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 때, 즉 하나의 이야기를 새로이 창조할 때, 그 안에는 온갖 악한 행위를 넣을 수 있다. 주변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일을 포함해서 드물게 일어나는 일들까지 혹은 순전히 상상에서 나온 것까지도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악한 행동을 넣음으로써 어떤 것을 말하느냐는 그 이야기를 창조하는 사람의 평소 가치관, 사상일 것이고 또 방향일 것이다.

절도나 살인 혹은 강간을 넣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일 수도 있고, 절도나 살인 혹은 강간을 넣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런 가해 행위를 당해도 싸다는 것을 말하는 수도 있다. 이야기는 '나쁜 짓 하면 안돼'로 끝맺지만 그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과 문체, 흐름에 있어서 '으이고 당해도 싸네'라는 생각을 독자나 관객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거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갈릴 수밖에 없고, 바로 그 지점에서 같은 '가해'를 다뤘음에도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있고 졸라 까대야 되는 이야기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범죄를 다뤄서가 아니다. 범죄나 가해는 어떤 이야기에도 등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서 뭘 보여주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거다.



최근에 본 좀비 영화 두 편이 그에 해당한다. '좀비'를 다룬 것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게 여자주인공 이라는 것은 같지만, 그러나 보여주는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데이 오브 더 데드:블러드라인》의 '조이'는 의대생이다. 시체를 해부하고 기증되는 혈액으로 이것저것 연구하는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데, '맥스'라는 남자가 그 날도 어김없이 그녀를 찾아와 혈액을 기증하고자 한다. 그의 항체는 여느 사람들과는 좀 달라서 연구 가치가 있는데, 그는 꼭 조이에게만 혈액을 주고자 한다. 언젠가는 조이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줄거라 생각하고 조이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데, 조이는 그랑 둘만 있는게 싫어 그의 혈액 채취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지만, 그가 꼭 그녀를 칭하는 바람에 피할 도리가 없다. 그는 자신의 팔에 새긴 조이의 이름을 보여주고 그녀를 강간하려 한다. 그러나 시체실의 한 시체가 깨어나 좀비로 돌변해 맥스를 물고 조이는 그 자리를 피하게 된다.


시간은 흘러 세상은 수많은 좀비들로 가득차있고 조이를 비롯한 살아있는 인간들은 요새를 이뤄 그곳에서 생활한다. 조이는 그 안에서 의사로 생활하면서 열병에 걸린 아이를 치료하고자 하는데, 가지고 있는 항생제가 말을 듣지 않는다. 자신의 학교 약보관실에 더 좋은 항생제가 있으므로 그것을 가지러 다녀오자고 그 요새를 지키는 대장에게 말하고, 그러다 좀비에 감염되거나 좀비를 끌어들이게 되면 위험하다는 반대를 무릅쓰며, 항생제가 있어야 우리를 살릴 수 있다, 저 열병은 전염성이 있다, 고 말하는 거다. 그렇게 몇몇 군인을 이끌고 학교로 가 약품을 가져오는 도중 좀비에 물리는 희생자가 생기고, 그 학교에 내내 머무르던 좀비 맥스는 그녀가 타는 차 밑에 숨어들어 요새로 침입한다.



조이가 항생제를 가져오고자 한 것은 옳은 일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 항생제를 가져와야 한다는 조이의 말에 힘을 실어줬을 것이다. 아이 하나를 살리자고 부대원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대장의 말 역시 타당하지만, 그러나 항생제를 가져와 그 열병의 전염을 막는 것이야말로 사람으로서, 의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나는 아이를 살리는 일이라면 무조건적으로 그 사람의 편이 된다.





따뜻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자자리 여성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관대한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아이들과 약자들을 여성스러운 연민으로 감싸안아 주는 사람입니다. - 《당신의 별자리 사자자리》, 린다 굿맨, p.72







그런 한편 분명 희생자도 발생했기 때문에 여기서 갈등의 지점이 생긴다. 아니, 생겨야 한다. 아, 사람들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가,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희생을 감당하면서 이렇게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나는 조이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갈등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 갈등을 하게끔 풀어가지를 않는다. 나는 억지로 그 갈등 속으로 나를 밀어넣었지만, 이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어휴 저 여자 때문에 사람이 죽었네' 하게 되고, '저 여자가 저러지만 않았어도 좀비가 들어오지 않았을텐데' 하게된단 말이다. 좋은 일 하자고 앞장서는 민폐 캐릭터가 되어버리는 거다.



결국 요새 내에서도 물리는 사람이 생기고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은 맥스를 맞닥뜨리게 된다. 이 놈의 맥스는 정말이지 징글징글한게, 엄청 특이한 항체를 가지고 있어서 좀비에게 물렸어도 백프로 좀비가 안되고 인간의 생각과 자질이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이를 본 순간 조이를 무작정 따라오게 된거다. 인간 남자였을 때도 스토커였던 맥스는, 좀비가 되어도 스토커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스토커 맥스는 다른 인간들을 물지언정 조이는 '내 거'이기 때문에 물지 않는다. 조이에 대한 사랑으로 거기까지 왔고 조이에 대한 사랑으로 조이를 물지 않아.... 어쩌라규.......

어째서 스토커와 진정한 사랑이 이렇게 종이 한 장 차이인것처럼 얘기하냐구!!

스토커는 맥스고, 강간을 시도한 것도 맥스인데, 왜 조이한테 화나게 만드는거냐. 왜!

그리고 스토커여..왜 인간이어도 스토커이고 좀비어도 스토커인가. 제발 이 세상에 스토커들아 좀 사라져라. 진짜 싫다.





이수정: 경계성 성격 장애인의 행동 저변에는 어린 시절부터 욕구 충족이 안 되어 생긴 결핍이 깔려 있습니다. 결핍은 쉽게 채워지지 않으니 감정 기복이 굉장히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집착하는 대상과의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쪽만의 일방적인 관계가 만족을 주기란 어렵죠.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 <미저리>, P163











요새의 군인들은 그를 묶고, 조이는 그런 맥스의 피를 채혈해서 이제 백신을 만들고자 한다. 역시나 요새 안의 사람들은 이 좀비를 죽이고 싶어했지만, 조이가 '백신은 결국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거라고요! 반드시 만들게요! 날 믿어줘요!' 하면서 그 좀비를 살려두고...........이 과정에서 묶인 맥스 앞으로 가 '정말 더럽게 못생겼네'하고 맥스를 무시하는 여자군인 때문에 맥스는 묶인 줄을 풀게 되고 요새 안은 좀비 판이 되고.....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야, 이 영화 감독은 철저하게 남자구나, 라고 생각했다. 선한 의도를 가진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 그녀가 행한 건 숱한 민폐였다. 요새 안의 사람들? 다 죽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도 물렸는데 그렇게 자살하려고 하는 그에게 '백신으로 치료해줄게'해서 만들어본 백신을 투여해 결국 애인을 살려. 그러나 그 백신을 만들기 전에 이미 사람들 다 죽었는데?



물론 우리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위대한 연구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걸. 하다못해 화장품 하나를 만들어도 동물을 희생시키지 않나. 우리 편을 살리기 위해 상대편을 죽이는 일도 일어나고.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죽어가게 되는 생명들이 많다. 결국 백신을 만들기 위해서, 그러니까 지구에 인간이 남아있도록 하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거다. 조이는 백신을 결국은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조이가 죽인 게 아니다. 애초에 왜 좀비가 생겼는지도 나오지 않고, 좀비가 사람을 문 것은 조이가 지시한 것도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조이에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뭐야 이 여자 때문에 좀비 들어왔잖아, 이 여자 때문에 사람들 다 죽었네' 하게 되어버리는 거다. 게다가 여자 군인도 마찬가지. 그녀가 '무시했기 때문에' 좀비 맥스가 빡쳐서 묶인 사슬을 풀 수 있게 되는 거다. 감독은 여자 주인공을 앞세워 여자 주인공의 업적을 보여줄게, 라고 보란듯이 내세웠지만 결과적으로 여성혐오를 조장한다. 그러니 여자 주인공이 백신을 만들어 인류를 구하지만 개짜증나는 영화가 된다니까?


이 영화의 포스터를 가져올까 싶어 검색해보았더니 제일 처음 보이는 이 영화에 대한 한줄 리뷰가 '여주인공때문에 암걸리겠다'는 거였다. 그 밑으로 별 한개의 리뷰들이 가득했다. 다 여주인공 욕을 하고 있었다. 백신을 만들고 세상을 구했지만, 욕이란 욕을 다 먹게 만드는 그런 영화인거다.





그러나 이 영화, 《리틀 몬스터》는 다르다.


여자주인공 '캐롤라인'은 유치원 선생님이다.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님. 그녀는 남자 학부모들의 대시가 너무 끔찍해서 왼쪽 약지에 반지를 끼고 다닌다. 자신에게도 불행한 시절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주는 존재라는 깨달음 뒤에 유치원 선생님을 하면서 아이들을 진정 사랑으로 보살핀다. 그런 아이들을 통솔하여 야외학습을 갔는데, 바로 거기에 좀비떼가 나타난다.


다행스럽게도 이 영화속 좀비들은 느리다. 뛰지도 않고 지붕 위로 점프하지도 않는다. 유리창을 주먹으로 박살내는 일도 없다. 그러니 기념품가게 안에 캐롤라인과 아이들이 숨어들었을 때, 이 좀비들이 공격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밖에는 좀비들이 있고 안에는 아이들이 있는 상황에서 캐롤라인은 용기와 지혜를 보여준다. 글루텐 알러지가 있는 아이가 호흡이상 증세를 보였을 때 그 아이에게 놓아야할 주사기가 들어있는 가방이 밖에 있다는 걸 안 선생님은 밖으로 나가 좀비들과 맞서며 그 가방을 가까스로 가져와 결국 아이의 호흡을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아이의 삼촌은 분명 엄마가 주사 놓는 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말을 건성으로 듣고 안에 있던 주사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의 인기있는 남자 스타도, 그리고 아이의 삼촌도, 겉모습은 성인 남자이지만 어른이 아니다. 철이 덜든 인간들. 이렇게 철이 들지 않은 성인 남자들 때문에 아이들을 보호하고 좀비와 싸우는 게 여자 선생님 몫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일을 아주 잘해낸다.


철들지 않은 성인 남자를 보는 게 너무 답답했지만, 이 영화는 우리가 평소 약하다고 생각한 아이와 여성이 얼마나 용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 보고나면 친여성, 친아이적이네, 샤라라랑~ 이렇게 되어버려. 물론 아이들이 여러명 등장하지만 이 영화를 여기에 출연한 아이들이 볼 수 있을지는...다른 문제지만(볼 수 없을 것 같다), 좀비를 다루고 여성주인공이 인간을 구한다는 스토리는 같은데, 위의 영화 《데이 오브 더 데드》와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됐다.






- 일전에 남자1과 술을 마시면서 나한테 일어난 일을 얘기한 적이 있다.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나름의 고민이었고, 내 고민속에는 나 말고도 남자2와 여자1이 등장했다. 남자 2가 나한테 할거라 예상되는 행동을 해주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 때 남자1이 내 말을 다 듣고는 내게 그랬다.


"남자2가 네 생각만큼 널 좋아하지 않았나보지."



아?! 나는 그때 너무 깜짝 놀랐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당연하게도 나는 그에게 내가 당연히 우선 순위일 거라고 생각한거다. 그가 나에게 우선순위이니 나 역시 그에게 우선순위일거라고, 너무나 당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상대를 10만큼 좋아한다고 해서 상대가 나를 10만큼 좋아하리라는 보장이 어디있는가.



여자2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나는 남자3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다. 그 때 여자2가 내게 그랬다.


"남자3이 너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나보지."


아?! 나는 내가 남자 3을 110만큼 좋아하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히 남자3이 나를 110만큼 좋아할거라고 생각했었나보다. 그의 애정은 고작 98정도였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110에 대한 기대치를 가졌던 것.



오늘은 위의 일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사소한 일들을 마주하고 나는 오늘, '아 내 생각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한 것. 내가 우선순위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나에 대한 애정이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다는 것을, 오늘은 새삼 나에게 일깨워줘야 했다. 약간 가슴이 아팠지만, 살아가다보면 무수히 겪게 될 일이다. 그러니 극복해야지.





- 어제는 오랜만에 팬레터(?)를 받았다. 가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럴때마다 여전히 신기하다. 나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그저 내가 쓴 글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서 좋다고 혹은 위로를 받았다고 고맙다는 말들을 전해온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린다. '네가 글로 덕을 쌓았다'고 했던 말. 선한 의지를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기도 쉽지 않은데 나는 나좋자고 한 일이 이렇게 선한 행동이 될때가 있는 것 같다. 온갖 스트레스로 두드려맞고 있다가도 히힛 하고 좋아하게 된다. 팬레터 감사합니다.

:)



나, 잘 자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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