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지진이라면
여보세요, 떠나겠다는 나의 결정이 나는 두려워요. 당신으로부터 먼 곳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당신이 지진이라면 먼 곳에서 지진이란 무엇일까요? 호숫가의 오리들도 놀라지 않아요. 나는 낮잠을 깨지 않아요. 네 시간 다섯 시간이 흘러가요. 나의 낮잠은 비뚤어진 입을 틀어막고 한량없이 귀가 커져요. 펄럭이는 귀는 검은 밤에 젖어요. 귀가 커다래지니까 이곳이 얼마나 조용한 곳인지 알겠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내가 옛날 전화기를 들고 있다면 검은 전화선을 따라 수억 개의 지붕 위를 건너 텔레파시의 화신처럼 나타날 수 있을까요. 옛날 연인들은 전화선을 손가락에 감거나 목에 감았어요. 주술 같은 것이었어요. 허공을 만지는 일도 그런 걸까요? 허공에 대해 공부했다는 한의사는 내게 생활 습관을 고치라고 말했어요.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밥을 먹고 그리고 허공을 자꾸 만지지 말라고 했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귀를 막은 채 비명을 지르지 말라고 했어요. 침을 맞으라고 했어요.
나의 아침에 당신은 저녁 8시예요. 당신의 새벽에 나는 오후 2시예요. 먼 곳, 먼 곳, 먼 곳을 향해서 당신이라고 부르는 오후 2시에 나는 또 손이 저려요. 오후 3시에 침을 맞아요. 식전 30분에 나는 한약을 먹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는 먼 곳의 지진을 느끼지 못해요. 먼 곳에서 당신이 죽을까 봐 두려워요. 당신이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는데 나는 슬퍼하지도 못했을까 봐 진짜 두려워요.
지난 주말에 에피톤프로젝트 콘서트에 다녀왔다. 그가 「시차」란 노래를 불렀을 때, 나는 김행숙의 위 시가 생각났다. 김행숙이었던것 같은데, 내가 산 시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시차가 꽤 크게 느껴지는 곳의 사람을 사랑했던 시가 분명 있었는데. 시집을 꽂아둔 책장 앞으로 가서 차례대로 시집들의 제목을 읽었다. 역시 김행숙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꺼내들고 한 장 한 장 다시 넘겼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문장들로 가득한 시들 속에서 당신이 지진이라면, 이란 제목을 본 순간 앗! 이걸거야, 이걸거야! 했다.
지금쯤 그대는 몇 시를 사는지?
오랜만에 먹는 아침이
가벼워진 나의 마음이 꽤 좋아 보여
느긋한 트램을 타고서 달리면
옆 자리의 꼬마 아이도,
좁은 골목길의 모습도 꼭 그림 같아
아직은 멀기 만한 나의 시간이
졸린 눈을 비비게 해도
스쳐가는 많은 것들을 다 끌어안고
지금쯤 그대는 몇 시를 사는지?
오랜만에 먹는 아침이
가벼워진 나의 마음이 꽤 좋아 보여
지금쯤 그대가 몇 시를 살던지
누구와도 같지 않으니
누구라도 다른 거니까, 큰 걱정 말고 -에피톤프로젝트, 시차
내가 사는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곳의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어떤걸까. 거기엔 어떤 낭만이 있을까.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보는 달을 그는 지금 볼 수 없다는 것. 달 봤어요? 아주 커요, 소원을 빌어도 좋겠어요, 같은 말을 내가 지금 전화기를 붙들고 말해보았자, 혹은 문자메세지로 딩동- 하고 보내봤자 그곳에서는 아직 달이 뜨기 전이거나 이미 달이 사라지고 난 뒤일텐데. 그래서 시무룩해질 즈음, 이런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그러나 만약 내가 오늘 밤하늘엔 별이 무척 많았어요, 쏟아질듯이. 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렇다면 나도 오늘 밤엔 고개를 들고 별이 얼마나 많은지 확인해볼게요, 라고 대답할 수 있을테고, 그렇게 자신의 시간에서 밤이 오기까지 내내 밤이 오면 별을 봐야지, 하고 나를 생각하고 염두에 두는 시간이 더 길 수 도 있으리란 생각.
베가본드란 만화에서 주인공이(이름이 생각안나..) 안보이면 잊혀질 줄 알았더니 가슴에 더 선명하게 새겨진다고 했다던 말이 생각났다. 멀리 살기 때문에, 열세시간쯤을 날아가야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열세시간을 날아가기 위해서 비행기표를 할부로 긁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를 자주 볼 순 없겠지만, 한 번 보게 되면 그만큼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겠지, 볼 날만 내내 기다리며 지내겠지.
그렇지만 김행숙의 시, 당신이 지진이라면, 저 시의 마지막 연 때문에 다시 슬퍼진다. 나는 먼 곳의 지진을 느끼지 못해요. 먼 곳에서 당신이 죽을까 봐 두려워요. 당신이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는데 나는 슬퍼하지도 못했을까 봐 진짜 두려워요. 먼 곳에 그가 있는데, 먼 곳에 있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그와의 연락 뿐이라면, 그런데 그와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그가 아프다면, 그가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췄다면, 나는 이 곳에서 발만 동동 굴러야 하지 않을까. 그게 슬프다. 아무도 내게 그의 소식을 대신 전할 수 없으니 그의 안부를 내 머릿속에서 썼다지웠다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 슬퍼해야 할 때, 제 때 슬퍼하지 못할거란 사실이 더 슬프다.
남자는 파리를 사랑하고 파리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남자의 약혼녀는 남자가 헐리우드에서 일하면서 말리부에서 살기를 원한다. 여자는 남자가 돈벌이도 안되는 소설을 쓴다는 게 못마땅하고, 친구의 애인처럼 모든것에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남자는 파리 거리를 산책하기 원하고 여자는 온갖 관광명소를 다니며 설명을 듣길 원한다. 그런 남자에게 1920년대에 만난 매력적인 여자가 묻는다.
그녀를 사랑하죠?
남자는 대답한다.
사랑해요.
사랑하는 것 같아요.
결혼하면 사랑해야겠죠.
남자는 자신의 사랑에, 자신의 결혼 상대에 대해 확신이 없다. 대답의 강도는 점점 약해진다. 여자는 다시 묻는다. 그래도 그녀와 중요한 것에 있어서는 공통된 의견을 보이지 않나요? 남자는 대답한다.
사소한 것에서는 잘 맞죠. 인도음식을 둘다 좋아해요.
아니 사실 인도음식을 둘다 다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 난 이라는 빵, 그건 둘 다 좋아해요.
생각해보니 둘에게는 사소한 것조차 공통된 게 거의 없다.
남자가 바라보는 세계, 남자가 꿈꾸는 세계가 여자가 바라보는 방향과는 완전 틀어져있다. 남자는 길을 가다가 콜 포터의 음악이 들려오면 멈춰야하지만 여자의 귀에는 콜 포터의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 남자는 헤밍웨이와 피카소를 만났다는 사실에 흥분을 해서 그 기쁨을 전하고 싶지만 여자는 내일 관광을 위해 오늘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이런 둘이, 과연 사랑을, 결혼 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을까?
영화의 초반, 남자가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1920년대의 파리로 돌아가 헤밍웨이를 만났을 때, 내가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었기 때문에 더 재미있고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알어, 알어, 저랬지, 저랬어!! 중간에 남자가 '파리는 날마다 축제란 말도 있잖아' 라며 영어로 Moveable Feast 라고 하는데, 아우, 이건 내가 저 책을 읽었으니까 아는거야, 하면서 막 으쓱으쓱. 움화화화핫.
사랑에 있어서는 거리가 큰 방해물이 되진 않는다. 열세시간을 날아가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반면 함께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도 사랑이 완성되진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이 같지 않다면 함께 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게 바로 사랑의 가장 큰 위대함일지도 모르겠다. 거리와는 상관 없다는 것. 아울러 이 영화속처럼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 2000년대의 남자가 1920년대의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하다니, 사랑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이 시대를 뛰어넘어 가능하겠는가. 내가 이 시대를 살고, 여기에 살고, 이 나이를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거, 그래서 사랑이 다른 무엇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뜬금없는 영화속 남자에 대한 불만 한 가지. 아니, 길, 대체 왜! 핏츠제럴드가 아니라 헤밍웨이한테 더 흥분하는거죠? 네?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