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며칠을 지냈다.
사실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이런 자리가. 사무실 내 책상은 언제나 저 상태. 옆에 코 닦은 휴지도 보이고 ㅎㅎ 저기 어딘가를 뒤져보면 며칠전에 후렌치 후라이를 찍어 먹던 일회용 케찹도 있다. 바닥은 차마 찍지 않았지만 바닥에는 갈아버려야 할 종이가 수두룩 하다. 나중에 한꺼번에 갈자 싶어서 그냥 막 바닥에 버린다. 늘 이런 자리에서 일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을 시간에 맞춰 제대로 하고 있다니. 진정한 능력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
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하다가 마침 연휴가 시작될 것이고 또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나는 이걸 풀어야 돼, 라는 생각에 도달하여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기 전, 마트에 들러 이것들을 샀다.
저걸 들고 오면서 어찌나 팔이 아팠는지. 내가 저걸 사가지고 와서 식탁에 차례대로 올려두자 엄마랑 남동생은 나더러 진짜 바보 같다고 그랬다. 전화해서 남동생한테 들어달라고 하지 저걸 다 들고 왔냐고. 뭐, 십분정도 걷는거고 다 내가 마실건데 전화는 무슨. 하하. 물론, 나는 인간인지라 그날 밤 저것들을 다 마시지는 않았다.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은 니 팔자인가보다, 라고 아빠 엄마가 내게 말했었는데, 정말 그런가보다. 나는 중고서점에 가서 책을 팔고 싶은 미친 욕망에 시달리다가 결국 토요일, 책 열권을 들고 나갔다. 그냥 열권이 아니다.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과 이클립스, 브레이킹 던 같은 무거운 책들 포함. 그걸 들고 지하철역까지 십분을 걸어 지하철을 타고, 다시 내려서 한참을 걸어 중고서점에 가서 책을 팔고 돈을 받아 쥔 기쁨도 잠시, 팔이 후달렸다. 곧 술을 마시기로 예정되어져 있었는데 이 후달리는 팔로 술잔을 들 수 있을까 심히 걱정될 정도였다.
총 41,900 원. 그걸 받겠다고 저 무거운 책을 들고 종로바닥을 걸었다니...토할 것 같다. 팔려고 책장 바깥으로 꺼낸 책이 백권이었는데 이제 겨우 열권을 팔았을 뿐이다. 나머지 90권을 어째야 하나...계속 이렇게 들고 다녀야 하나... 하여간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팔았다. 가장 먼저 이 책을 팔고 싶었는데 속이 다 시원하다. 이제 뭔가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미친 기분까지 든다.
친구를 만나 술집에 들어갔는데 다섯시부터 오픈이라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네시 사십분. 그냥 이십분전에 앉게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_- 할 수 없이 친구와 나는 서점에 갔다. 소설과 에세이 코너를 둘러보다가 나는 시집 코너로 갔다. 기형도의 시집이 보였다. 마침 언젠가 한 친구가 대전의 한 술집에서 기형도의 「빈 집」 이란 시를 얘기했던 기억이 떠올라 나는 시집을 넘겨보았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고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거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란 구절을 친구는 내게 말하여 주었었다. 나는 이 시의 전문을 읽었던 기억이 없었지만 그 구절만큼은 여기저기서 많이 보았던 것 같았다. 2011년 10월의 첫날 토요일 오후, 나는 종로에서 이 시를 읽어보게 되는구나. 술집이 나를 받아주지 않은 관계로.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에 갇힌 사랑도 가엾고, 사랑을 가둬 둔 빈집도 가엾고, 빈집에 갇힌 사랑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조차 가여워진다.
그리고 김경미 시인의 시집을 발견. 오, 살까? 나는 잠깐 머뭇거렸지만, 또 이 시집을 사면 나는 어차피 한두편만 좋아하고 말지 않을까 싶어서 관두자 싶었다가 그래도 한두편이라도 마음에 들면 사야되는거 아니야? 싶었다가, 어쨌든 넘겨 보았다.
첫눈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린 어제가 쓰라리다
줄곧 평지만 보일 때 다리가 가장 아팠다
생각을 안했으면 좋겠다
곧 첫눈이 올텐데, 고통을 달래는 순서, 라니. 이 시집은 제목 때문에 사야 되는거 아닐까? 고통을 달래는 순서라니. 어제를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고 가슴을 짓이겨 버리고 싶은 심정과, 눈 앞에 언제 끝날지도 모를 평지만 보여 주저 앉고 싶어지는 마음 때문에, 나는 올해 첫눈이 오면 이 시를 떠올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첫눈이 오는 날, 나는 슬프고 싶지 않다. 기쁘고 싶다. 행복하고 싶다. 첫눈을 보는 순간, 내가 설레였으면 좋겠다.
며칠전에 친구로부터 메세지를 받았다. 다락방님이 사랑하는 또 한명의 남자가 채식을 선언했네요, 라고.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하아- 나는 조너선 사프런 포어를 사랑한다. 그의 글이라면 읽고 싶다. 그러나 나는 육식을 즐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위를 하든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을 '기쁘게' 인정하지는 못할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어야 하는걸까? 그나마 다행인게 있다면, 그러니까 조금의 위로가 되는 사실이라면, 조너선 사프런 포어와 나는 '현실에서'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 그러니 나는 그의 책을 읽을수도 있고 읽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가 육식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가슴이 아프다고 그에게 직접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는다면 나는 나의 육식을 금하게 될까? 조금이나마 나의 식욕(혹은 식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그렇지만 나는 맛있게 먹고 즐겁게 살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걸 앞에 두고 게걸스럽게 먹으며 한없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고기를 함께 먹어야만 진정한 친구라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래도 우리가 만난다면 순대국을 앞에 두고 소주를 마시고 싶고, 삼겹살을 구워가며 생마늘을 먹을 줄 아냐고 묻고 싶다. 스테이크는 미디엄으로 익혀달라고 하면서 와인을 마시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스팸을 구워먹고 싶다. 정종을 시켜두고 양송이 삼겹을 씹으며 육즙을 느꼈냐고 묻고 싶다. 바베큐 폭립을 뜯으며 손에 묻은 소스를 쪽쪽 빨고 싶다. 치킨을뜯으며 맥주를 마시고 싶다. 하아- 나는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한 날 남자친구에게 삼겹살을 사달라고 말했고, 직장을 잃은 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곱창을 사달라고 말했었으며, 연인과 헤어진 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게 족발을 사달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하아-
토요일, 양송이 삼겹을 먹으며 같이 술을 마시던 남자사람에게 나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고기를 먹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쌩까버리겠다고 협박(응?)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착해..
책도 안읽고 있는 며칠을 보내고 있는데, 후버까페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흣. 책 구입하는 할인 쿠폰이 생겼다며 내게 책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읽고 싶은 책 있으면 말해달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멋져 ㅋㅋㅋㅋㅋㅋ 책 사준다는 남자사람은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사람이 아닌가 싶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길래 책 사주고 싶다는 이메일을 받는건가. 오늘은 내 생일도 아닌데. 하다못해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제 팔고 싶은 책 백권을 빼낸 후 처음으로, 드디어 책장정리를 시작했다. 일단 이만큼은 완료된 상태.
음..『고구려』가 거슬려...저건 내 책이 아니고 제부 책인데 남동생이 읽겠다고 빌려왔다. 괜히 저기다 꽂아뒀나.. 어제 이만큼만 정리를 완료하고 오리고기를 구워먹느라(더불어 소주도 마시느라) 책장정리를 멈춘 상황. 오늘 아침에 일어나 다시 할 생각을 하니 토할 것 같았다.
아....못하겠어....어떡하지?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