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우체국에 들렀다. 대기인수는 8명.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동안은 딱히 할 게 없다. 사람이 많을 줄 몰라서 책을 가져간 것도 아니고. 내친김에 사람들 구경을 한다.
1. 이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그는 우체국에서 소포를 보내는 일을 거의 해본적이 없는 것 같다. 두꺼운 책(전공서적으로 보인다)을 보내려는데 박스에 포장해야 한다고 했나보지, 우체국박스를 테이프로 붙이고 있다. 그런데 그 폼이 굉장히 어설프다. 박스를 접는 모양새도, 테이프를 붙이는 모양새도 너무나 서투르다. 나는 직장생활 십년차이고 그 중에 2년쯤은 배송을 허구헌날 해야 하는 출판사에서 일했었다. 이리 줘봐요, 내가 붙여줄게. 나는 엄청난 프로의 냄새를 풍기며 그를 도와줄까 생각했는데, 말았다. 뭐, 그도 자신이 해봐야 하잖아? 그래야 능숙해지지.
라고 핑계 대어 보지만 그는 꽃청년이 아.니.었.다.
2. 잘 차려 입은 삼십대 초반쯤의 남자가 자신의 순서가 되자 카운터로 간다. 아뿔싸, 그런데 그는 중국인이다. 여기는 커다란 우체국이 아니라 우편취급소. 카운터의 그 누구도 중국어를 할 줄 모른다. 손님은 영어로 얘기하잔다. 카운터에서는 어설프게 나인 싸우전드~ 하면서 뜨문딱 뜨문딱 영어를 쓴다. 그 대화가 너무도 길고 스무스 하지도 않아서 잠깐 참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나인 싸우전드 포 헌드레드원, 을 해주고 났는데 그가 내게 다른걸 물을까봐 겁나서 관뒀다. 다른 사람들도 아마 나같은 생각으로 그냥 구경만 한게 아닐까.
3. 그런데 이때, 사십대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이 손님이 중국분이냐고 묻는다. 맞다고 하니 중국어로 통역을 해주신다. "비싼건 너무 비싸고 싼건 너무 싼데 천천히 가도 좋으니 그 중간가격은 없냐고 묻는데요?" 라고 해석해주신다. 오- 멋지다. 그 분이 투입되고 나서 그 손님의 일처리는 빠르게 진행됐다. 아, 멋져. 역시 로맨스는 외국어를 할 줄 아는자에게 더 숱하게 다가오는 법! (응?) 난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멋지게 느껴진다. 대단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동성일 경우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이성일 경우 성호르몬이 분비된다. 그들은 자신의 다른 장점에 대해 내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 그 자체로 완전 쑝쑝간다. 그 외국어가 독일어라거나 폴란드어라거나 프랑스어일때 조금 더 심하게 매력적이다.
또다시 봄기운이 퐁퐁거리는 가운데 나갔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캬라멜마끼아또를 사가지고 들어왔는데 아, 캬라멜이 너무 달다. 이건 싫어. ㅜㅡ
그러니까 이 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제대로된 인용문이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
"쓰키코 상, 이 집 온천물이 상당히 좋은 모양이에요."
선생님은 돌아보며 말했다. 네, 하고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흔들흔들 서 있다.
"좀 있다가 괜찮아지면 목욕을 하고 와요."
"네."
"목욕을 끝내고도 밤이 길 듯하면 제 방으로 오세요."
네, 하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예? 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 그건 무슨 뜻이에요?
"뜻 같은 건 없어요."
그렇게 대답하고 선생님은 문 저편으로 사라졌다.(p.181)
아 왜! 뭐?! 왜 목욕을 끝내고도 밤이 길 듯하면 오라는거야? 그렇게 말하면 밤이 짧게 느껴져도 길게 느껴야 하잖아. 왜왜왜, 뭐뭐뭐뭐. 왜이래 왜이래! 제대로 할게 아니라면, 기대하는대로 해줄게 아니라면, 유혹하지도 말란 말이야! 뜻 같은게 없으면 닥치라구!!
아, 봄에 읽으면 안되는 문장이야.
그나저나 나도 며칠전에 목욕 했는데, 왜 내 목욕은 쓸쓸할까?
하앍- 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