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퀸'의 대화가 재미있다고 기억했던 나는 마침 전자책으로 나와있는 <공작의 여인>을 구매해 읽기 시작했다. 브리저튼 가의 남매들 중 첫째딸인(그러나 위로 오빠가 셋) '다프네'의 얘기이고 상대 남자는 '사이먼'으로 공작이다. 사이먼은 태어났을 당시 아들이라 아버지로부터 엄청나게 사랑받았지만 말을 배우는 속도가 느리고 더듬는 바람에 아버지는 그 사랑을 거두어들이고, 사이먼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다가 나중엔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반항하기로 한다. 그중 하나가 '난봉꾼'이 되는 거였다. 그러나 책에서는 그런 사이먼에게 '진정으로' 난봉꾼이 될 자질은 없었다고 한다.


비록 사교계의 반항아로 명성을 날리고 있기는 했지만, 사이먼은 진정한 난봉꾼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런던의 밤을 즐기기는 했지만, 옥스퍼드에서 3년, 런던에서 1년, 끝없는 파티와 매춘부들의 행렬이 지긋지긋해지고 있었다. -책속에서



여자주인공 '다프네'는 사교계에 데뷔하고 2년이 지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해 속을 끓인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때는 1813년이고 명문가의 딸이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이며 유일한 과제는 신부가 되는 거니까. 게다가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남자랑 둘이서만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도 안되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해. 이렇게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까지 정숙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남자랑 실제로 어떤 짓을 했는지와는 상관없이 둘이 있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되는데, 대체 남자들은 어떻게 난봉꾼이 될 수 있었던걸까?



"그 여자는 단지 공작님이 끔찍한 난봉꾼이라고 썼을 뿐이에요. 그 사실은 공작님께서도 부인하시지 않겠죠? 대부분의 남자분들이 자기를 난봉꾼이라고 불러 주었으면 하니까요." -책속에서



여자는 결혼 전에 남자와 둘이 있어서는 안되는데 남자는 난봉꾼이 되는게 희망이라면, 그 남자로 하여금 난봉꾼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그녀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누구입니까?


한쪽에서는 남자랑 있으면 안된다고 하는데 한쪽에서는 여자랑 많이 만나 난봉꾼이 되는게 희망이라니. 이 불균형과 부조리가 어떻게 공존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사이에서 난봉꾼이 되게 하는, 난봉꾼의 희망을 이루게 하는, 그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사이먼은 난봉꾼으로 사는게 자기에게 잘 맞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또 지루하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자신을 어릴적부터 거두어준 어른에 대한 예의로 무도회에 참가하고, 그가 공작의 지위를 가진만큼 많은 여성들과 또 어머니들로부터 최고의 신랑감 후보가 된다. 사이먼은 그게 너무 지겹다.



미혼 여성들은 지극히 지루했고, 어머니들은 짜증스러운 정도로 귀찮게 굴었으며, 누이들은 너무도 노골적으로 사이먼의 관심을 끌려고 했으므로 자신이 혹시 매음굴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책속에서



교양있는 여자는 남자와 둘이 있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는데, 그로 하여금 '매음굴인가'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그가 생각하기에는 욕할만한 장소, 매음굴에 있는 여성, 대체 그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누구입니까?





첫째로 성착취(성매매)는 남자가 여자를 보고 대하는 방식을 결정하고, 둘째로 여자 전반의 성생활과 건강을 침해하며, 셋째로 ‘당해도 싼‘ 여자 집단을 만들어 모든 여자의 행동을 통제한다.- <성노동, 성매매가 아니라 성착취>, P25











저 여자는 남자랑 둘이 있었다고 교양 없다고 욕하는 것은 누구인가, 매음굴에 가는 사람은 누구인가, 매음굴을 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순결을 요구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건 남자들이 만들고 행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드라마 <브리저튼> 시즌1의 1화의 오프닝부터 나는 다시 이 물음에 부딪치고야 만다. 프리저튼 가의 장남 '앤서니'는 잠시 후에 여동생이 사교계에 데뷔하는 무도회에 여동생을 에스코트 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 되기에 앞서 한 공원의 커다란 나무 앞에서 열심히 섹스를 한다. 사교계 데뷔에 오빠가 필요한 그 시대에, 나무에 기대어 바깥에서 결혼하지 않은 남자랑 섹스를 하는, 그녀는 누구인가? 남자랑 둘이 있는 모습을 들키는 것만으로도 흠이 되는 이 때에 이렇게 드러나게 남자랑 섹스를 하는, 그녀는 누구란 말인가.


1813년이 배경인데 드라마 속에서는 공작이나 귀부인에 다양한 인종을 등장시켰다. 아마도 드라마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기 보다는 지금 시대에서 바꿀 건 바꿔가면서 보여주려는게 아닌가 싶다. 다양한 인종을 귀족으로 분하게 한 것이 아마 그들이 의미를 둔 가장 큰 시도가 아닐까.


브리저튼 남매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러니 여동생 다프네의 신랑감을 찾아주는 일, 그녀를 보호하고 잘 살도록 돕는 일은 오빠인 앤서니에게 달렸다. 그는 실제로 다프네의 옆에서 다프네에게 관심 갖는 남자들이 조금이라도 흠이 있다면 접근할 수 없도록 다 막아낸다. 그게 오빠의 역할이고, 가장의 역할이며, 남자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그가 그렇게 믿는 것은, 그 시대가 그런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의 그런 충실한 책임감에, 나무 기둥에서 섹스 했던, 그리고 지금 그로부터 그의 책임감에 대해 듣기 바로 전까지 섹스했던, 그녀는 말한다. 다프네가 부럽다고, 지켜주고 돌봐주고 누군가가 있어서 부럽다고. 그 때 앤서니는 그녀에게 말한다. '나는 너도 돌봐줄거야.'


남자랑 둘이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추문에 휘둘리게 되는 여성들이 살던 시대에서,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섹스를 한 여성에게, 그는 '내가 돌봐준다'고 말한다. 그녀는 누구인가. 그는 소프라노 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그녀와 나무에 기대어 섹스하고, 집을 얻어 주고, 그러나 그녀와의 관계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긴 채로 그녀를 정부 삼는다. 그러더니 이제 자신이 한 가정의 충실한 가장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녀에게 이 마을을 떠나라고 한다. 한 남자의 정부로 살면서 버려지고나면 그 마을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없으니까. 그녀는 그와 섹스했고, 그의 정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일하고 살던 지역을 떠나야 한다.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기 있는 저 남자 분은 여성은 마차에 탈 때 도움을 받아야 하며 구덩이에서 나올 때도 남자가 들어 올려 주어야 하고 모든 곳에서 가장 좋은 곳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내가 마차를 타거나 진창을 지나야 할 때 도와주지 않으며 아무도 내게 가장 좋은 곳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나를 보십시오! 이 팔을 보십시오! 나는 어느 남자보다도 더 많이 쟁기를 끌었고 씨를 뿌렸으며 곡물을 거두어 곳간에 넣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남성과 똑같이 일할 수 있고, 충분한 음식이 있다면 남자만큼이나 많이 먹고, 채찍질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이 아이들 모두가 노예로 팔려나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내가 어머니로서 슬픔에 겨워 울 때 주님 말고는 아무도 제 슬픈 울음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Loewenberg and Bogin 1976, 253) -p.44




결혼도 하지 않은 채로 남자랑 둘이 있는 모습을 보이면 안되는데 심지어 남자랑 섹스를 했으니, 그렇다면 그녀는 여자가 아니란 말인가. 남자랑 둘이 있는 모습을 보이면 안되는데 매음굴에서 일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여자가 아니란 말인가. 내 여동생은 조금의 흠이 있는 남자를 만나서도 안되고 남자랑 둘이 있는 모습을 들켜서도 안되지만, 그러나 나는 난봉꾼이 되어 매음굴도 가고 정부도 두고 산다면, 그렇다면 그 여자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누구란 말인가. 남자가 난봉꾼이 되기 위해서는 여자가 필요한데, 그런데 내 여동생은 결혼전에 남자랑 둘이 있어서는 결코 안되는 거라면, 그 남자로 하여금 난봉꾼이 되도록 하는, 그 여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누구인가. 대체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어떻게 만들고 또 유지해오고 있단 말인가. 내가 결혼할 여성은 정숙하고 순결해야 하지만 나는 난봉꾼으로 살아야지. 어떻게 '나는 난봉꾼'이 되면서 '너는 순결한' 사람일 수 있단 말인가. 난봉꾼의 상대인 그녀는 누구인가. 결혼이라는 한순간을 평생 기다리며 산다는(영화속 대사다) 그녀는 또 누구란 말인가. 한쪽에는 결혼이 싫으니 즐기며 살겠다는 난봉꾼과 섹스하는 여자가 있고 한쪽에는 결혼 전에 남자와 있는 모습을 들켜서는 안되는 여자가 있다. 대체, 그녀들은 누구란 말인가. 무도회에서 좋은 신붓감으로 보이기 위해 단장한 그녀는 누구인가.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섹스하고 있는 그녀는 누구인가.




이것은 <브리저튼> 드라마가 한 일도 아니고 '줄리아 퀸'이 한 일도 아니다. 그 시대가 배경이라면 그 시대에 맞는 이야기를 써내는 것이 작가며 감독의 일일 것이다. 드라마 브리저튼은 그러나 그 시대적 배경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아직 얼마 보지도 않아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지만, 주체적인 여자들을 그려내지 않을까 싶다. 그 당시에 남자들처럼 대학에 가고 싶은 여자, 부당한 조건들에 맞서 따지려는 여자들에 대해서. 내가 답답할 수 밖에 없는건, 나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책대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보면 될텐데, 책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나는 자꾸만 그 뒤의 여성들, 차마 교양 있는 여성들이라 불리지 못하고 남자들로부터 이용당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멸시당하는 여성들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대체 그녀는 누구란 말인가. 왜 어떤 여자들은 남자들의 보호와 돌봄을 받고 어떤 여자들은 이용과 멸시를 당하는가.

















사유재산을 획득하게 되자 남성은 그것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상속자에게 물려줄 방법을 찾다가 일부일처제 가족을 구성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였다. 혼전순결에 대한 요구와 결혼에서의 성적 이중기준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함으로써 남성은 자손이 적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재산상 이익을 지킬 수 있었다.- P43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결혼을 구성하는 교환의 총체적 관계는 한 남성과 한 여성 사이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로 구성된 두 집단들 사이에서 성립된다. 그리고 여성은 동반자 중 한 명이 아니라, 교환의 대상물건 중 하나일 뿐이다. -- 대체로 그렇듯이, 이것은 소녀의 감정이 고려되었을 때조차도 마찬가지이다. 계획된 결합에 순종하면서 소녀는 그 교환이 일어나도록 허용하거나 촉진시키지만, 그녀는 그 교환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과정에서 여성이 ‘사물화‘된다고 한다. 여성은 탈인간화되며 인간이라기보다 물건으로 생각된다.- P84




남성이 가구와 혈통에 '속해 있었다면', 여성은 그들에 대한 권리를 취득한 남성에게 '속해 있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쉽사리 주변인이 된다. 죽음, 별거 혹은 더 이상 성적 파트너로 소용이 없어짐으로써 남성의 보호를 잃게 되면, 여성은 주변적이 된다. 국가가 형성되고 위계와 계급이 확립되기 시작한 그 시점에, 남성은 여성집단에 있는 더 큰 취약성에 주목하였고 차이(difference)가 한 집단을 다른 집단과 분리시키고 나누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음이 분명하다. 이런 차이는 성과 나이처럼 '자연스럽고' 생물학적인 것일 수도 있고, 감금과 낙인직기와 같이 사람이 만든 것일 수도 있다. (p.139)


가부장제 체계는 여성의 협조가 있어야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여성의 협조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수단에 의해 확보된다. 그 수단들은, 성별교의의 주입(gender indoctrination), 교육기회의 박탈, 여성의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는 것, 여성의 성적 행동에 따라 존중받을 수 있음‘(respectability)일탈‘(diviance)을 규정함에 의해, 제재와 노골적 강압에 의해, 경제적 자원과 정치적 권력에의 접근 차별에 의해, 그리고 동조하는 여성들에게 포상으로 계급적 특전을 줌으로써 여성들을 분리하고 서로 반목하게 하는 것이다.- P380



'남성이 없는' 그녀는 누구인가. '남성에게 속하지 않는' 그녀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도대체 그녀는 누구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는 여성이 아니란 말인가, 를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줄리아 퀸의 잘못도 드라마의 잘못도 아니다. 애초에 구분짓고 압박하고 낙인찍었던 세상이 한 일이다.

가부장제가 한 일이다.

여성혐오가 한 일이다.

성차별이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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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2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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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7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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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7 13: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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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7 17: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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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8 16: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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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1 08: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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