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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본다 ㅣ 미드나잇 스릴러
클레어 맥킨토시 지음, 공민희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불법촬영, 스토킹, 데이트앱, SNS, 강간, 살인, 그리고 남자-아들, 남편, 애인, 직장동료-와 함께 살아가는 이 시대의 여자들이 미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게 더 안타깝다. 실질적인 위험이 닥쳐와도 '내가 예민한건가' 스스로 검열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가 미친년 취급 당할까봐 걱정해야 하고. 게다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오래 반복해야 하는걸까. 왜 위험에 노출되는 것도, 공포에 휩싸이는 것도, 죄책감에 가슴을 치는 것도, 네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것도 여자들의 몫일까.
저자 '클레어 맥킨토시'는 12년간 경찰로 근무한 뒤 작가가 되어 이 소설을 썼다는데, 경찰로 근무하면서 얼마나 많이 억울하게 죽어간 여자들을 목격했을까. 여자가 자기 앞에 닥친 위험을 신고했는데 그냥 돌려보내는 경찰들이 영국에도 있다.
'조'는 퇴근길에 신문을 보다가 데이트앱 광고에 자신의 얼굴이 실린걸 보게된다. 자신은 애인과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고 데이트앱은 사용해본 적도 없는데. 애인은 그저 사진이 도용당한 거라며 예민하게 대응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조는 그럴 수가 없다. 게다가 그 뒤에 일어나는 여성을 향한 소매치기, 살인, 강간 사건들의 피해자가 그 광고속의 여성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그래서 경찰에 이 일을 알린다. 담당형사는 그 제보를 크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준 여성경찰이 연관성에 대해 주장하며 사건 해결에 합류한다. 피해자들이 실렸던 데이트앱의 사이트는 암호를 넣고 들어가면, 여성들의 외모부터 하루 일과까지 다 공개되어있다. 그녀가 타는 지하철, 자주 앉는 자리,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 그리고 사진까지. 남자들은 돈을 내고 그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원하는 여성들의 자료를 다운받고, 그녀들의 동선 그 어디쯤에 느닷없이 나타나 그녀에게 마치 우연인듯 자연스레 다가간다. 그렇게 소매치기를 하고, 강간을 하고, 살인을 한다.
조에게 접근했던 남자는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버느라 데이트할 시간이 없었고, 이제 데이트를 좀 해보자 하니 여자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야할지 몰라 이 사이트를 이용한다. 게다가 여자로부터 호감을 얻기 위해 백기사 역할을 자초한다. 백기사 신드롬이란 말을 이 책에서 처음 보았는데, 이 남자가 백기사 신드롬에 빠져있는 장면에서 나는 어릴적에 내가 보았던 숱한 한국영화들을 떠올렸다. 왜, 우리도 그런 장면 다들 한 번 이상씩 보지 않았나. 한 여자에게 호감을 가진 남자가 그 여자로부터 호감을 얻기 위해 자기 친구나 지인들에게 부탁해 그녀를 둘러싸고 범죄를 저지르도록 시키는 장면, 그리고 그 때 남자가 그 자리에 딱- 나타나서 여자를 구해주는거지. 멋지게 구하면 멋져서 그 남자는 여자로부터 사랑을 받고 얻어 터지면 얻어터져서 동정심에 사랑을 획득하는 그런 장면, 우리 봤잖아. 책 속의 조가 위험에 노출됐다가 구해지는 연출된 장면으로부터 나는 한국영화의 그런 장면들을 떠올렸고, 어릴 적에 별 생각 없이 봤던 그 장면들이 얼마나 큰 여성에 대한 위협인지를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남자랑 사귀게 되는 로맨스의 한 부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막상 낯선 남자들이 내 주위를 둘러쌌을 때 내가 느낄 공포는 무엇일까. 영화에서는 언제나 남자와의 로맨스로 끝맺었지만, 그 여자는 남은 인생에 수시로 악몽에 시달리고 그 두려움이 떠오를텐데. 남자들은 '여자를 얻기 위해'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아주 사소한 일로부터도 여성들은 공포를 느낀다. 내 허락 없이 내 얼굴을 촬영하는 것(심지어 어디다 전송까지 했단다),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발소리 같은 것들. 그게 이 책안에서 여성들의 출퇴근길에, 일을 하려는 데에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들이다.
사람은 다 달라서 하나의 사건에 대해 느끼는 바도 그리고 영향을 받는 바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책 속에서 언니는 동생이 당한 강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동생이 그 일로 아플까봐, 트라우마에 시달릴까봐, 자신이 더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동생이 강간범에 대해 기소하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고 혼란스러워한다. 왜, 그 놈을 잡아야지, 그 놈을 잡아 족쳐야지, 어째서 너는 그 일이 있는데도 마치 없는것처럼 살아가려는거야. 이 일로 사이좋은 자매는 수시로 긴장감을 형성하는데, 시간이 흐른 후에 비로소 언니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범죄자를 쫓으려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에 더 기쁜 일들을 떠올리며 그 일을 잊고 싶어한다는 것을. 서로에게 상처인 이 일에 대해 받아들이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울면서 눈물을 닦았다. 강간을 저지른 건 강간범인데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생각한 언니여야 한다는 건,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거 아닌가.
등장인물인 조의 성격이 좀 짜증나서 초반에 읽기가 힘들었지만, 다 읽으면서는 경찰로 일했던 여성이 쓴 책이라는 게 너무 좋았다. 여성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의심과 피해의식까지,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 썼으니까.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서 강간피해자인 여성이 강간범을 만나면 묻고 싶다고 했다. '왜 나였냐'고, 자신의 어떤 점이 강간범을 자극한거냐고 묻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다시 살 거라고. 자신의 하루 일과중에 그 부분을 바꾸겠다고.
피해자들은 모두 자기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어떤 행동을 한 게 아니라 아침이면 일어나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저 자기 삶을 사는 사람들.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이 범죄자를 자극한 게 아니라, 범죄자는 그저 범죄를 저지르고자 하는 욕망이 있던 거였다. 조의 동생도 조에게 말한다. 언니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 게 아니라,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고자 작정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클레어 맥킨토시는 지금을 사는 작가이고 그래서 현재를 말한다. 데이트앱, 인터넷, 페이스북, 페이팔.. '여자를 찾고 싶어' 컴퓨터 앞에 앉거나 태블릿을 손에 쥔 남자들은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이거나, 남편이거나, 남자친구이거나, 회사 동료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말 그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