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사랑한 그림 - 현대미술가들이 꼽은 영감의 원천 152점
사이먼 그랜트 엮음, 유정란 옮김 / 시그마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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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대미술가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작품과 예술가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책속의 현대미술가들이 '그림'에 꽂혀 그들의 감상을 풀어냈듯이 글을 쓰는 작가들은 누군가의 글을 읽고 자신만의 감상으로 자신만의 감동에 이르기도 할 것이다. 비단 예술가들만 그런건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평범한 사람도, 예술이란 직업에 종사하고 있지 않음에도 하나의 그림에, 음악에, 글에 깊은 감동을 받아 아, 나도 이렇게 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품을수도 있고 앞으로 내 삶에 자꾸만 그것들이 파고들어 말과 태도와 행동과 사고방식 전체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감상은 오롯이 '나만의 것' 이다. 하나의 작품이 평론가들로부터 어떻게 평하여진들, 내가 보고 내가 느끼는 것, 그것이 내게로 오고 내게로 스며든다. 그러니 그것이 세상으로부터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것이든 혹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든, 내게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나로 말하자면, 영화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에서 여자주인공이 보았던 그림 '에밀프리앙'의 「고통」이 꽤 인상깊었고, 줌파 라히리나 코맥 매카시의 글들을 만났을 때는 위에 빨간 줄을 그은것처럼 '순수한 기쁨과 흥분'을 느꼈다. 그 우아함과 세심함에 넋이나가 이렇게 되고 싶지만 결코 내가 이를 수 없는 곳에 그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문학을 읽는데 그들은 항상 기준이 되곤했다. 그 기준은 누가 만들어준게 아니라, 역시 내가 만들어놓은 기준이었다. 아무도 이렇게는 할 수 없고, 나는 이렇게 되고 싶다, 하는.



각설하고, 나는 이제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며 현대미술가들이 누구의 어떤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었는지를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당황스럽다. '토마 압츠' 와 '에이야 리사 아틸라'가 영향을 받았다는 '이토 자쿠추'의 병풍 그림과 '피카소'의 추상화는, 하아- 내가 이해하기도 감상하기도 멀게만 느껴지는 곳에 있다.







나는 이 작품들에서 무엇을 느껴야할지, 대체 뭘 느꼈다는건지 책의 본문을 읽으면서도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니 감상과 감동은 오로지 자기몫이란 것이 자명한 사실 아닌가. 어느 한 순간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바꿨을지도 모를 작품들을 보면서 아무런 느낌을 받지도 못한다는 것은, 답답하면서도 동시에 짜릿함을 가지고 온다. 모두에게 같은 작품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세상이라니, 이 얼마나 재미있고 개성이 넘친단 말인가. 나는 뚫어지게 쳐다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작품들이라니.




뭐니뭐니해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현대의 작가들이 자신이 영향을 받았다는 작품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냈느냐에 있을 것이다. 내게 가장 인상깊은 미술가는 '그레고리 크루드슨' 이었다. 그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데, 그런 그가 만들어낸 작품이 정말이지 인상적이고 아름답다.




위가 에드워드 호퍼의 [오전11시], 아래는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무제]. 아, 밑의 작품이 너무 좋다. 쓸쓸하고 처연하고 홀로 앉아있는 게 두렵기까지 하다는 느낌을 준다. 호퍼의 그림이 쓸쓸함과 외로움을 전해준다면 그레고리 크루드슨은 거기에 두려움을 더한듯하다. 이 그림이 무척 인상적이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위는 '조르주 쇠라'의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아래는 '빌헬름 사스날'의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빌헬름 사스날의 이 그림은 이 책의 표지로도 사용된 그림인데, 고백하자면, 나는 이 그림인 이 책의 표지가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게는 그다지 아름답게도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인상적이지도 못해서 이 책에 대한 사전정보없이 이 책을 봤다면, 전혀 관심을 줄만하지 않은 그런 표지였다. 








위는 '김정희'의 [겨울 풍경], 아래는 '서도호'의 [서울집/로스앤젤레스 집/뉴욕 집/ 볼티모어 집/런던 집/시애틀 집/로스앤젤레스 집]. 


김정희는 몇 가닥 선으로 집을 그려 고독과 적막을 표현했다. 그런 점이 내 가슴을 언제나 울린다. 집은 복잡한 공간이 아니다. 지극히 단순하면서 절제된 공간인 것이다. (p.161)


작품만 놓고 보면 이 작품이 어떻게 저 작품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렇듯 그들의 설명을 들으면 그 의문이 조금은 풀린다. 우리가 어느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했을 때, 그건 그 작품의 전체가 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어떤 특징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 특징 역시, 내가 찾아내고 내가 잡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져가는 것.








위는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아래는 '에드 루샤'의 [불타는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이 작품이야말로 가장 의아했다. 아니, 저 오필리아에서 어떻게 이런 작품이 나오지? 저 초록빛, 저 빛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걸까? 설명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멘붕에 휩싸였을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역시 예술가, 내가 보는것과는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오필리아의 몸이 물에 대각선으로 떠 있는 구도를 작업에 차용하기도 했다. 사실 이 구도는 내가 미술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구도, 즉 탁자의 윗면을 보듯이 사물을 바라보라는 관점과 연관을 맺는다. 나는 <오필리아>에서 직잡적인 영향을 받아 몇몇 그림이나 사진을(예를 들어 1967년 사진인 <34개의 주차장>) 만들기도 했다. 예컨대 나는 <불타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을 그리면서 <오필리아>에서처럼 위에서 건물을 내려다보는 각도를 사용했다. (pp.140-141)



오필리아로부터 비롯된 미술관이라니, 예술엔 한계란 없는게 아닌가!



<오필리아>를 보면 여러 면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런던을 갈 때마다 이 그림을 꼭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또 그런 생각이 들면 기분이 좋다. (p.141)



나는 가끔 줌파 라히리의 글을 생각한다. 「지옥 천국」을 아주 많이 생각하고 때때로는 「섹시」를 생각한다. 『올리브 키터리지』를 떠올리고 다니엘 글라타우어 생각을 하기도 한다. 「컷글라스 보울」생각도 많이 하고, 이런 작품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이런 작품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 





이 책을 읽다 알게 된 뜻밖의 사실. 우리가 알고있는 위대한 문인들이 위대한 화가이기도 했다는 것.





위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병든 장미], 아래는, 오, 믿을 수 없게도,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다. 빅토르 위고의 [머릿글자가 V. H. 인 문어]. 블레이크의 작품은, 마치 그의 시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그림이다. 처음 목차에서 '빅토르 위고'를 보았을 때, 아, 이 위고가 내가 아는 그 위고가 맞단 말인가, 하고 헐레벌떡 찾아 읽었다. 



빅토르 위고가 없는 19세기는 상상할 수도 없다. 그만큼 위고는 당시 문학계에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레 미제라블』과 『노트르담의 꼽추』를 읽었지만 지금은 위고의 문학보다는 그의 그림이 더 친숙하다. 위고가 그린 스케치와 수채화를 1998년 뉴욕 드로잉 센터(Drawing Center)에서 처음 접한 이래로 그의 다른 그림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p.134)



나로서는 위고의 그림을 보는 것 보다는 그의 책을 읽는 쪽을 택할것이고, 확실히 저 그림보다는 그의 소설들이 내게 더 강한 감동을 주었지만(솔직히 저 그림은 내게 아무 느낌도 주지 않는다), 누구나 저마다의 감동받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다행스런 일로 여겨진다. 그 작품들은 단지 그 순간의 놀라움과 경탄을 자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살아가는 방향까지 제시하기도 한다.




우선 분명한 점은 미술가가 작품에서 느낌 감정은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p.8)



다시 말하지만, 비단 그림 뿐만이 아니다. 음악이, 그리고 글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나는 소설들을 읽으면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상황들을 접해보았고, 그렇게 감탄하다가, 세상을 내가 보아왔던 것과는 조금 더 넓게 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그것이 문학 작품이 내게 한 일이다. 나에게 문학작품이 방향을 제시해준다면, 미술가들에겐 그림이 그러했다. 재미있게도 어떤 미술가가 영향을 받은 그림의 작가가 내게는 글로 다가오기도 했다. 세상에 예술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건 바로 이때문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예술을, 감상하는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감동한다. 


천천히 두고볼 책이다. 틈나는대로 펼쳐 이 사람은 이 작품의 어디에서 그토록 감탄한 것일까, 하는 걸 읽어보는 재미도 있고 그와는 별개로 실린 작품들 중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한껏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무엇보다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감동했던, 그러나 내가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작품들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새로운 재미다. 나는 언제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제대로 감동할 줄 아는 사람들을 보는 게 퍽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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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민하고 지르기
    from 마지막 키스 2014-03-17 13:17 
    《화가가 사랑한 그림》이란 책에서 '빅토르 위고'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단 사실을 알게됐는데, 엊그제 신문에서 이 책의 출간소식을 접하고 오늘 목차를 훑으며 '빅토르 위고'를 찾았다. 그리고 역시나, 그가 거기에 있었다. 빅토르 위고 만으로도 나는 이 책을 관심책으로 리스트에 넣어뒀는데, 아하하하 존 업다이크와 존 버거, 잭 케루악, 커트 보네거트등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인다. 작가들이 그린 그림이라니,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그림까지 잘 그리기도 했다
 
 
네꼬 2013-10-28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까지 사란 말입니까! (최근 그림 관련 책들을 쓸어 담았는데.. ㅠㅠ )
그나저나 저는 다락님이 떠올리는 문학 작품들도 모르는 처지라, 다락님도 위대한 예술가 같아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논리가 이상한 것 같지만, 어쨌든 다락님이 대단해 보인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다락방 2013-10-28 18:13   좋아요 0 | URL
나는 그림을 전혀 모르는데 말이죠 네꼬님, 이런 책이 책장에 딱 꽂혀있으면 그냥 막 신나요. 내가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기분에 따라서 그날그날 꽂히는 그림이 다를거에요. 그쵸? 그림책을 책장에 꽂아두다보면 언젠가는 좋아하는 그림, 위로받는 그림이란 것도 생기겠죠?

저 역시 네꼬님이 엄청 읽는 어린이책에 대해 하나도 모르잖아요. 우리는 우리가 관심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아는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글 잘쓰는 네꼬님이야말로 더 대단!!

페이퍼 내놓으시오, 그도 아니면 리뷰라도!!

heima 2013-10-28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다락방님 :) 다락방님의 책(지름)권유는 정말 대단해요.
어제 올리브 키터리지를 다시 읽었는데, 여전히 찡-하더라고요. 읽으면서 다락방님을 잠시 떠올렸답니다.

다락방 2013-10-29 10:32   좋아요 0 | URL
저는 헤이마님 덕에 [다시, 그림이다] 준비해놓고 있습니다!! 그 책 엄청 좋아보여요. 희희.

올리브 키터리지도 줌파 라히리도, 가끔 꺼내서 아무데나 펼쳐서 다시 읽곤 해요. 좋죠.

자작나무 2013-10-29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 님의 포스팅은 미술책에서 절정을 이루는 것 같네요. 감탄.

다락방 2013-10-29 10:33   좋아요 0 | URL
아, 자작나무님. 저는 그림을 잘 볼 줄도 모르고 그림을 외우지도 못해서 미술책에 대한 포스팅은 정말이지 자신이 없고 써놓고도 메롱메롱인대 절정이라뇨 ㅠㅠ 오해십니다 ㅠㅠ

자작나무 2013-10-30 08:46   좋아요 0 | URL
락방 님. 미술감상책도 한번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 구입할 거예요.

다락방 2013-10-30 10:17   좋아요 0 | URL
무슨 그런 말씀을. 말도 안돼요 ㅠㅠ

dreamout 2013-10-29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빌헬름 사스날의 저 표지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구입했었더랬죠. ^^

다락방 2013-10-30 10:19   좋아요 0 | URL
아 그래요? 저는 이렇게 좋은 그림들이 많은데 왜 이 그림으로 했을까? 궁금하더라고요. 저는 약간 으시시 하긴 하지만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저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호퍼의 영향을 받았다는 미술가요. 뭔가 환상적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