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제부가 와인을 한병 들고 와서는 "처형, 와인 좋아한다고 해서 선물받은 거 가지고 왔어요. 이거 좋은 와인이래요. 취향에 맞는 와인이에요?" 하고 묻는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나는 좋은 와인이 어떤 와인인지 알지도 못하고 어느 나라의 와인이 내 취향인지도 모른다. 와인의 종류(가 있는지도 모르겠는데)도 모르고 암튼 나는 와인의 맛이나 향으로 와인을 좋아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와인이..쉽게 취해서 좋다. 쉽게 열이 나고 쉽게 기분이 좋아진다. 온몸이 뜨겁고 나른해지는 느낌이 좋다. 내게 와인에 대한 취향이 있다면 그것은 '시지 않고 달지도 않은' 와인이다.   

 

 '정혜윤'의 『침대와 책』은 그런 내게 '고급 와인'같은 책이었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게 좋고, 그녀가 읽은 책에 대해 수다 떠는게 좋았다. 그러나 어쩐지 나와는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자꾸 내 앞에서 "이 와인이얼마나 고급와인인 줄 알아? 정말 근사하다고, 향을 음미해봐!" 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아, 그래? 근데 아무리 마셔도 나는 고급와인이 뭔줄은 모르겠어. 당신이 좋다니 그냥 좋은가보다 해. 난 싸구려 와인도 좋아. 취하니까." 라고 대꾸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 크게 공감할 수는 없는데 대체 그녀가 뭘 보고 뭘 느낀건지는 궁금했다. 그래서 그녀가 소개한 많은 책들중 몇권을 메모해 두었다. 내가 그 책들을 읽으면 그녀와 같은 부분을 보고 그녀와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 나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전혀 다른 부분에 밑줄을 긋거나 전혀 다른것을 느낄 것 같다. 쉽게 친해지지는 못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일까. 

 

그런데 이번엔 찬 소주 같은 느낌의 책을 만났다. 사실 이 책을 『침대와 책』보다 훨씬 먼저 읽었다. 

 가방과 구두 그리고 아파트. 또 뭐가 있을까, 수준을 말해주는 것들이? 플래티넘 카드? 그리고...책?  

사실 나 역시도 그 사람이 읽는 책을 보고 그 사람과 나는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부끄럽게도. 수준이라는 말 자체가, 그러니까 누군가와 수준이 다르다거나 누구보다 수준이 높다거나 생각하는 사람 자체가 수준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것일텐데, 내가 그랬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읽는 게 수준 낮은 거라면 '수준 높다'는 말을 들으려면 도대체 어떤 소설을 읽어야 할까? 왜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수준타령'을 해야 할까?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같은 천박한 광고카피처럼 어디에 사느냐로 수준을 따지고, 어디서 노느냐로 수준을 따지고, 학력·연봉·집안으로 수준을 따지고, 그것도 모자라 무슨 소설을 읽느냐로까지 수준을 따져야 하는 걸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정말 수준 떨어진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p.23) 

부끄럽게도 내가 수준이란 게 사람 사이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할 당시,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저자는 나보다 한참 높은 단계에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전작 『나는 오늘도 유럽출장 간다』를 읽었으면서도 그 생각을 쉽게 버리질 못했다. 어려운 책만 읽고 어려운 글만 쓰고 어려운 말만 할거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수준 낮은 소설'에 대해 분개한다. 나는 저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이지 그녀를 다시 보게 됐다. 사람 사이에 사다리가 존재하고 누군가는 그 밑에 있으며 또 누군가는 그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그 사다리를 갖다 버리고 모두 땅위에 눈을 맟추며 살자고 얘기하는 것만 같았다. 누구보다 확신이 있고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녀는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쉽게 써내는 거라고,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고급와인만 마실 것 같은 그녀가 이렇게 얘기한다. 

요즘은 아예 다리가 없는, 몸통만 있는 와인잔도 많다. 와인잔은 그냥 편하게 잡으면 된다. 제발 쓸데없는 일로 스트레스 받지 말자.(p.199)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그녀의 진정한 팬이 되었다. 충분히 잘난척하고 오만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 내가 얼마나 잘났는줄 알지, 하고 뻐기질 않는다. 그래, 생각해보면 잘난척은 언제나 못난이들의 전공이었다. 못난걸 더 많이 감추어야 하는 사람들의 전유물. 내가 그랬던 것 처럼. 이 책에서의 그녀는 얼마나 솔직하고 또 얼마나 편안하게 얘기하는지 그녀가 읽었던 책들보다 그녀의 생각과 감상들이 훨씬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닉 혼비는 자신이 읽었던 책들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까?  

나는 그의 소설 『어바웃 어 보이』와 『하이 피델리티』를 퍽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읽기를 망설였었다. 그가 하는 말들을 내가 다 이해할 수 없을까봐, 어려울까봐, 어려운 이야기들로 나를 기죽일까봐. 그런데 와- 첫장부터 나는 아주 신났다. 그가 제일 처음 책들에 대해 이야기한게 샐린저, 바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인거다. 게다가 그가 산 샐린저의 책들은 내가 모두 읽고 가지고 있는 것들. 

아, 막 첫장부터 신났다. 나도나도, 나도 읽었다고! 갑자기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만 같았다. 나는 헐레벌떡 연필을 쥐고 내가 읽은 책들에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했다. 책장이 아주 술렁술렁 잘도 넘어간다. 끝까지 다 읽어보니 겹치는 책이 좀 더 있다. 헤헷. 아, 나는 왜 이런걸로 이다지도 신나한단 말인가! 

 

 

 

 

 

단순히 사거나 읽었다는 사실만 겹치는게 아니라 그가 말하는 감상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단, 내가 언젠가 서투르게 캐스팅도 해보았던 '앤 타일러'의 『아마추어 메리지』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타일러는 수십 년에 걸친 관계의 이야기를 해주는데, 책의 첫 부분이 너무 잘 정돈되어 있다. 1950년대 그 커플은 미국 전후세대의 꿈인 교외 생활을 하고, 1960년대에는 반문화운동의 비난 대상이 되어 있고, 하는 식이다. 하지만 마치 정원을 만들듯, 그 결혼생활에 쌓여가는 디테일이 소설이 그리는 탄탄한 스토리라인에 결국 모두 연결된다.(p.241)  

무척 재미있게 읽었지만 결말이 지나치게 헐리우드 영화같은 느낌을 주어 별을 하나 뺄 수 밖에 없었던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에 대해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내게는 마지막 급반전이 지나치다고 여겨졌지만, 그것만 빼면 코넬리의 『시인』은 모틀리 크루 이후에 읽는 책이 해내야 할 어려운 업무를 잘해주었다.(p.307)
  

『야릇한 친절』이 번역되기 전에 나와 '닉 혼비'의 책에서는 『복잡한 친절』로 나온 '미리엄 테이브즈'의 책에 대해서도 거의 정확하게 나와 일치하는 감상을 보이는데, 그는 이 소설이 

재미있지만 패배감에서 오는 무기력감에 관한 소설이기도 해서 속도감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는 책이다(p.250) 

라고 얘기하며 또, 

메노파 교도로 자라는 것의 문제에 대해서는 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책의 위대한 점은 좋은 작가가 쓴 글이라면 뭐든 읽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리엄 테이브즈가 화자에게 준 목소리는 너무나 진실하고 매력적이라 노미의 이스트 빌리지처럼 재미없는 마을에서도 200페이지 정도를 지내는 것이 싫지 않게 된다.(p.251) 

라고도 덧붙인다.  

이 책을 읽는 것이 신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유머이다. 언젠가 마태우스님의 리뷰에서도 비슷한 문장을 읽은 것 같은데, 바로 이런 문장이다. 

사실 최근에는 분량이 적은 책들을 주로 읽는데, '읽은 책'란에다 여러 권을 적어 넣기 위해서다.(p.68) 

또 내가 확- 공감하며 웃었던 부분은 여기. 

작가 매제를 둔다는 것은 정말로, 진짜로, 유감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가 나보다 더 성공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아니면 내가 싫어하거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책을 쓸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매제가 『피네간의 경야』['난공불락의 고전'으로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장편소설-옮긴이]를 썼는데 자신은 일 때문에 정말로 바쁘다고 상상해보라. 아니면 별로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든가). (p.27)  

윽-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왜 끔찍한지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피네간의 경야』를 검색해보면 쉽게 알 일이다. 만약 내 친구들 중 한명이 작가가 되어 책을 냈다면서 『율리시스』를 내민다면 나는 그가 아무리 사랑하는 친구라고 해도 "괜찮아, 안줘도 돼. 많이 팔어."라고 하겠다. 정말. 내 사무실 책상에는 아직 표지도 펼쳐보지 못한 율리시스가 있단 말이닷. 

게다가 그의 책을 보고나서(정확히 그의 평을 읽고나서) 읽고 싶은 책도 여럿 메모해 두었다. 그가 좋다고 한 책은 어쩐지 나도 퍽 좋아할 것만 같다.  

 

 

 

 

 

책의 끝에는 이 책에 나왔던 모든책을 저자별로  찾아볼 수 있는 목차도 나와있다. 그의 추천작들을 읽고나서 그의 감상을 다시 찾아보고 싶다해도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러모로 신나는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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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1 17: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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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1 20: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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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2 08: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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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5 2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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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6 1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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