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요일 저녁엔 서점에 들렀다. 원래 사려고 생각했던 책은 따로 있었는데, 나는 시집코너로 가서 시집을 찾다가, 김행숙, 의 시집을 꺼내든다. 브론테님 페이퍼로 이미 목의 위치를 만났던 바, 그 시의 전문을 읽어보고 싶다. 그런데 아, 전문이 좋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시집을 집어든다. 오늘은 서점에서 시집을 한권 사는거야, 생각하고 신간 코너에 들러 소설도 한권 집어 든뒤에 계산을 한다. 그리고 혼자 우동집에 들러 우동을 시키고서는 『목의 위치』를 읽는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앉아서도 또 『목의 위치』를 읽는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읽는다. 

 

 

 

 

 

 

 

 

목의 위치 

 

기이하지 않습니까. 머리의 위치 또한. 

목을 구부려 인사를 합니다. 목을 한껏 젖혀서 밤하늘
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당신에게 인사를 한 후 곧장 밤하늘
이나 천장을 향했다면, 그것은 목의 한 가지 동선을 보여
줄 뿐, 그리고 또 한 번 내 마음이 내 마음을 구슬려 목의
자취를 뒤쫓았다는 뜻입니다. 부끄러워서 황급히 옷을 주
워 입듯이. 

당신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면 목은 어느 방향을 피하여
또 한 번 멈춰야 할까요. 밤하늘은 난해하지 않습니까. 목
의 형태 또한.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 

목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문득, 세상에서 가장
긴 식도를 갖고 싶다고 쓴 어떤 미식가의 글이 떠올랐습니
다. 식도가 길면 긴 만큼 은식이 주는 황홀은 천천히 가라
앉을까요, 천천히 떠나는 풍경은 고통을 가늘게 늘리는 걸
까요, 마침내 부러질 때까지 기쁨의 하얀 뼈를 조심조심
깎는 중일까요. 문득, 이 모든 것들이 사라져요. 

소용없어요, 목의 길이를 조절해 봤자. 외투 속으로 목
을 없애 봤자. 그래도 춥고, 그래도 커다란 덩치를 숨길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목을 움직여서 나는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떠나듯이. 다리를 움직
여서 당신을 또 한 번 찾았듯이.
 

 

술을 마시지 않은 금요일에 침대에 누워 내내 이 시만 반복해서 읽다가, 다른 시들도 뒤적여 보다가, 아, 그래도 목의 위치가 제일 좋구나 하고 또 읽다가 그렇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당신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면 목은 어느 방향을 피하여 또 한 번 멈춰야 할까요, 하는 부분에서 후아- 하는 한숨만이 계속해서 나왔다가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떠나듯이,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또 한 번 찾았듯이, 에서 무너진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저기,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 

예전에 『소설보다 이상한』이란 영화를 보고서는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물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희극인가요, 비극인가요, 라고. 그러자 그는 내게 "당신은 내게 희극이지만, 나는 당신에게 비극이 될 것 같아요." 라고 말했었다.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 라고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묻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듣게 될까.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 

 

2. 오늘 오후, 남동생은 머리(카락)를 자르고 왔다. 와서 거울을 보더니 좀 덜 다듬어진 부분이 있는데, 미장원 다시 가기 귀찮으니 누나가 좀 잘라줘, 라고 했고 나는 그래 뭐 그러지, 하고서는 신문을 가져다 대고 조금 잘라주었다. 이정도면 되겠어? 남동생은 거울을 보더니 괜찮다고, 이렇게 잘라달라고 한다. 나는 다시 가위질을 하는데 갑자기 남동생이 아! 하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깜짝 놀란다. 남동생은 누나 내 귀 잘랐지? 한다. 나는 남동생의 귀를 들여다보는데, 어어, 조금 베인자국이 있다. 내가 건드렸나보다 싶은데, 이내 남동생은 피나지? 한다. 설마 그럴리가 하고 다시 보니 피가 난다. 그런데 젠장, 피가, 피가, 흐른다. '피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줄줄줄줄 흐른다. 아 내가 니 귀를 잘랐어. 어떡해! 남동생은 머리를 자르랬더니 왜 귀를 자르는거야, 라고 흥분하고 괜찮으니까 머리나 마저 잘라, 라고 하는데 나는 발만 동동구른다. 내가 니 귀를 잘랐어. 나 니 귀를 잘랐다고. 나 니 귀를 잘랐어!! ㅠㅠ

애매하지 않습니까, 귀의 위치 또한. 

 

3. 오늘 밤. 책을 읽으려고 침대에 앉았다가 남동생 방에 갔다. 남동생은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폭두백수 타나카』였는데, 남동생은 4권을 보고 있었고 나는 방에 널부러진 7권을 집어서 아무데나 펼쳤다. 그런데 이런 문장이 보인다. 

누가 한 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런 말이 있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아낸다.
라고.  

 

표지를 보니까 내가 널부러진 책들중에 왜 7권을 뽑았는지 알겠다 ;;

 

 

 

 

 

 

4. 다시, 김행숙. 

 

 

목의 위치를 읽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김행숙의 시집을 떠올렸다. 당연히 나는 김행숙이 아니라 다른 어떤 시인의 시도 외우고 있는 것은 한편도 없는데, 내가 가진 김행숙 시인의 시집을 좋아했던가? 목의 위치를 읽고 이렇게 좋아했던 것 처럼, 그 시집속의 시를 무언가 좋아했던가? 라고 떠올려 보니 대답할 말이 없다. 좋았다고 느꼈던 시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시집을 다시 펼쳐본다. 그런데, 『일요일』을 읽는다. 아, 맞아! 내가 이 시는 좋아했었어! 

 

 

 

 

일요일




며칠 늦게 일요일이 찾아왔다. 햇빛은 일요일의 뒤
에 있었고, 몇 덩어리의 구름은 일요일의 느리고 느
리고 부드러운 말씨.

그리고 내린 비는 일요일의 가득한 눈물처럼. 앞에
있는 햇빛처럼. 나는 토요일 밤의 송별회를 지나 월
요일 그리고 화요일 밤,

나쁜 일은 영원히 생기지 않을 것 같은 날들이 멀
리 흐르지 않고 가까이 향월 여인숙에서 잠이 들고
다음 날 다시 새 이불을 덮는다. 나는 화요일 밤을
지나 수요일 아침 그리고 목요일 아침의 순서로 일요
일을 기다린다.

일요일은 제멋대로 다리를 뻗고 두드리고 발을 주
무른다. 일요일이 쓰고 온 넓은 모자가 넓은 그늘을
만들고, 나는 금요일 저녁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구두들이 글썽거리며 웃음을 물고 모여 있는 것을 본
다. 금요일 저녁에서

발이 녹는다. 발부터 일요일까지. 토요일이라는 누
구누구의 이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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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2-05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

다락방 2010-12-05 00:34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은 애매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 2010-12-05 00:35   좋아요 0 | URL
일요일은 난해하지 않습니까. 밤하늘이 난해하듯이.

다락방 2010-12-05 00:38   좋아요 0 | URL
일요일은 난해합니다. 비오는 출근길이 난해하듯이.

... 2010-12-05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의 위치> 좋쵸? <화분의 둘레>도 좋던데요. 근데 다락방님은 시를 잘 못 읽는다고 하시면서 김행숙의 다른 시집도 가지고 계신겁니까! 일요일은 오후6시 이후가 싫어요. ㅋㅋ

다락방 2010-12-05 00:38   좋아요 0 | URL
전 [목의 위치] 만큼 좋은 시를 찾기가 힘들더라구요. [당신이 지진이라면]이 그마나 좀 나았어요. 그러게요, 김행숙의 다른 시집은 제가 어떻게 가지고 있는걸까요? 저 시집 다 합쳐서 한 열권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전부에요. ㅎㅎ
일요일은 아침부터 신경쓰여요. 오후가 오겠지, 밤이 오겠지, 내일이 오겠지 ㅠㅠ

moonnight 2010-12-05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읽으시는 멋진 다락방님 ^^

일요일이 너무 빨리 지나갈까봐 토요일은 잘 못 자고 새다시피 하고 일요일은 일요일대로 월요일이 싫어서 안 자고 버티다보니 월요일 컨디션은 정말이지... -_-;;;;; 저는 오늘 나가서 영화보고 술 한 잔 할 거에요. 이주넘게 앓았던 감기가 드디어 끝을 보이는 듯 해서 축하기념으로요. 행복한 일요일 보내세요. ^^

다락방 2010-12-05 21:24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영화도 보고 술도 드셨나요? 저는 비빔국수를 먹고 유자차를 마셨답니다. 배 불러요. 하핫.
술 한잔 하신다면 아직 집에 들어오시기 전이시겠어요. 영화는 뭘 보셨나요?
감기가 나아가는데 술 마시고 피곤하면 어떡해요, 문나잇님. 감기 빨리 나으시고, 나으시면 다시는 감기 걸리지 마세요. 일요일이 이제 채 세시간도 남질 않았네요.

moonnight 2010-12-06 15:49   좋아요 0 | URL
앗. 비빔국수. 저 좋아하는데 맛있었겠어요. ^^
영화는요. '스카이라인'을 봤는데, 생각보단 괜찮더라구요. 워낙 혹평을 많이 들어서 ;;;;
월요일 어떻게 보내고 계세요? 몇시간만 있으면 퇴근이에요. 호홋 ^^

다락방 2010-12-06 16:39   좋아요 0 | URL
퇴근시간이 한시간 반 남았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보내고 있어요.
스카이라인 괜찮았어요? ㅎㅎ

저는 다음주쯤에는 아마도 [투어리스트]를 보러가지 싶습니다. 졸리가 나오잖아요! 히히 :)

깐따삐야 2010-12-05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서점 진열대에 누워있는 <타인의 의미>를 봤는데 그냥 뽀로로 책만 사갖고 왔네요.

천천히 떠나는 풍경은 고통을 가늘게 늘리는 걸까요.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시인이 이렇게 대신 말해주네요.
천천히 떠나는 풍경은 기쁨도 가늘게 늘리는 걸까요. 그게 그런가? 그건 또 모르겠어요.^^

다락방 2010-12-05 21:36   좋아요 0 | URL
저는 다른 책 사러 서점 갔다가 [타인의 의미]를 사들고 왔네요. 그리고 [해피엔드에 안녕을] 이라는 책도 사가지고 왔는데, 그 책 재미있어서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어요.

하나의 글을 읽고 모두가 받아들이는 부분이 같지 않듯이 한편의 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천천히 떠나는 풍경은 고통을 가늘게 늘리는 걸까요, 란 부분이 깐따삐야님의 눈에 띄었군요. 저는

그래도 목을 움직여서 나는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떠나듯이. 다리를 움직
여서 당신을 또 한 번 찾았듯이.

이 부분이 참 좋아요.

poptrash 2010-12-05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멋대로 다리를 뻗고 두드리고 발을 주무르는 일요일이네요.
그런데도 발은 이렇게 시리기만 하고.

다락방 2010-12-05 21:37   좋아요 0 | URL
팝님, 수면양말요, 수면양말 신어요! 수면양말 정말 따뜻해요. 저도 발이 시려서 수면양말 가끔 신고 자는데 정말 따뜻해요.

stillyours 2010-12-06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다락방님. 나도 지난 금요일부터 [타인의 의미]를 읽고 있어요.
아, 다락방님. 다락방님이 좋아할 것 같은 시를 어젯밤에 읽었어요. 김혜순의 '첫'이에요. [당신의 첫]이라는 시집에 있어요.

손 시려요.

다락방 2010-12-06 09:28   좋아요 0 | URL
으응, 그 시집은 또 뭐람? 검색해보고 살게요. moon님이 그렇게 말했으면 정말 내가 좋아할 만한 시일거에요. 히히. 아웅, 겨울에 시집 사는 여자사람이네요, 나는. 히히.

손이 왜 시려요, moon님. 잡아줄 사람이 있잖아요! 응?
겨울이다!! 손 시렵다는 핑계로 손 잡을 수 있는 겨울!
:)

영삼이 2010-12-07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폭두백수 다나카. 전 폭두직딩 다나카를 다 읽었습니다. 한참 웃다 울었었지요. 좋네요, 시도 만화도. ㅎㅎ

다락방 2010-12-07 13:52   좋아요 0 | URL
앗 저도 폭두직딩 폭두고딩 폭두백수 다 읽지는 않았고 다들 조금씩 읽다 말았네요. 재밌죠? ㅎㅎ 전 폭두직딩 에서 타나카랑 동료가 서로 거시기 하는 장면을 들킬때 너무나 가슴이 아팠어요. 흑 ㅜ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