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만난 것도 여름이었다. 그 사람이 떠난 것도 역시 여름이었다. (p.206)


















'에쿠니 가오리'의 《하느님의 보트》는 내가 이십대 시절 읽었던 소설이다. 그 당시에 이 소설은 그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었을 뿐, 별다를 게 없었다. 당연히 나는 왼쪽 구판으로 읽었고, 얼마전 다시 읽고 싶어 검색했을 때 오른쪽의 개정판이 나왔다는 걸 알게됐다. 그러나 나는 구판으로 샀다. 책의 표지가 바뀌고 새로 나온것이 그 내용이 달라졌음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 책은, 내가 기억하는 이 내용은, 구판으로 읽어야만 할 것 같아서. 


어디에서였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책의 내용을 다 까먹는다고 할지라도 책을 읽지 않는 것 보다는 읽는게 낫다고. 그건 어떤식으로든 내게 영향을 미칠거라고. 하느님의 보트에 대해서라면 그 말이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고, 특별하지 않았으니 기억에서 아예 지우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이 책의 내용이 자꾸만 자꾸만 생각났다. 사랑하는 남자의 딸을 낳아 혼자 기다리면서, 자신을 떠났던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여자. 아이는 자라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가는 동안, 남자는 돌아오지 않고 그런 그녀는 환상속에서만 숨 쉬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한심하고 어리석게 느껴지는 여자. 


그러나 여자와 남자, 그 둘 사이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밖에서 보이는 것과 그 안으로 들어가 보는 내밀한 속내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만큼 크게 다르다. 남자는 여자에게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널 찾아 돌아올 것이다, 라고 말했고, 여자는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고 또 지나도 그 말을 떠올리며 남자가 자신에게 돌아올거라 믿는다. 엄마를 사랑하는 딸조차 그런 엄마가 '현실'에서 살고 있지 않다고 야속해하고, 그래서 딸은 엄마에게 '나는 현실을 살고싶다'며 한 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 엄마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육개월에서 이년쯤, 그 사이 어디만큼을 살고 그녀는 늘 주거지를 옮겼다. 익숙해지지 않게, 정들지 않게. 익숙해지고 정들어지면 그나 나에게로 돌아올 것 같지 않은 그 불안함 때문에. 자신이 익숙해질 수 있는 건, 그 뿐이었으니까. 그여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생활환경을 바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다닌 게, 그녀에겐 타당한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언정, 어린 딸에게는 자꾸 전학만 다니게 하는 터라, 보는 나역시도 몹시 불안하다. 아이를 위해서 당신의 환상을 포기하라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 나 역시 그녀에게 현실을 살라고 따끔하게 충고라도 하고 싶다. 그러나 나라면, 만약 나라면? 내가 '혼자' 였고, 이런 상황에 놓였다면, 나 역시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또다시 저곳에서 저 먼곳으로. 그러니 내가 그녀에게 어떻게 '이제 그만 정착하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여전히, 그녀를 떠날 당시의 그의 눈빛과 그의 말을 믿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남자들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새로운 사랑에 빠질 때는 이 놈은 다른 놈들과 달라, 라는 생각에 한껏 들뜨지만, 지내다보면 역시 그들중 한놈이다. 그러니 나는 그녀가 기다리는 그남자가 특별한 남자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그녀를 떠나지 않고 그의 곁에 머무르면서 같이 아이를 키워나갔다면, 오히려 정나미가 떨어졌을 수도 있고 꼴도 보기 싫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떠났다. 가장 사랑하던 순간에 떠났다. 사실 사랑하던 순간조차 그와 그녀, 모두 자유로운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했기에 그 사랑이 더 안타깝고 간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사실 그를 향한 그녀의 사랑에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아닌 다른 어떤것들이 더 첨가되었다고도 생각한다. 안타까움과 갈망과 아쉬움 같은 것들이.



그러나 그것들이 더 첨가되었든 어쨌든, 그것은 내 생각일뿐 나의 사랑은 아니다. 내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사랑이다. 재혼을 생각하지도 않고 연애도 피하면서 한결같이 그만 기다리는 그녀의 사랑.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그녀는 행복하겠지만,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때문에 지쳐가기도 할것이다. 게다가 옆에서 항상 그녀의 편이 되어줄거라 생각했던 딸이 자라면서 그녀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녀는 이제 외롭다. 그를 기다리는 것, 그건 어리석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지 말아야 했을까. 내가 허공에 붙들려 발을 땅에 디디지 못하고 있나, 그를 믿는게 잘못된것일까, 그는 어디서든 나를 찾아 돌아온다고,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 나는 반드시 당신을 찾아낼 거야. (p.183)





나는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놈이고 다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어떤 남자들의 어떤 말들은 믿고 싶어지고 믿게 된다. 어쩔수 없다. 나는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놈이고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말에 마음을 담지 않는 남자들을 보아도 크게 실망하진 않는다. 저자식, 말뿐이군, 하고 코웃음 한 번 치면 끝이다. 그런 놈은 한둘이 아니니까. 새삼 실망스럽지도 않다. 그렇기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는 그를 믿어' 라고 말한다면,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나역시도 누군가의 어떤 말들에는 가슴속에 굳건한 신뢰와 사랑이 싹트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보다는 사실, 나는 내 자신을 믿는편이 더 속편하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너를 기다릴거야' 라고 말하는 놈은 믿지 않지만, 나혼자 내심 '그를 찾아가리라' 라고 다짐하는 편이다. 나는 확실히 세상의 대부분의 남자들보다는 말에 더 무게를 싣는 편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의 많은 남자들보다는 내가 더 약속을 잘지키고, 내가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나를 믿는다. 내가 하겠다고 하는 것을, 나는 할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찾아가고 싶은 사람을 내가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우리는 반드시 한번은 다시 만날것이고, 그 날의 만남은 또 앞으로 긴긴 세월을 버티게 해줄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환상을 산다. 그러나,




- 나를 믿어. 한순간이라도 의심하지 말고. 나는 반드시 당신을 찾아낼 거야. 당신이 어디에 있든. 지금은 잠시 헤어져 있어야 하지만 내가 어디에 있든, 당신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함께 있는 거야. 그리고 나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곧.

곧. (p.209)



이 환상이 나로 인해 지탱되는 것이었다면, 내가 다른 누구도 믿지 않고 오로지 나만 믿으며 환상 속에 잠시동안 들어가있는 거라면, 그 환상속에서는, 사실, 다른 누군가를 믿어도 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지 뭐, 라고는 하지만, 어떤 놈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 '믿으면', 어떻게 될까. 내 환상속에서 내가 나를 믿는게 아니라 그를 믿는다면, 앞으로 어떤 시간들이 펼쳐질까.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사실은 뻔하디뻔한 통속소설을 읽으며 하염없이 생각에 잠기고 또 잠기는 것이다. 그러자 이 책을 읽기 전날밤의 꿈이 떠올랐다. 그 꿈 때문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그렇지만 그 꿈을 입 밖에 내는 일은 삼갈것이다. 그 꿈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나는 환상을 사는 여자가 되므로. 에쿠니 가오리 소설속의 등장인물이 되어버릴 테니까. 나는 현실을 살아야 하고, 현실을 살테니까. 환상을 사는 건 가끔 은밀히, 아무도 몰래, 나 혼자 해야지. 조용히, 쥐도 새도 모르게.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여름에 다가오고 여름에 떠나갔던 사람이. 겨울, 남색 코트를 입었을 때도 그는 있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는 늘상 여름이었고, 그렇게 계속 여름이기만 한 사람이. 여름에 다가오는 사람은 여름에 떠나는 것이 숙명일지도 모른다고, 잠깐, 에쿠니 가오리 때문에 생각했다.  사람을 만난 것도 여름이었다. 그 사람이 떠난 것도 역시 여름이었다, 라고 에쿠니 가오리가 말했기 때문에. 



낮과 밤의 일상들 속에 잠시잠깐 환상이 들어오고, 잠 속에도 환상이 들어오고, 머릿속에도 가끔 환상이 침략한다. 마음속에는 내내, 환상이 있다. 내가 현실을 단단히 잘 버텨내고 있는 이유다.




어제는 몇차례나 거울을 보며 내 코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토요일에 만난 친구가 내게 '니 코가 예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고 해서. 아니, 이게 뭔말이야. 세상에 코가 이쁘다니. 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친구는 그럴 리가 없다고, 어떻게 그 말을 한 번도 안 들어봤냐고 했다. 그래서 어제 계속 거울로 내 코를 보면서 으응, 내 코가 이쁜가? 그냥 큰 거 아닌가? 하고 자꾸만 자꾸만 봤다. 코가 이쁘다니, 뭔가 좀 멋지잖아? 지금도 잠깐 손거울로 코를 봤는데, 이쁘다기 보다는..개기름이 흘러 번쩍번쩍 하구먼..;;


그러다 불현듯이, 갑자기 떠올랐다. 스물다섯살에 사귀던 남자, 그 남자가 사귀기 전에 나한테 코가 예쁘다고 말했다는 사실이. 맞어, 코였어. 코가 이쁘다고 했었어!! 하하하하하하. 배고프다.








아니, 그런데 제이슨 므라즈가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그렇지 7월15일에 배송될거면서 벌써 예약판매 진행중이라니. 놀랍습니다!

내 기쁜 마음으로 듣겠지만, 그래도 45일전부터 판매되다니, 이건 좀, 거시기하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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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6-0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냉정과 열정사이, 낙하하는 저녁, 반짝반짝 빛나는, 울 준비는 되어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이렇게 읽었네요.
그런데 역시나 전혀 기억이 나질 않네요 흥..

2.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이 하는 약속도 잘 안 믿습니다만....

3.거봐 코 이쁘다니까요*^^*

다락방 2014-06-02 13:16   좋아요 0 | URL
사랑합니다 아무개님 ^______________^

아무개 2014-06-02 15:07   좋아요 0 | URL
저도 다락님을 격하게 애정하지만,
이런 댓글을 원한게 아녔는데...

아무개님도 OO이 이뻐요. 뭐 이런거? 응? 응?

눈썹이라고 할꺼죠?
눈,코,입 다 빼고 눈썹. 맞죠? ㅋㅋ

졸려서 헛소리를.......ㅡ..ㅡ:::::::::::::::::::::::::::::::

다락방 2014-06-02 15:10   좋아요 0 | URL
으응? 지금 딱히 생각이 안나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3

아무개 2014-06-02 15:28   좋아요 0 | URL
형 미워!!!!!!!!!!!
ㅜ..ㅜ

자작나무 2014-06-03 09:44   좋아요 0 | URL
난 이사랑 반댈세.

다락방 2014-06-03 09:5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개님과의 사랑...말씀이십니까? ㅎㅎㅎㅎㅎ

자작나무 2014-06-03 11:04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 여름에 만난 남자, 스물다섯에 만난 남자, 그리고 기타 연관된 남자들.
그 모두와의 사랑에 반대 합니다.

다락방 2014-06-03 11:10   좋아요 0 | URL
아니 이 분이! -_-

자작나무 2014-06-05 09:38   좋아요 0 | URL
네 이 분입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