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살면서 성추행이나 성범죄에 전혀 노출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 '나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어'라고 생각하는 여자라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언지 인지하지 못한 것일 확률이 크다. 혹은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라 사소하게 여겨 무뎌졌을지도. 일전에도 나에게 여자1이 '너는 어쩌면 그렇게 그런 일을 많이 당했냐'라고, 마치 성추행을 당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한 적이 있는데, 여자1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언급했을 때에 그중에는 성폭행이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지만 여자1은 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자1에게 그것은 성폭행이 아닌, 그저 어쩌다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때야 알았다. 많은 여자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언지 모르는 채로 살거나 혹은 인정하려 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데 그것을 내가 성폭행이라고 지적해도 될까. 그건 그녀에게 못할짓이란 생각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일에 대해 나는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 생각한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사자도 아닌 내가 '너는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스물다섯에 당했던 것을 이제야 돌이켜보고 '아 그건 사랑이 아니었구나', '지금이라면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구나' 깨달았던 것처럼, 아마 그녀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 그 때 그건 그렇게 대응하면 안되는 거였구나'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마도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당한게 무엇인지 모르는채로 저마다의 죄책감-갖지 않아도 좋을-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저는 강간을 당한 느낌이었지만,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어요. 그저 제 자신이 마지못해 그 행위에 참여한 듯한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사실 저는 그 남자보다도 저 자신을 탓했죠. 상대방이 마약을 먹이거나 때려서 여자를 쓰러뜨린 후 강간한 다음 살해했다는 것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여자한테 책임이 있는 거라고 늘 생각해 왔거든요.
사건이 일어난 밤에도, 고환을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눈을 가격해서 그 남자애를 다치게 해도 된다는 식의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착한 여자애는 그렇게 하지 않잖아요. 그 대신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놔두고 결과에 순응해야 하지요.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로빈 월쇼, p.65-66


















아마 성추행과 성폭행의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가해자에 대한 변명일 것이다. 가해자 스스로가 하는 변명이 아닌, 가해자를 아는 사람들이 해주는 변명들.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나한테는 한 번도 그런 적 없는데..'라는 말들. 나는 이 말이야말로 너무나 무지하게 피해자를 두 번 공격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가 존재하고 사건이 존재하는데, 가해자가 '그럴 리 없는'사람이라는 타인의 증언은, 도대체 무슨 효용이 있는가. 그 말을 피해자에게 왜 하는걸까. 그렇다면 피해자 앞에 일어난 그 사건은 무엇이 되는가.



이 책에서는 지금 대한민국의 수많은 문제들과 그러므로 어떠한 제도들이 생겨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양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이수정 박사님은 작정하고 나와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주장한다. 의제강간 연령을 높여야 한다는 것도, 스토커 방지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아동 유인 방지법이 필요하다는 것도 모두, 이 책 안에 실려 있다. 현실과 제도적 장치에 대해서 이수정 박사님의 말씀은 모두 다 밑줄 그을만한 것들인데, 이다혜 기자님의 상황을 보는 눈도 이 모든 이야기들이 밖으로 나오는데 크게 한몫한다. 나는 특히나 이다혜 기자의 이 말이 아주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이다혜: 오히려 뒤에서 숨길 짓을 하는 사람일수록 앞에서 더 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척하나 봅니다. 그래야 자신들에게 올 공격이나 비난을 예상하기 쉽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피해 갈 여지가 생길 테니까요. (팔려 가는 소녀들, p.387)




사건이 존재하고 피해자가 존재하는데 거기다 대고 '(가해자가) 그럴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들은, 아마도 그들 모두가 '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앞의 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복합적이고 부조리하다. 작게는 내가 오늘 사람1에게 멋진 사람일 수 있고, 사람2에게 닮고 싶은 사람일 수 있으면서 동시에 사람3에게 상종 못할 쌍년이며 사람4에게 과격하고 몰상식한 사람일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도 그리고 일상을 살면서도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보이고 싶은 면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어떤 면은 감추고 싶어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비밀이 있으니까. 그 비밀을 누군가에게는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비밀을 대다수에게는 숨기는 경우도 생긴다. 이 비밀까지 알면서도 나를 좋아하려고 할까? 그런 것들은 나의 비밀을 안으로 감추는데 큰 역할을 할것이다.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나를 비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인간은 다 그런 존재이겠지만, 그러나 중요한 건 '적극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데 있는게 아닐까. '적극적으로' 어필하려는 바로 그 지점이 '적극적으로' 숨겨야 할 지점을 함께 가져가는 게 아닐까. 일전에도 내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을 가져와 얘기한 바 있지만, 세상에 너무나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알려진 변호사가 바로 자신이 지원하는 청소년을 성착취 하는 남자였다.
















닐스 비우르만은 그린피스 회원이며, '청소년을 위한 봉사 활동'등을 통해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한 존경받는 변호사로 소개되고 있었다. 한 단에는 비우르만의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이며, 그와 같은 건물에 사무실이 있는 루네 호칸손 변호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싣고 있었다. 호칸손은 비우르만이야말로 힘없는 사람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후견위원회의 한 공무원은 "피후견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에 대한 진정한 봉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구판, 2부-하권, 스티그 라르손, p.129



만약 리스베트가 사람들에게 '닐스 비우르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리스베트에게 '그 사람이 그럴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했을 것이다. 성폭행이라는 사건이 있고 피해자인 리스베트가 있지만, 그러나 가해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리스베트와 성폭행은 허공으로 흩어지는가. 그 사건과 피해자는 어떻게 되는걸까. 밀레니엄에서 리스베트가 자신이 직접 이 일에 대해 응징을 하는 것은,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너무나 '당연한' 처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가해자는 처벌받았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걸 경험한 피해자로부터.



이다혜: 성범죄가 일어나면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으니 피해가 아니라고 하고, 가해자도 가해자답지 않기 때문에 가해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건과 피해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대체 어쩌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수정: 누가 연쇄 살인을 저지른 후 연쇄 살인범 티를 내고 돌아다니겠어요. 그러면 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을 무려 삼십오 년 동안 못 잡았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성범죄자도 마찬가지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p.352)



이미 오디오파일로 들어왔던 터라 익숙한 내용들이 책에 있지만, 내가 몰랐던 사실이 이 책의 <작가 후기>에 실려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이수정 박사님은 '망막 박리증'을 앓고 있어 한쪽의 시력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는 것.



주로 글을 쓰는 것으로서 존재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연구자에게 눈 하나를 잃는다는 것은 경력 단절을 의미할 수도 있었기에 당시 나는 절망적이었다. 수술한 눈에 가스를 가득 채우고 한 달은 엎드려 있어야 했던 바로 그때, 글 대신에 말로만 해도 되는 일,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풀어내면 되는 일이 다가왔다. 최세희 작가와 조영주 작가, 그리고 이다혜 기자와 함께한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내가 아직 쓸모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작가 후기, 이수정, p.394




작가 후기를 읽으면서 출근하는 지하철 안, 가방안의 손수건을 꺼내 몇차례나 눈물을 닦았다. 이 프로그램에 관련된 네 명의 연대가 너무나 고마워서. 모두가 어떤 마음으로 이 프로에 임했는지를 아는 일이 벅찼다. 아마도 우리가 '세상은 아직 괜찮은 곳이야'를 말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위의 인용한 문장은 특히나 더 좋았는데,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풀어내면 되는 일'이라고 이수정 박사님이 지식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이다. 본인이 가진 지식.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 나는 여성들이 더 공부하고 더 많은 것들을 습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서 그것으로 나를 채운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더 많아질테니까. 이미 알고 있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내보임으로써 일을 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고 세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이수정 박사님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풀어내면 된다'고 말할 수 있기 까지는 숱한 시간들이 있었다. 대학을 가고 유학을 가고 일을 시작하고 그렇게 경력을 쌓아가야 했던 수많은 시간들. 그 안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어려움들도 무수히 많았을 것이고. 그러나 결국 그 시간들은 차곡차곡 쌓여서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이루고, 눈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서도 무언가 쓸만한 것을 내보일 수 있게끔 하는 거다. 너무 좋지 않은가!



여러분, 지식을 쌓자. 차곡차곡 계속해서 지식을 쌓자. 그건 결국 다 내것이 되고 그것이 결국 나를 구할것이다. 지식을 쌓자.


이수정: 앞서 제가 임신한 상태에서 폭행하는 것은 결정적 징후다, 이것은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또 한 가지 반드시 피해야 할 징후가 폭행 끝에 성폭행, 부부 강간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징후가 보인다면 이 관계는 반드시 끝내야 합니다. 법적으로 개입을 해서라도, 강제력을 동원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적과의 동침) - P53

이수정: 저로 하여금 평생 동안 이런 일을 하게 만든 이유가 바로 그 분개심입니다. ‘아, 이건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내가 눈곱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어 이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 보고 싶다.‘는 마음이 이 일을 하게 했어요.(돌로레스 클레이번) - P69

이수정: 경계성 성격 장애인의 행동 저변에는 어린 시절부터 욕구 충족이 안 되어 생긴 결핍이 깔려 있습니다. 결핍은 쉽게 채워지지 않으니 감정 기복이 굉장히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집착하는 대상과의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쪽만의 일방적인 관계가 만족을 주기란 어렵죠. (미저리) - P163

이수정: 범죄학에는 여성 범죄자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악녀 가설‘이 있습니다. 보통 피의자가 여자라면 경미한 폭력 범죄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데 여자가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면 여자가 감히 사람을 죽이다니! 하며 남자보다 형량이 훨씬 높아진다는 거죠.
고유정 사건을 보면, 시신을 훼손한 살인 사건은 예전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범인이 거의 다 남자였잖아요. 그러다가 이번에 여자 피의자가 나오니 이름도 굉장히 빨리 공개되고, 유달리 수선을 피우면서 고유정이 대체 누구냐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죠. 고유정이 우리의 선입견을 깨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포털 사이트 뉴스 댓글을 보면 알겠지만 죽여라, 사형시켜라 하는 분위기 아니겠어요.
악녀 가설은 이처럼 ‘여성이라면 당연히 ○○ 해야 한다‘는 선입견, 전형성을 벗어나는 살인 피의자는 오히려 더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가설입니다. (숨바꼭질) - P263

이수정: 경제력의 가치만 본다면 기생충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희는 아이를 키우잖아요. 저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본질적으로 기생충이 될 수 없다고 보거든요. 이 영화의 스토리는 아이를 키우는 행위의 본질을 평가 절하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이 여성은 아닐 거라고 추측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어요. (숨바꼭질) - P265

이다혜: 성범죄가 일어나면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으니 피해가 아니라고 하고, 가해자도 가해자답지 않기 때문에 가해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건과 피해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대체 어쩌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수정: 누가 연쇄 살인을 저지른 후 연쇄 살인범 티를 내고 돌아다니겠어요. 그러면 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을 무려 삼십오 년 동안 못 잡았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성범죄자도 마찬가지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 P352

이수정: 미국에서는 16세 미만의 경우 아무리 합의된 성관계라 해도 성폭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강간을 당한다.‘라는 표현이 성립됩니다. 하지만 한국은 의제 강간 연령에 의거해 만 12세까지만 보호를 하다 보니 13세 부ㅌ터는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성매매 청소년으로 처벌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팔려 가는 소녀들) - P368

이수정: 가정을 대체할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많이 부족합니다. 학교 밖 청소년 지원은 여성가족부 소관입니다. 그래서 여성 가족부가 지역사회 청소년 상담 복지 센터와 연계해 ‘위기 청소년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데, 문제는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팔려 가는 소녀들) - P379

이다혜: 오히려 뒤에서 숨길 짓을 하는 사람일수록 앞에서 더 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척하나 봅니다. 그래야 자신들에게 올 공격이나 비난을 예상하기 쉽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피해 갈 여지가 생길 테니까요. (팔려 가는 소녀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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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0-07-28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팟캐스트 좀 듣다가 (무서워서...) 말았는 데 책으로 읽어봐야겠어요. 저도 다락방님 덕에 이수정 교수님 입덕했습니다! 너무 머시써 엉엉 ㅠㅠㅠ

다락방 2020-07-28 11:31   좋아요 1 | URL
이수정 교수님은 충분히 입덕할만 하지 않습니까! ㅎㅎ

저는 책으로 읽어야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방송을 듣는 쪽이 더 나았던 것 같아요. 방송에서는 이수정 교수님과 이다헤 기자님의 목소리로 생생한 감정(대부분 분노)이 전해지거든요. 그래서 들으면서 같이 분노하게 되어가지고... ㅎㅎ

그렇지만 책은 매우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공쟝쟝 2020-07-28 20:28   좋아요 0 | URL
제가 확실히 인식한게 여자는 인질이다 서문이엇지요, 아마?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