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사상들에 대해 정리를 하고 싶지만 그럴 깜냥은 안되고 누군가 정리해준다면 좋겠다고 늘 기다리던 차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몇년간 강의를 따라다니면서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흩어졌던 조각들이 이 책으로 하여금 정리될 수 있었다. 물론, 더 제대로 머릿속에 자리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여러번 읽어야할 것 같지만 말이다.


읽기전에 내가 가장 크게 지지할 수 있는 건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아닐까, 짐작했는데 역시 그랬다. 그러나 자유주의부터 마지막의 제3의 물결까지, 내가 온 마음으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백프로 지지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가장 많은 부분은 급진주의에 그리고 또 어떤 부분은 사회주의에 어떤 부분은 에코페미니즘에 동의했다. 정신분석 페미니즘 읽을 때는 이것이 페미니즘과는 좀 멀다고 생각했고(나는 프로이트가 너무 성에 편집증적인 것 같아서 영...), 가장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것, 지지를 딱히 보내게 되지 않는 건, 마지막의 제 3의물결 페미니즘, 퀴어 페미니즘 이었다. 이성애에 대한 전복적 시선은 유의미하지만, 내 경우에는 언제나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여성 대부분 그리고 여성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그들을 위해 가장 나은게 무얼까, 라고 했을 때 제3의 물결과 퀴어페미니즘이 딱히 그들의 자유를 위해, 비성적대상화를 위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질 않았다.


일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가장 크게 관심을 두는 게 무엇인지, 가장 크게 개선하고 싶은게 무엇인지에 따라 지지하는 사상에 대해서도 당연히 차이가 생길 것이다. 나는 여성과 아이들을 향한 성폭력과 성적대상화에 가장 큰 관심이 있고 가장 먼저 없애고 싶다. 여기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다보면 결국은 급진주의 문화 페미니즘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페미니즘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숱하게 강의를 따라다니고 숱한 책들을 읽고 생각하면서 결국 나는 이렇게 되었다.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것,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결코 완벽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것, 남성과 동등한 기회 및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 평등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딱히 선하고 정의롭고 어떤 일에서나 옳은 선택을 한다는 것이 결합되진 않는다. 인간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불완전했고 부조리했는데, 페미니즘을 알고 접한다고 해서 딱히 완벽하게 조리있는 인간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개인적 특성, 그 사람이 인간으로 가졌던 특성은, 페미니즘을 알기 전이나 후에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게으른 사람은 여전히 게으르고, 뒷담화 하는 사람은 여전히 뒷담화 하고, 집착하는 사람은 여전히 집착한다. 징징대는 사람은 여전히 징징대고,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며, 거짓말 하는 사람은 여전히 거짓말 한다. 여기에서 했던 말 저기로 옮기고, 저기에서 했던 말 여기와서 옮기는 입 가벼움도 페미니즘을 접한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을 뿐, 결코 완벽해지지도 않고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 페미니스트에게 그들이 완전한 애정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에도 여성과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들을 괴롭히는 게 너무 싫었고, 그 상대들이 대부분 남자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런 성향이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좀 더 강화되고 또 원인을 분석하고 현상을 제대로 보게하는데 도움이 된건 사실이지만,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나라는 인간 자체가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된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게으르고, 입이 가볍고, 말 전하는 걸 좋아하고, 사적인 비밀을 쉽게 폭로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을 싫어한다. 개인의 영역을 존중하지 않는 것도 싫고 집착하는 사람을 보는 것도 끔찍하며 치대는 인간도 싫다. 내가 페미니스트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가졌던 성향이고,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도 변함없는 나의 성향이다. 나를 괴롭히는 인간들은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내가 페미니스트였을 때도 그리고 그 전에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싫어하고 또 새롭게 나를 싫어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나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내가 하는 다소 과격한 주장들에도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또 새롭게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나라는 인간을 보고 그렇게 된것이다. 나는 기존의 나이고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는 페미니즘을 아는 변함없는 나이다. 나는 누군가로부터 어떤 인간이기를 인정받고 싶어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것 같다.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보든 말든 니 마음대로 해라, 나를 싫어하려면 그 역시 네 멋대로 해라, 나는 너의 인정도 관심도 필요없다.


나는 내가 내리는 결정들이 여성과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것이기를 원하고, 그걸 생각하다보면 결국 급진주의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짓밟게 하는 계기가 된다.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너는 페미니스트잖아' 라면서 이상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나를 괴롭힌다.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성차별주의자들이라면 상관없는데, 그렇지 않은 인간들이 그걸 이용하려고 들때면 몹시 괴로워진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와 이수정 이 롤모델이 되어버린 것 같다. 스스로 여성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 거기에 대해서는 딱히 큰 관심을 주려하지 않는 사람. 그러나 가는 길이, 하는 행동이 다른 여성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 그 존재 자체로 열심히 공부하고 행동하겠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사상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책을 읽는건 매우 유익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시대적으로 정리한 책을 좀 더 보고 싶다.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독서였다.

이번달에도 어김없이 기한 안에 완독했다. 졸라 멋져... 셀프 쓰담으로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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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1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1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연 2020-09-2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날이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듯 해요. 체계가 없는 독서를 하면서도 굳이 체계를 세워 읽어야만 길이 있는 건 아닐거야_ 그런 고집을 피우면서 살았는데 여성주의를 함께 읽으면서부터 체계를 세워 구체적인 독서를 하고싶다는 마음이 강해지고 있어요. 두꺼워서 늦게 읽기 시작해서 바들바들 떨었는데 좋은 책인지라 집중도 있게 쑥쑥 잘 읽혔어요. 고마워요, 다락방님. 덕분에 힘을 받는 느낌인지라. 점심 맛나게 드시고 10월 도서로 만나요 두근두근.

다락방 2020-09-21 12:41   좋아요 0 | URL
다른 책들도 그렇겠지만 페미니즘 책들은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차곡차곡 내 안에 쌓이는 것 같아요. 그건 결국 다른 페미니즘 도서들을 읽을 때 튀어나오더라고요. 읽는 그 당시에 바로 즉각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페미니즘 도서를 읽으면서 ‘아 그 때 그 책이 말한 게 이거였겠구나!‘ 불현듯 깨달음이 오고 그래요. 그 순간순간들이 짜릿하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서 내 것이 되는것 같아요. 이번 도서처럼 정리가 잘 된 책은 읽으면서도 좋지만 몇 번 더 재독하는게 좋을것 같고 또 일단 한 번 읽어서 아는 이상 다른 도서들을 읽을 때, 아 그 책에서 뭐라했더라, 하고 찾아볼 수도 있을것 같아 책장에 꽂아둬야 할 것 같아요.

이번책 중에 정신분석 페미니즘 읽으면서 프로이트가 너무 싫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애기들한테도 성적인 걸로만 생각하게 만들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 이런 변태새끼가..라는 생각했는데, 우리 10월에 프로이트 입문서 읽네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10월 도서로 그리고 글로 만납시다, 수연님.

2020-09-22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09-23 08:20   좋아요 1 | URL
ㅎㅎ 잘난척 되게 꼴불견으로 보일 수 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 잘난척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 더 잘난척하는 다락방이 되도록 하겟습니다. 그러니까 님도 열심히 힘내서 잘난척 하면서 살자. 내 안에 어떤 잘남이 있는지 자꾸 들여다보고 입밖으로 꺼내요. 내가 꺼내면 남들도 아, 저거 쟤 잘남이구나, 한다. 우리의 잘난척 삶을 위하여, 화이팅!!

2020-09-23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