이고 공감하는 말하기 방식(rapport-talk)에 능하다. 이제까지 여성들의 말하기 방식은 열등하거나 비논리적, 사적이라고 비하되어 왔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여성적 방식`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민주주의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84)
만에 하나 그녀가 당선되더라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 운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녀의 정체성은 공주이지, 여성도 시민도 아니다. 아무리 과거사 `해결책`을 제시한다 해도 진정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녀의 대권 도전 자체가 `충과 효의 갈등`이라는 시대착오적 틀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인간 박근혜`의 불가능성. 이것이 그녀의 실존이자 한국 현대사다. `대통령 박근혜`는 여성도 새통령이 될 수 있다는 근대 민주주의의 성과가 아니라 신분 사회의 부활이다. (p.100)
《남자-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의 저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많은 여성들이 남자와 연애할 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상대방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 속에 내재된 풍부한 감성과 사랑의 능력을, 상대 남자의 매력으로 오인한다는 것이다. (p.104)
남성은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성욕이 생기지만, 분노했을 대 성 욕구가 일어나는 여성은 거의 없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가 남성의 입장에서 해석된다는 데 있다. 남성은 성폭력 상황에서 여성의 목숨을 건 저항을 `자극`으로 이해하고 수용한다. 가정폭력의 경우,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들은 자기가 아내를 `힘들게 가르쳤다`고 생각하고, 아내에 대한 폭력을 남편의 성역할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가해자인 남편은 `부부 싸움 후 섹스로 화해` 했다고 만족하지만, 피해자인 아내는 `구타 후 강간` 당했다고 생각한다. (p.108-109)
섹스와 음식 만들기는 가부장제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노동이다. 즉, 음식과 성을 노동으로 강요받는 사람은 여성이지만, 여성은 음식과 성을 즐길 수도 없고 욕망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남성은 수천 년 전부터 생식이나 쾌락, 자기 실현 등 다양한 차원에서 성을 즐겨왔지만, 여성의 성은 지금까지도 출산의 영역에 한정할 것을 강요받는다. 여성의 성욕이 부계 가족 유지-아들 낳기만을 위해 허용되듯, 여성의 식욕이 찬양되는 시기는 임신했을 때뿐이다. 남성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동시에 달성하기 힘든 이중 메시지인 경우가 많다. 음식을 만들되 먹지 말라, 말라갱이가 되되 가슴과 엉덩이는 풍만하라, 정숙하면서도 섹시하라 ‥‥‥. 식욕, 성욕, 수면욕은 인간의 3대 욕구가 아니라 남성의 3대 욕구인 셈이다. (p.112-113)
현행 성폭력 특별법에서 강간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되었을 경우에 한정된다. 성폭력을 피해자의 인권 침해가 아니라 `임신 가능한 부녀자 보호`라는 가부장적 시각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대에서 남성 간 성폭력, 성 전환자에 대한 강간, 여성 성기에 이물질 삽입 등은 강간이 아니라 추행죄가 적용되어 강간보다 형량이 낮다. 피해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 전환자든, 성기 삽입이든, 이물질 삽입이든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인권 침해이고 성폭력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임신 가능한 부녀가`만을 `여성`으로 볼 때, 성폭력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아니라 남성 각자가 소유한 `임신 가능에 대한 부녀`에 대한 침해죄-`사유재산권` 침해-가 된다. 이러한 문화적 규범 때문에 성폭력 특별법이 있어도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강간은 처별하기 어렵다. 자기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다른 남성의 `가임 가능한 부녀자`가 아니므로 남성 연대의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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