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는 도서관에 가 책 몇 권을 빌렸다. 그중에는 정희진 쌤이 공저자로 참여한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이 있다. 다른 글은 관심이 없는데 정희진 쌤의 글만은 읽고 싶어 책장에서 꺼내와서는 자리 잡고 앉아 정희진 쌤의 글을 읽었다.
















2007년의 강연을 책으로 낸것이니 한참 전의 글이다. 어느 부분에서는 대답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대답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시간이 흐른만큼 이 글에서 나타난 생각과는 또 많은 부분들이 달라져있지 않았을까 싶었던 거다. 어쨌든 이토록 오래전의 글이라 해도 무척 좋다. 아, 역시 정희진 선생님이다, 감탄했다. 지금에야 간혹 흐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의문을 품고 고개를 갸웃하긴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세상에 나온 정희진 선생님의 글들이라면 모두 찾아 읽고 싶고 외우고 싶다. 사고의 확장이란 게 무엇인지 정희진 선생님 덕에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까. 선생님의 모든 글을 외우고 싶다고 해서 외워진다면 좋겠지만, 크... 그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워..


또한, 내가 아무리 책을 읽고 공부한다고 해도 정희진 선생님을 따라갈 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전에 제자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표는 결국 청출어람이 아닌가, 라는 글을 쓴 적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스승을 앞서는 제자가 될 순 없을 것 같다. 게다가 그 스승이 정희진 선생님이라면..  배우고 싶고 공부하고 싶지만, 그런 한편 공부해서 뭐하나, 싶은 마음도 동시에 든다. 해봤자 나는 이렇게 똑똑해지지도 못할텐데, 따라잡지도 못할텐데, 그래봤자 고만고만할텐데...하고 의기소침해지는 거다.


어쩌면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읽으면서 느끼는 기쁨이 전부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정희진 선생님의 글을 읽고 감탄하고 기뻐하는 것, 그것이 내가 독서에서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해봤자 내가 여기서 뭐 더 어떻게 되겠어, 그냥 읽고 감탄하고 기뻐하는 거지. 설사 그렇다해도 나쁘지 않다. 이렇게 정희진 쌤 글 읽으면서 기뻐하는 건 그것 자체로 좋으니까.


좀전에는 캐서린 맥키넌의 책을 다 읽었다. 북마크를 여러개 붙였고, 여기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아 내일 아침에 정리해 페이퍼 쓸 생각이다. 안드레아 드워킨의 책까지 같이 읽고 쓰고 싶지만, 하아, 상호대차로 신청한 책을 ㅠㅠ 동대문 도서관에서 잘못 보내줬다. 리스트는 맞게 뽑아서 보내주고서는 책은 다른 걸 줬어 ㅠㅠ 결국 동시에 읽을 수 없었다. 흑흑.


어쨌든 정희진을 읽고 맥키넌을 읽고 ... 너무 좋은 것이다.



이 사람들의 글을 읽고 달달 외우고 싶다.

지적인 이상형들이다 ㅠㅠ


남녀평등은 남성이 여성과 같아지는 것인가요? 아니면, 여성이 남성과 같아지는 것인가요? 여성과 사회적 지위가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남성은 거의 없을 겁니다. 여성이 남성과 같아지는 것은 평등이고 ‘여권 신장‘인데, 남성이 여성과 같아지는 것은 아마 남성분들 대다수가 추락으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청중 웃음) 여성에게 "남자 못지않네"라고 하는 것과 남성에게 "계집애 같은 놈"이라고 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의미 자체가 이미 불평등하다는 거죠. 남녀평등, 양성평등 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 P224

저는 평등의 기준을 문제 삼고 싶습니다. 남녀평등을 위해 남성들은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서, 왜 여성에게는 군대에 가라고 합니까? 평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평등을 위해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구조를 개선해야지,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아지기 위해 장애를 ‘초월‘하고 ‘극복‘해야 하나요? 평등은 공정한 것, 사회적 정의를 원하는 것이지, 똑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들이 남성하고 같아지겠다고 남성들이 여태까지 잘못해온 고문이나 전쟁 같은 일까지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다양한 차원에서 "여자도 군대 가라"라는 이야기를 비판할 수 있겠지요. - P224

여성주의는, 어떤 면에서 여성이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이라는 사회 제도를 문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성별 때문에 여성(남성)들이 이익을 보기도 하고, 차별을 받기도 하죠. 예를들면, 대개 남자 아이에게는 하늘색 내복을 입히고 여자 아이한테는 분홍색 내복을 입히죠.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어요. 이런 걸 가지고 저 같은 사람이 성차별이니 인권 침해니 억압이니 하면, 정신 나간 여자가 되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때가 속 비트‘라든가 ‘강력 슈퍼타이‘같은 세제의 포장지는 다 푸른색이에요. 강력함을 나타날 때는 푸른색을 쓰죠. 그런데 ‘울샴푸‘같은 섬유 유연제들은 다 분홍색이거든요. 어린아이들에게 성별에 따라 내복을 입힐 때는 그 자체가 사회적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지요. 그런데 푸른색이 힘을 상징하면서부터는 사회적 의미가 발생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남성성하고 연결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되는 것이죠. - P226

일단 자본주의 사회에는 남자와 여자 두 개의 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 곧 남성만 존재하죠. 이분법은 하나만을 위한 세계고나 입니다. 여성은 남성의 대립적, 대칭적 범주가 아니라 잔여지요. 곧 남성은 남성이지만,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아닌 존재‘를 의미하지요. - P227

누군가 제게 농담 섞어서, "보통 여성주의자들이 재수 없는 말을 많이 하니까, 그런 이미지를 상쇄시키려면 페미니스트들도 예쁘고 섹시하면 된다"라고 말해서 충격받은 적이 있습니다. (청중 웃음) "사람들이 너를 싫어하는 것은 네가 페미니즘을 말하기 때문이 아니고, 못생겨서 그렇다"라는 거예요. 페미니스트든, 간첩이든, 강도든 간에 여자는 예쁘면 만사 오케이라는 거니다. 간첩 얼짱, 강도 얼짱...., 이게 다 그런 이야기 아닙니까? 여성의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활동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그러니까 저한테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해서 예쁘게 하고 다니라는 거죠. (청중 웃음) <황진이>같은 드라마들이 사람들에게 여성의 미모가 얼마나 대단한 자원인가를 학습하게 하지요. 그런데 사실 여성은 또 너무 예뻐도 안 돼요. 너무 예쁘면 실력이 없어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어차피 이중 메시지예요. - P229

가부장제에 대한 정의 중에 이런 게 있어요. 가부장제는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언어"다. 여성이 아이를 낳기 때문에, 계보를 따진다면 인간사회는 여성 중심일 수밖에 없어요. 모계일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면, 어떤 여성이 열 명의 남자하고 잤다고 칩시다. 그러면 임신한 아이가 누구의 애인지는 여성 본인만 알죠. ‘성(姓)‘이라는 글자에 계집 녀 변을 쓰는 것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계보를 남성이 가족제도로, 언어체제로 여성의 권리를 삐앗아간 거죠. 남자의 승인이 있어야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며 상속도 가능하고, 동성동본을 따지는 것도 남성의 성이 기준이 되죠.
결국 아이는 여자가 낳는데, 그것에 대한 소유권과 시민권을 남성이 독접한 것이 가부장제입니다. 그리고 여성의 노동력과 몸에 남성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썬 남성의 계열로 만든 것이 족보죠. - P231

쉽게 이야기하면, 계열을 만드는 노동과 일은 다 여성들이 하는데, 남성이 자신들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름을 붙이고 조직한다는 것입니다. - P231

제가 좋아하는 사람 중에 프란츠 파농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인도 제도에서 태어난 정신과 의사인데, 알제리 혁명투쟁에 참가해서 민족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서른여섯 살에 죽었죠. 그런데 파농한테 흑인들을 고문하는 유럽 제국주의 경찰이 정신과 상담을 청합니다. 어차피 고문하는 것이 직업이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죄의식도 느끼기 싫고, 직장을 잃기도 싫으니까요. 하지만 이 둘은 굉장히 양립하기 어려운 거잖아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여학생들이 자주 합니다. "선생님, 여성주의를 괴롭지 않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사람마다 괴로움과 쾌락의 정의가 다르겠지만, 고통 없는 앎은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 P233

남성들은 계급이나 권력 등 자원이 많을수록 여자들이 많죠? 어떤 의미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동산(動産)‘이잖아요. 모든 남성이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들이 자기 여자친구나 부인한테 살 빼라고 말하는 이유가 뭐예요? 여성의 미모가 자기 계급을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부자가 미인을 얻는다‘등이 그런 말들이죠. 예쁜 여자는 남성의 자존심이나, 남성이 갖고 있는 재산 가운데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반면에 계급이 낮은 남성들은 여자가 없죠. ‘농촌총각 문제‘가 이런 거지요. 성매매는 계급이 낮은 남성들이 한 명의 여성도 ‘가질 수 없기 대문에‘ 전통적인 집결지(‘사창가‘)에서 한 여성을 많은 남성들이 공유하는 거잖아요? - P237

반면 여성들은 계급이 높을수록 남자가 많나요? 물론 그런 ‘훌륭한‘여성들도 간혹 있겠지만,(청중 웃음) 계급이 높거나 지식이 많은 여성들은 대부분 싱글이거나 한 명도 감당이 안 되서 이중노동에 시달리죠? 반대로 계급이 낮은 여성일수록, 많은 남성을 상대해야 할 경우가 많지요.
다시 말하면, 성별에 따라서 계급과 섹스가 맺는 관계가 정반대입니다. - P238

사회운동이 실패하는 이유는 사회가 남성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남성들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갖고 있지는 않잖아요. 지배적 남성성을 갖고 있는 엘리트 계층 남성들은 극히 소수죠. 대부분 남성들은 약자예요. 계급적으로 성적으로 그렇고, 연령이나 학벌, 지역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약자들이 왜 사회운동에 참여하지 않는가? 자신을 이상적인 남자들하고 동일시하면서, 성차별을 하잖아요. 쉽게 이야기하면, 계급이 높은 남자한테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걸 여자한테 풉니다. 여자들과 단결해서 그 남자를 칠 생각을 하지 않고.... 모든 그룹에 남성이 있고, 모든 그룹에 여성이 있어요. 각 집단의 남성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 그룹의 여성들과 연대하지 않고, 다른 그룹의 남성들과 남성 연대를 합니다. - P250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장애 남성 여러분, 당신은 비장애 남성한테 억압을 받았으면 우리랑 같이 연대해서 비장애 남성들의 잘못된 성매매를 바꾸고 대안적인 성문화를 만들어야지, 왜 당신을 억압하는 사람들과 동일시를 하나요?" 오늘은 장애를 예로 들어 이야기했지만, 동성애자 차별, 계급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배계급 남성보다 그렇지 않은 남성들이 여성 비하가 심한 경우가 많잖아요? 자신의 소외성을 남성성으로 보상받기 위해서. 사실 노동운동을 분열시킨 것은 여성노동운동이 아니라 가부장제죠.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하고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자본가들과 연대하는 것은, 어떤 조직이나 사회에서도 똑같이 발생하는 문제죠.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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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9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0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19-12-10 08:4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아 입간지러!!! 이야기 듣는데 너무 두분같아서 맞네 맞아~ㅋㅋㅋㅋ 햇눈뎈ㅋㅋㅋ 좋은 이야기였어요 ㅋㅋㅋ

2019-12-10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19-12-10 09:33   좋아요 0 | URL
정희진 샘 강연에 두분이 나타나신적 잇죠?ㅋㅋㅋㅋㅋㅋ 그때 강연들으러 갓엇대요 ㅋㅋㅋ케

다락방 2019-12-10 09:34   좋아요 0 | URL
악 네 맞아요! 아니 근데 저를 어떻게 알아봤을까요?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