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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멘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1년 10월
평점 :
언젠가 친구와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좋지 않은 과거가 있음을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지금 너는 나를 친구로서 괜찮게 여기고 있지만, 만약 내가 과거에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걸 알게 되면 나를 싫어하게 될거라고, 나에게 실망을 할거라고. 나는 구십구프로 그렇게 확신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그것에 대해 얘기하지 못했다. 그 일은 그 시절의 내 친구들만이 알 뿐이고, 그 친구들은 그때 그것이 옳지 못했음을 알면서도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주었다. 그때 당신에 내게 이야기 했다한들 나는 내 선택을 밀고나갔을테니까. 그리고, 그것이 내 선택이었으니까. 메신저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는 '그 모든 과거의 순간이 지금의 너를 만들었다'고 얘기를 해주었고, 그 때, 나는 어쩌면 내가 과거에 저질렀던 혹은 나에게 일어났던 좋지 않은 일들이 지금 나를 만든거라면, 그래, 여전히 그것들은 내게 상처이고 죄책감이지만 그나마 아픈 마음은 조금 줄어들어도 좋지 않겠는가, 했다.
처음부터 나랑 삐걱거리는 이 소설은 뒷부분의 이런 구절이 없었다면 별을 두 개밖에 주지 못했을 것이다.
구겐하임미술관, 페라리 전시장, 5성급 호텔들. 도시는 이렇게 될 수 있다. 골격은 그대로라도 한때의 모습을 허물처럼 벗어던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인간도 겉모습을 바꿀 수 있다. 살을 빼고, 근육을 키울 수 있다. 아니, 그 반대로 살을 찌울 수도 있다. 옷으로 자기 이미지를 표현할 수도 있다. 부를 나타낼 수도 있고, 자신감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인간도 도시처럼 겉모습을 싹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을 존재하게 만든 과거의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다. 복잡한 인생의 순간순간이 수없이 모여 이루어진 이야기. 즐거움과 두려움, 의욕가 무기력, 빛과 어둠.
그동안 살면서 겪은 일들이 모여 존재하는 게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그 모두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결핍된 것, 간절히 바랐지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 전혀 바라지 않았지만 결국 가지게 된 것, 찾아내고 잃어버린 것. 그 모두를. (pp.572-573)
우리는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알람시간에 맞춰 일어날 것인가 더 잘것인가, 버스를 탈것인가 지하철을 탈것인가, 부터 회사를 계속 다닐것인가 그만둘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내 마음을 고백할 것인가 숨길것인가, 이 연애를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도 물론. 그 순간들의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어떤 것들에 아파하고 어떤 것들에 행복해하는 내가. 술과 고기를 먹고 싱글이며 회사원이고 책을 읽는 지금의 나는, 조금 더 내밀하게 보자면 강압적인 걸 싫어하고, 타인의 사적인 영역에 함부로 다가가는 걸 싫어하는 나는, 지금까지의 내 선택이 만든것이었다. 이 삶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빅 픽쳐』, 『위험한 관계』 다음으로 이 『모멘트』를 읽었는데, 어째 갈수록 별로인지 모르겠다. 이 책은 특히나 더글라스 케네디의 최근작이라고 하는데, 이게 최근작이라면 앞으로의 작품은 안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진다. 왜 최근작이 제일 별로인걸까..
'이 여자는 아픔을 안다. 하지만 겉으로는 기죽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 한다.' (p.117)
이런식으로 처음 본 사람에 대해 모든걸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부분이 계속 툭툭 튀어나오는데, 눈빛이나 말투를 처음 접하고 뭘 그렇게 사람을 잘 보는지, 원, 좀 기가찼다. 난 자고로 '너같은 타입은 내가 잘 알지' 하는 건 질색팔색이라. 여태 내가 읽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캐릭터중 제일 흥미가 떨어지고 오히려 반감조차 생기는 인물이었다.
끝까지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은 진짜 별로였을텐데,그동안의 작가의 책들에서 그랬던것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소한-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감정들에 대해 잊지 않고 이야기해주고 있어서 조금 나아졌다. 슬쩍, 눈물이 나기도 했으니까.
집에 더글라스 케네디의 책이 한 권 더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