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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고,라고 불렀다 ㅣ 창비시선 378
신미나 지음 / 창비 / 2014년 9월
평점 :
그것이 아마도 첫 연애였다면, 그래서 아마도 나는 그토록 혹독히 앓았나보다. 이런 사람을 어찌 또 만나려나, 이런 감정을 또 어찌 느끼려나, 내가 앓았던 시간은 길고도 길었고, 그 긴 시간동안 나는 혹여라도 그를 다시 보게 된다면 하는 기대감으로 지냈다. 그 시간은 너무도 길었고, 내 앞으로의 날들에도 역시 그를 향한 그리움만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대체 그게 아니라면 또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어린날 내가 만난 그 남자가 진짜 남자였고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이었다고 생각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더 뜨거운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다른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고, 설사 다른 사랑을 해도 그 사람을 사랑했던 만큼 사랑할 수 없을거라고 감히 단언했다. 오, 그러나 자신에 대한 확신은 얼마나 위험한가. 시간은 흘렀고 나는 그를 당연히 잊었으며, 웬걸, 우리가 했던게 정말 사랑이긴 했나, 하는 자조 섞인 중얼거림도 찾아왔다. 그거, 사랑도 뭣도 아니었던 것 같어, 라는. 심지어 그를 사랑(이라고 생각했지, 그때는)했던 것보다 더 큰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 생기기도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좋아하면서, 무시로 떠오르던 그는 어느 순간, 억지로 기억하려고 해야만 기억나는, 애를 써야만 떠오르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옛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첫 연애는 옛일이 되었다.
옛일
해마다 잊지도 않고 공양하나
저 꽃들, 보노라니
어쩌나
죽어도 너를 못 잊는다는 약속은
거짓이었어라
너 없어도 찢어진 살 위에 새살 돋고
밑이 젖는 내 몸 봐라
어쩌나
향불 한올 피우지 못하고
너는 이제 강가에 던진 돌이나 되었는데
내 슬픔만으로 꽃 모가지 하나 꺾을 수 있느냐
산비알에 독짝 하나 굴릴 수 있겠느냐
내가 너를 어찌 잊어
어찌 잊을 수가 있어
지글자글 타는 자갈밭 맨발로 걸으며
울던 내 낯도 옛일, 다 옛일
한번은 같이 바다를 보았었다. 달무리를 보고 꽃게찜을 먹고 두 손을 꼭 잡고 걷던 일이 그 바다에 있었더랬다. 환한 대낮에는 방파제 위에 훌쩍 그가 올라섰고, 질 수 없어 내가 올라섰다. 폴짝 폴짝 그가 이 방파제에서 저 앞의 방파제로 발을 옮길때, 그러나 나는 그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곧 울 것같은 목소리로 못해, 하며 주저앉아 버렸다. 그는 다시 폴짝 폴짝 내 앞으로 와, 무서워 벌벌 떠는 내 손을 잡고 육지로 데려왔다. 나는 폴짝폴짝 방파제를 넘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는 폴짝 포올짝 더 먼 데로 갈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 일도 옛일, 그 앞에서 못한다고 주저 앉았던 나도 아주 머언- 옛날의 나. 방파제 앞에 선 그 당시의 내 가슴속엔, 그때는, 가득했던 사람도 옛, 사람.
파랑파랑파랑파랑파랑
방파제만 따라 걸었네 병신같이 미쳐 걷고파, 가닥진 머리칼에 미역 냄새 풍기고 배꼽에 잔디씨처럼 까만 때는 끼어서
내 속에 작은 파도 밀려온 적 있었네
네 두 손을 꼭 끌어다 가슴에 대고 녹을 듯이 몸이 젖었던 생각만 되풀이하던 그때, 그날들의 눈 먼 물보라
오이지
헤어진 애인이 꿈에 나왔다
물기 좀 짜줘요
오이제를 베로 싸서 줬더니
꼭 눈덩이를 뭉치듯
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었다
꿈속에서도
그런 게 미안했다
잊혀진 옛일이 있고 잊혀진 옛사람이 있다. 그러나 아직 잊혀지는 중인 사람이 있고 그렇게 옛사람으로 가고 있는 사람도 있다. 잊으려고 노력해도 의지로는 되지 않는 것처럼, 잊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 순간에는 잊혀지는 것 역시 의지로는 되지 않는 일. 나는 그런대로, 되는대로 내버려두겠지만, 혹여 내가 아직 당신을 못잊어 내 꿈에 당신을 초대하거든 당신 역시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서도 같은 꿈을 꾸어 그 속에서 나를 만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 인사를 나누고 웃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만나는 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꿈에서는 하도록 하자. 그리고 눈을 떠 아 이것이 꿈이었구나, 하고 알게 됐을 때, 바로 고개를 털지는 말자. 누운 자리에서 혹은 그렇게 앉은 침대 위에서, 조금쯤은 꿈을, 꿈 속의 서로를 생각하도록 하자. 하루를 몽글몽글하게 시작하는 게 나쁘진 않으니까. 그 시간이 혹여 자다 잠깐 깬 새벽이라면, 다시 눈을 감고 한 번쯤 더 만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칸나꽃 분서
절명을 꿈꾼들 저 꽃같이는 심장을 걸 수 없었네
계절은 매번 색다른 변절을 꿈꾸어왔으므로
이제 나를 거쳐간 연애는 미신이 되었다
돌아본들 유산 후에 돋는 입덧 같은 것이었나
꽃 진 자리 화기가 남아 피 더운 까닭은
용서하라, 눈 매워 혈서 한잎 흘려 쓰지 못하는 것을
오로지 그대, 한올 그림자마저 태우고 높이 떠나라
이 여름 다 가고 붉은 두근거림마저 지면
당신 눈짓과 살내를 곁에 두고 오래 잊을 것이라
화대처럼 받아든 이 시간에 불붙이고
연기도 없이 지등(紙燈)타는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라
눈 감으면 흰 빛
살 무르고 눈물 모르던 때
눈 감고도 당신 얼굴을 외운 적 있었지만
한번 묶은 정이야 매듭 없을 줄 알았지만
시든 꽃밭에 나비가 풀려나는 것을 보니
내 정이 식는 길이 저러할 줄 알아요
그래도 마음 안팎에 당신 생각을 못 이기면
내 혼은 지읒 시옷 홑겹으로 날아가서
한밤중 당신 홀로 잠 깰 적에
꿈결엔 듯 눈 비비면 기척도 없이
베갯머리에 살비듬 하얗게 묻어나면
내가 다녀간 줄로 알아요, 그리 알아요
이별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이제 내게는 그렇게까지 혹독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별중이 아닌, 이별을 지나온 상태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러다 또 이별을 맞이하게 되면, 이별은 언제나 혹독한 것이다, 라고 중얼거리게 될지도 모를 일. 그러나 이 시집의 시인에겐 이별이란 언제나, 항상, 지금도 혹독한 일인가보다. 혹독히 앓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둔 흔적이 이 한 권의 시집이 되어 나온 것 같다. 이를 악물고, 아프지만 내가 지금 겁나게 아프다, 고 소리칠 수 없어 대신 시로 표현한 느낌. 나는 시인과 거의 나이차이가 나지 않지만, 다 괜찮다고, 모든게 지워지고 잊혀지는 시간이 원하지 않아도 오고야 만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시인은 그렇겠지, 하고 더는 대꾸하지 않은 채, 또 한편의 시를 써낼지도 모를 일.
시는 감정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시인에겐 그 감정이 넘치도록 많아, 뭔가 제대로 끝맺지도 못한다는 느낌마저 준다. 아니, 그것은 완결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책망이 아니라, 다 쓰지도 못해 기력이 빠졌구나, 라는 느낌. 시인이 아득하고 젖어있어서 덩달아 나까지 아득하게 젖어버렸다. 눅진한 시집, 눅진한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