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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첫 햇살
파비오 볼로 지음, 윤병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여자는 알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의 남편은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척도 하지 않으며, 우리 사이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그는 여자가 달라지고 있는 걸 눈치채고 있었지만 애써 못본척 한다. 그에게 가정생활을 끝내는 것, 여자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으므로. 그러나 여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을 보는 것이 힘들어지고 새로이 만난 남자에게 속절없이 끌려간다. 새로운 남자와 비로소 자신이 생각만 했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성적 환상들을 풀어나가며 서서히 또다른 자신을 발견해간다. 내 안의 숨겨진 나를, 내가 그간 보지 못했던 나를.
여자는 남자에게로 향한 욕망이 어느새 사랑으로 바뀌었음을 깨닫게 되고 남자도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혹여라도 그를 잃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지나쳐, 그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2주간, 그녀는 집착의 끝을 달리게 된다. 집요한 여자가 되고 과잉 행동을 보이는 여자가 된다. 남자가 있는 곳으로 가려던 여자에게 여자의 친구는 그건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니 가지 말라 조언하지만, 여자는 오지 않는게 좋다던 남자의 말을 자기 좋을대로 해석한 뒤 연락도 없이 그를 방문하고, 그건 여자와 남자를 갈라놓는 계기가 된다.
아, 이 여자야. 지나치고 있어, 그렇게 집요하면 상대는 당신을 떠나게 된다고. 그녀가 집요함의 꼭대기에 올라 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걸 여자의 친구가 해줬고, 내가 예상한대로 여자에게 조언은 먹혀 들지 않았다. 사랑과 욕망에 정신이 나가 있는 여자에게 대체 무슨 말이 들릴 것인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잔인하게 혹은 아프게 읽힌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집착에 쩔어 허우적대는 장면. 내적 갈등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집착을 감추지 못해 입 밖으로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내뱉는 장면장면들. 그 후에 찾아오는 쓰라린 후회. 이렇게까지 가진 않아야 했어, 그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어... 아, 그들은 좀전까지 얼마나 뜨거운 연인들이었던가!
01:48
-나 아직 깨어 있어. 자긴?
02:03
-자긴 나랑 놀고 싶지 않은 모양?
02:20
-아무 때라도 좋으니 대답해줘. 걱정돼서 그래.
02:51
-별일 없는지만 알려줘. 아니면 나 잠 못 자.
03:03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왜 대답 안 해? (p.274-275)
"화가 나서가 아니야. 그냥 수천 개씩 쏟아지는 문자 폭격 같은건 받고 싶지 않을 뿐이야. 내가 답이 없으면 그건 그 순간에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중에 문자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면 그때 연락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한꺼번에 수백 개씩 보낼 필요는 없는 거 아니겠어?"
"미안해, 걱정이 돼서 그랬어. 갑자기 그렇게 사라져버리니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고..."
"아니, 도대체 뭘 걱정한 건데?내가 자기한테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얘기해줬고 파티에 간다고까지 얘기했었는데."
"그냥 오케이라고만 보내줬으면 됐을 거 아냐. 나중에 통화하자고 한마디만 해주면 되는 걸 가지고...그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그렇게 사라지는 대신 그냥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되는 거였잖아."
"난 사라진 적 없어. 그냥 누가 나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p.278)
-나 여기 왔어.
5분도 안 돼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기라니, 어디?"
"여기. 바 이름이....'로마'네. 커피 한잔 하고 있어."
침묵이 흘렀다.
"예상 못 했던 모양이지?"
"그래, 데리러 갈게. 5분만 기다려."
(중략)
조금도 변하지 않는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그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내게 말했다.
"왜 온 거야?"
가슴팍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질문이었다. 나는 솔직하기로 마음먹었다.
"보고 싶었어."
"출발하기 전에 왜 말 안 했어?"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p.300-301)
집요한 문자폭탄 후 여자가 남자에게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남자는 동생네 집이라 동생과 함께 있고 해야 할 일들도 많으니 자신이 돌아오는 대로 목요일에 보자고 하고 여자도 알겠다며 전화를 끊은 후였다. 그런데 여자는 말없이 남자에게로 갔다. 그로 인해 여자와 남자가 헤어졌다한들, 그건 오로지 그녀가 감당할 몫이다. 이런 일들이 여자에겐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스럽고 아팠지만, 여자는 그 일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과 만나며 그리고 자신을 성장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된다.
성장한 여자가 혼자 있는 걸 즐기는 장면, 그리고 우연을 믿는 장면, 그 믿음에 우연이 찾아오는 장면 등은 여자를 위해 기뻐할 일이지만, 여자의 성장 다시 말해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 왜 남자에서 시작하며 남자로 끝을 맺어야 할까는 의문이다. 그러나 연애의 과정을 거쳐 이별을 맞닥뜨리는 것이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일, 여자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현실을 현실로 보지 않고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만 보려고 했던 여자의 남편에게도 이 일은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여자의 내면이 서서히 변해가는 일, 전혀 새로운 남자를 만나 점점 감정이 바뀌는 것들을 마치 여성이 쓴 것처럼 세밀하게 표현해낸 남자 작가의 능력은 놀랍지만, 그 과정이 지나치게 길어 중간부터는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좀 분량을 줄였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다, 고 생각할 무렵 저렇게 집착에 폭발하는 여자의 내면이 그려진다. 읽다가 내 감정이 같이 지친다. 나도 한때, 묵묵부답인 그의 상황을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기 보다 몇 천 개의 상상을 만들어 내어 나 스스로를 괴롭히던 적이 있었으니까. 뭐, 앞으로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고. 반대로 문자 폭탄을 받았던 적도 있다. 나는 단지 문자를 조금 늦게 보았을 뿐인데, 나에게 문자를 보낸 이는 자신이 만든 시나리오 속에 나를 넣어두고는 한껏 걱정을 해댔던 것. 아, 그 때가 그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던 때였다.
책 속 여자의 집착, 내것이기도 했던 그 집착을 덜어내 자유로워질 때, 혼자이면서 머릿속에 몇 천개의 그림을 그리는 대신 지금의 나를 즐길 때, 그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내가 건강하고 행복할 때 찾아오는 관계야말로 건강한 연애로 이어질 것이고. 그러니 헤어짐이란 고통은, 감당할 가치가 있는 것일 테다.
커피 잔을 내려놓고 책꽂이에서 책을 몇 권 집어 들었다. 책을 펼쳐 들고 한때 줄을 그어놓았던 문장들을 다시 접해조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른다.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무엇을 느꼈고 정말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p.17
"어제 정말 좋았다고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얼마나 좋았는지, 여태 웃고 있는 거 알아요? 언제 또 올래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정신이 조금 오락가락하네요. 사실 그런 걸 기대했던 건 아니라서..." "괜찮아요. 그래서 더 이상 날 보러 오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되면 알려만 줘요. 그럼 내가 갈 테니까." -p.116
"남녀가 서로 잘 지내면서도 사랑에 깊이 빠져들지 않는 것만큼 멋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싶어. 대신에 사랑에 빠지게 되면 말이야,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이 오가기 시작하고 대화에 `영원히`란 말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바로 그때부터 왠지 이륙이 아니라 착륙이 시작되는 것 같단 말이지. 마치 사랑한다는 말이 끝내자는 말의 시작인 것처럼 보인다는 거야.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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