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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현재 102 세의 할머니 '베르트'는 옆집 남자를 총으로 쏘아 부상을 입힌다. 이 일로 경찰서에 가게 되는데 형사와 마주 보고 앉아 그를 왜 쏘았는지를 얘기하다가 결국 자기네집 지하실에 몇 구의 시체가 있음을 자백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체들이 왜 거기에 쌓이게 된건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자신의 어린시절부터의 인생 얘기를 시작한다.
한 여자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나쁜 남자의 총량은 얼마일까? 혹은 좋은 남자의 총량은 얼마일까? 과연, 있기는 있을까?
베르트는 젊은 시절부터 숱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여러차례 결혼하게 된다. 여러차례 결혼한다는 건 여러차례 남편과 헤어졌다는 걸 뜻하는데, 놀랍게도 아니 놀랍지 않게도 그 남편들 모두는 괴물이었고, 베르트는 괴물 앞에 참지 않았다. 그들을 그냥 다 죽여버렸다.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에 감탄해 결혼한 남자는, 결혼 후에는 그 몸매 때문에 그녀가 다른 남자들의 관심을 받는 걸레라고 욕을 하며 함부로 대한다. 춤을 잘 추어서 그녀를 매혹시켰던 다른 남편은, 자신의 작은 고추로 만족하지 않는 아내에게 화를 내며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녀를 뮤즈라며 따라다녔던 한 화가는 돈벌이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팔리지 않는)예술에 도취되어 그녀가 번 돈으로 먹고 마시며 그녀의 집에서 산다. 그런 주제에 그녀를 가르치려 들어(흥, 니가 보부아르 읽고 기고만장하구나!). 그녀의 옆집 남자는 미성년자만 골라서 성매수를 하고, 전쟁이 한창일 때 그녀의 집에 찾아온 나치는 그녀를 강간한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브누아 필리퐁'이 써낸 프랑스판 '82년생 김지영'이구나, 했다. 김지영이 살면서 겪었던 사소한 사건들을 그냥 읊기만 했을 뿐인데 거기에는 한심한 한국 남자들이 등장한다. 베르트 할머니 역시 그저 자신의 삶을 얘기했을 뿐인데 거기엔 지독한 괴물들이 가득했다. 김지영은 체념과 울분으로 살아가 영혼이 아픈 고백을 시작했다면, 베르트 할머니는 참지않고 그냥 다 쏴죽여버렸다.
그녀가 직접 총으로 그 나쁜 짓을 응징한 건 비단 전남편이나 자신을 강간한 강간범에게만 향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흑인을 집단린치한 남자들에게도 자신의 총을 꺼내들었다. 필요한 상황에서 그녀 곁에 없었던 혹은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경찰이나 형사들 때문에 그녀는 혼자서 이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한다. 그녀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녀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마음이 가득하다. 아이와 여자들에겐 한없이 다정하며 남자들의 폭력으로부터 그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소녀들의 편이 되어준다. 역시 그녀들 곁에 의사가 있어주지 않기 때문에.
"설마 세상이 공평하다는 헛소리를 주절거릴 만큼 바보는 아니겠지?"
"네, 물론이에요. 그런 흰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도 법은 믿는다?"
"법을 수호하며 살아온 지 삼십 년입니다. 네, 전 법을 믿어요."
"그럼 날 지켜줘야 할 순간엔 어디 있었니?"
베르트의 두 눈에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멀리 지나가는 구조선에 필사적인 신호를 보내는 표류자의 씁쓸함이 어렸다.
"그때 전 태어나지도 않았는 걸요."
"능청 떨래? 너나 다른 경찰, 네가 죽고 못 사는 그 헌법을 지키는 모든 자들, 정작 행동해야 할 땐 눈을 씻고 봐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어. 오래오래 천천히 죽이는 건 살인으로 치지들 않지. 아내를 때리고, 고문하고, 파괴하는 남편은 법으로 처벌받지 않아……."
"증거만 있다면, 처벌받습니다."
"넌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내보일 수 있니? 정의와 법은 정략 결혼처럼 서로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야." (p.197)
그녀가 겪었던 그 괴물같은 남자들은 그녀가 유독 운이 나빴기 때문에 그녀의 인생이 끼어들었던걸까?
김지영이 겪었던 삶이 유별난 게 아니었듯, 베르트가 지내온 삶 역시 유별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이 늘 만나던 바로 그런 남자들을 만났다. 결혼 전에는 달콤하고 다정했으나 결혼 후에는 돌변하는 그런 남자들. 대화보다는 주먹을 쓰면서 여자를 쥐고 살려던 남자들. 여자의 섹스에, 가사노동에, 감정 노동에 기생하면서 여자를 소유하려던 남자들.
그 와중에 만난 잊지 못할 사랑, 인생 남자, 102세가 되어서도 눈물 흘리는 사랑. 이건 작가가 그녀의 삶이 안쓰러워 보내준건지 혹은 모든 남자가 나쁜 건 아니라는 변명을 하기 위함인건지는 모르겠다.
프랑스판 82년생 김지영 베르트 할머니의 이야기를 쓴 작가는 남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남편들을 죄다 쏴죽여버린 이 이야기에 프랑스 남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궁금했다. 이 나라에서 그렇듯이 작가의 SNS 에 달려가서 득달같이 댓글을 달았을까? 모든 남자가 이런건 아닌데 남자를 나쁘게 그려놨다고, 페미 묻었다고 작가를 욕했을까? 이 책을 읽은 연예인들을 가혹하게 비난했을까? 이런 남자들이 어딨냐며 과장됐다고 야유했을까? 설사 그렇게 욕했다한들 이 남자 작가의 커리어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 책은 특별할 게 없다. 82년생 김지영이 그랬듯이 이 책 역시 큰 상상력으로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다. 특별할 건 없는 내용,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로부터든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의 나열일 뿐.
벤투라 형사가 그랬듯 베르트 할머니의 살인에도 할머니에게 감정적 동의와 공감을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처벌한 남자들은 사실 누군가 대신 처벌해줬어야 할 나쁜 새끼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참지 않는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은가.
별다른 상상력 없이 그저 여자들이 하는 말들을 듣고 썼다해도 충분할 소설이라 별은 셋을 주려고 생각하다가, 그러나 베르트가 서른한살에 인생 남자를 만나서 3.5가 됐는데, 알라딘 별점에는 반개짜리가 없으므로 넷을 준다.
어쨌든,
베르트 할머니는 참지 않긔!!
"내가 그렇게까지 역겨운데 왜 나랑 결혼한 거야?" 자신의 위선에 말문이 막힌 뤼시엥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내가 지붕 위에 올라갔을 때 이 굴곡진 몸매에 반했잖아, 아니야? 충분히 당신 취향이었으니까 나한테 청혼까지 한 거 아냐? 그런데 왜 지금은 이걸 감추길 바라는 거야? 내가 당신을 창피하게 하는 거야, 아니면 이런 날 바라보는 당신이 창피한 거야?" 베르트는 당대를 뒤흔드는, 최소한 대화 상대를 뒤흔드는 현대적인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뤼시엥은 설득력 있는 반대 논리를 펼치는 대신, 보다 충격적인 논리를 선택했다. 즉 베르트의 따귀를 갈겼다. 부족한 지성을 크게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여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선조들의 방식이었다. 남자들은 늘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바꾸겠는가? - P101
"휴! 드디어 자유군!" 베르트는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상반신이 나체인 채로 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삽질에 따라 덜렁거리는 젖가슴 사이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음산해보일 수 있는 순간이 어떻게 이토록 도발적일 수 있는 것일까? "자, 이제 알겠지? 아내에게 응당 자상하게 대하는 대신 구타를 일삼으면, 아내가 당신 무덤을 파면서 신바람이 난다는 걸? 이래도 자기가 얼마나 잘못된 남편인지 깨닫지 못한다면야." - P111
감정을 표현하는 남자라니. 베르트는 절대 믿지 못했으리라. 그 믿음을 위해 루이지애나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독일군의 융단폭격에서 살아남은 남자, 그것도 흑인이 필요했다. 루터는 그녀에게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심어주는 중이었다. 서른한 살에, 생각지도 못한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발견은 받아들이는 것이 이롭다. 특히 그것이 폭넓고 탄탄하다면 더할 나위 없다. 루터의 품처럼 우리를 단단하게 감싸준다면, 그것은 매우 이로웠다 - P145
수프 맛이 고약했다. 베르트가 회복하려고 애쓰며 침대에 못박혀 있던 나흘 이레로 마르셀이 그녀에게 음식을 떠먹이고 있었다. 마르셀은 형편없는 요리사였으나 강력한 주먹꾼이었다. 베르트는 뤼시엥에게 당했던 폭력을 되씹으며 조용히 클클거렸다. 만만치 않은 선수. 마르셀은 상위 그룹에 속했다. 후유증을 남기는 그룹. 베르트는 질이 부어오른 것도 모자라 꽁무니뼈도 부러졌다. 의사에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마르셀은 계단 추락사고라고 둘러대며 잘도 빠져나갔다. ‘아니, 아랫도리는 브로콜리가 되고 엉덩이는 두 동강이 났는데, 계단을 헛디뎠기 때문이라니. 그런데 그 핑계가 먹혔어. 다들 한패인거지.‘ 베르트는 불만이었고 속단했다. 지폐 몇 장과 칼바도스가 진단서 작성에 힘을 보탰다. - P220
"어, 그래, 우리 여자들은 말이야, 선택의 호사를 누리지 못해. 우린 무엇보다 애 낳는 기계라고. 물론 그곳도 모든 기능이 정상일 때 얘기지만! 출산과 살림, 우린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하지만 난 달라, 이젠 시대가 바뀌었고 난 평등을 원해. 그러니 당신도 집세를 분담해." "이 집은 당신 거잖아." "상징적인 제스처를 하란 거야." "난 도무지 당신네 여자들이 이해가 안 가. 여자들이 살기가 얼마나 편하냐고. 먹여줘, 입혀줘, 재워줘. 책임은 죄다 남편들이 지고. 거기에 발목엔 어떤 족쇄도 없는데도 오늘날 평등을 떠들어대니." "은행에 계좌를 트고 자기 돈을 자기가 쓰려고 해도 남편의 동의가 필수적인 건 어떻게 생각해? 그게 발목의 족쇄가 아니면 뭐야? 투표권을 얻기 위해 애걸복걸해야 했던 건, 그건 자유야? 바지를 입으면 벌금을 물어야 하는 건, 그건 어떻게 설명할래? 예술가라고 해서 꼭 바보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이달에 당신 주기가 언제지?" - P284
베르트가 목제 식탁에 포크를 꽂았다. 열이 올랐다. "아, 젠장! 나한테 생리 핑계 갖다 붙이지 마. 당신만은 제발!" "그게 당신 기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인정해." "내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건 당신의 너절함이야." "천박하게 굴어서 이로울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여자가 권리만 주장했다 하면 그 즉시 생리대를 들고 나오니, 이거 원. 저질에, 비루하고, 생산적이지 못하기 짝이 없네." "생산적이지 못한 건, 당신이 잘 알겠구나." 궁지에 몰렸다고 느낀 노르베르가 비겁한 무기를 선택했다. "그 부분은 건드리지 마, 노르베르, 특히 그건 하지 마." "난 그저 당신이 보부아르를 읽고서 들떴을지 모르겠지만, 단신은 크게 불평할 처지가 아니란 얘기를 하는 거야. 이렇게 아늑한 집도 있고, 가게도 잘 굴러가잖아. 난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내 예술을 팔고 있어. 누가 더 불평을 해야겠어? 이건 남자,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생존자와 그 밖의 사람들의 문제야." - P285
"왜, 당신이 보기에 난 생존자가 아닌 것 같아서?" 방 안의 온도가 핵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당신은 그리 고생스러워 보이지 않는데?" "내가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해." - P285
"지금 저 협박하러 온 거예요?" 어조가 매서워졌다. "그럴 리가,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럼요?" "제 좋은 평판으로 당신의 나쁜 평판을 희석해주고 싶어요." ‘남자들이란. 죄다 똑같아. 우리의 구세주들. 내가 또 황홀해해야 하는 걸까.‘ "전 당신의 좋은 평판이 필요 없어요, 밥티스트. 전 지금의 제가 부끄럽지 않거든요."- - P308
"너흰 그를 죽여서 얻은 게 하나도 없어. 그런데 난 ……난 모든 걸 잃었지." 그녀의 입에서 말들이 새나왔다. 공허하고 싸늘한, 유령의 말들이었다. 탕!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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