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영국 정원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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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정원 산책 -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의
오경아 지음, 임종기 사진 / 디자인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아이러니는 이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정원엔 자연스러움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영국의 풍경식 정원은 '자연스럽게'가 아니라 기존의 정형화된 패턴을 깨고 싶어 탄생시킨 또 다른 스타일이었다. 구불거리는 호수는 수천 명의 인부가 삽으로 땅을 파서 만든 인공 호수이고, 우거진 숲의 조화로움은 인간의 힘이 아니면 결코 나란히 설 수 없는 낙엽수와 상록수가 자연보다 더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든 조합일 뿐이다. 그래서 이 정원을 두고 훗날 사람들은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자유로움'의 정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원은 우리가 꿈꾸는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 파라다이스일 뿐이다. 정원이 지극히 자연을 닮고 싶어 하지만 결코 자연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55)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내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지만, 현재의 나는 '전원 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나이 들어 시골 가서 조용히 살고 싶다, 고 말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간혹 만나게 되는데,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그것이 삶에서 휴식을 의미하는 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보지만 그렇다한들 나는 그 휴식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거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부러 시간을 내어 제주도를 찾고, 제주도에서 살기를 원하고 하는 모습도 나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한적함과 고요함 그리고 자연이 주는 풍경이 좀 무섭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내게 너무나 거대하며 웅장하고 친해지기 많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면서도 내가 수목원을 찾고, 공원을 산책하기를 즐겨한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 지 몰랐다. 단적인 예로, 시간을 내어 제주도로 휴가를 가기는 싫은데, 왜 광릉수목원엔 가고 싶을까? 결국은 나도 자연을 원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왜 여기는 되고 저기는 안되는걸까? 왜 저기는 가기 싫고 여기는 가고 싶을까? 이건 어디에서 오는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내가 원한건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란걸 알게 됐다. 내가 공원을, 수목원을 더 좋아하고 또 그런 곳을 찾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는 것은, 그것들의 배경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 책속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정원들 역시 그랬다. 나는 시골에 가서 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이 책에 나온 정원들을 산책하기 위해 인생의 어느 한 부분쯤은 기꺼이 뚝- 떼어낼 의향이 있는거다. 사람들이 만들어둔 연못을, 사람들이 심어놓은 꽃과 나무를, 사람들이 자신의 팔로 가지치기 한 그 인공적임을, 그 공간들 사이에 의도적으로 둔 바위와 자갈과 벤치를, 나는 경험해보고 싶다. 그것은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심지어 하고 싶은 일이기까지 하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넘기며, 반 년쯤 영국에 머물며 한가로이 이 정원들을 모두 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누리고 싶은 것, 내가 가장 함께하고 싶은 대상, 내가 최종적으로 머물 곳은, 결국은 사람이라고 나는 이제는 결론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와 함께 거닐고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함께 누리는 것도 좋고, 그 아름다움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물론 좋다. 혹여 벤치에 앉아 혼자 사색하거나, 혼자 천천히 걷는 시간 속에도, 그곳이 정원이라면 나는 풀과 꽃과 나무와 바위의 숨결을 맡으며 동시에 인간의 숨결을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점이 내게는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될 것 같다. 안심이 될 것 같다.
영국의 정원들을 천천히 산책하며 호흡하는 날들이 내 인생에 언제고 오기는 올까? 내가 기꺼이 짐을 챙겨 그곳으로 가게 될 순간이 올까? 아침에 눈을 떠 거하게 식사를 하고 편한 복장으로 정원을 찾는 삶. 내리쬐는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벤치에 앉아 과거를 혹은 미래를 가만히 생각해보고, 혹여라도 벌레를 밟아 죽이게 되지는 않을까 조심히 걷는 그런 순간들.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천천히 샤워를 하고, 다정한 사람들과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거하게 술상을 봐서 술을 마시는 그런 사람이, 내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 빌어먹을 나라에서 빡시게 일해봤자 스끼야끼는 먹을 수 없고 고작 황태만 뜯어야 하는 이 현실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을까? 황태가 맛없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십년 이상 직장생활 했으면 스끼야끼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 먹을 수 있어야 되는거 아니야??
그 곳에 가고 싶다. 두 다리에 알이 땅땅하게 박이도록 걷고도 싶다. 종아리에 알이 박이고 허벅지에도 근육이 솟아나면, 레슬링도 할 수 있겠지. 이 모든 게 영국 정원을 반 년간 돌아다니다 보면 가능해질텐데.
그런데 알은 박이는 건가 박히는 건가????
돈만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 순 없지만 돈이 없다면 정원 예술은 절대 꽃필 수 없다. 이것이 정원이라는 예술이 결국은 귀족의 문화를 주심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결코 사거나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시간의 힘이다. 수백 년 습기 속에 피어나는 돌에 낀 이끼, 바람에 부대껴 바람결대로 휘어져 굵어진 고목들, 수만 번은 잘려 안으로 단단해진 생울타리는 돈, 인간의 힘이 아니라 시간의 창조물이다. 그러나 시간은 창조의 힘만 지니고 있지는 않다. 버리고 소멸시키는 힘도 함께한다. 한때는 풍성한 아름드리나무로 정원을 지켰을 고목이 병들어 밑동만 남긴 채 사라지기도 하고, 화려하게 반짝였을 돌계단이 수백 년의 찬이슬에 부식되어 허물어지기도 한다. 정원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이런 시간의 흐름 속에 점점 우리 것이 아닌 시간의 것이 되어간다. 오래된 정원엔 설익은 인간의 손길을 다듬고, 보듬어 만들어놓은 시간이 흐른다. (p.33)
집을 짓는 것도, 정원을 만드는 것도 날 위해서다.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이도 따지고 보면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도, 이제 인간은 자연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더 나아가 우리 손으로 자연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 이 지구라는 공간 속에서 잘 사랑가기 위해서이지, 인간과 관련이 없는 자연 그 자체를 위해서는 아니다. 어차피 우린 철저히 우리를, 엄밀히 나를 위해 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참 ㅏ이러니하지만 지극히 나를 위해 착해져야 하고, 남을 배려해야 하고, 때론 정말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원수조차도 용서해줘야 한다. 남을 위해서라면 결코 할 수 없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낼 수 있다. 왜 정원을 만들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도 결국 나를 위해서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정원을 만드는 것은 본능이다. 내 마당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고, 휴식처를 마련하는 것은 모두 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다. (p.45)
내 정원에 야생 새가 날아오기를 바라는 것도 새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걸 지켜볼 나를 위해서다. 행복한 일은 나를 위한 정원이지만, 정원은 지나가는 사람까지도 즐거움을 나눠주는 고마움이 있다는 것이다. (p.45)
가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지만 정작 필요한 건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다른지 이해하는 일이다. 결코 내가 너의 입장이 될 수 없다는 걸, 절대 우리가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할 때 갈등이 줄어들지 않을까. 역사를 이해한다는 건 그래서 철저하게 우리가 왜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는지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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