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반복하다보니 나만의 취향이 생겼다. 그 안에서도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코스가 있고, 그 코스를 위해 여행을 한다고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 처음 여행을 시작했을 때는 남들이 하는 것처럼 관광지를 둘러보았고 유명하다는 맛집엘 갔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 해보지도 않고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낯선 나라의 낯선 도시, 그 곳의 거리를 무작정 걷는 편을 선호했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가는 편을 더 좋아했고. 그러다 최근에 생긴 취향은 낯선 도시의 미술관에 가는 것이었다. 그림을 잘 볼 줄 모르는 나의 눈을 그림 좀 볼 줄 아는 눈으로 키워보자, 는 생각으로 미술관에 가기 시작했는데, 웬걸, 그림을 보는 눈이 길러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 확고한 취향만 확인하게 되더라. 좋은 그림은 더 좋아지고 그렇지 않은 그림에 대해서라면 여전히 무심해지는 것. 그렇다해도 낯선 도시의 미술관에 들러 그 곳에 전시된 그림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미술관 내의 까페에 앉아 그 후의 시간을 즐기는 것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코스중 하나가 되었다. 그 시간을 기다리고 기대할만큼 내가 여행에서 참 좋아하는 시간. 그 시간은 혼자여도 좋았고 누군가와 함께여도 좋았다. 나는 그 시간을 매우 사랑한다. 이번 방콕에서도 그런 시간을 가졌다.
자, 미술관에 가보자, 그렇다면 어느 미술관에 가보면 좋을까, 해서 친구와 나는 호텔에 앉아 방콕 미술관을 넣고 검색을 해보았다. 그러다 선택하게 된 것이 <Museum of Contemporary Art> 현대미술관 이었다. 방콕에서도 외곽에 있는지라 BTS 도 닿지 않고, 기차나 차를 타고 가야했다. 친구와 나는 그랩을 불러 그 곳에 닿았다. 도착하니 가방은 매표소에 맡기고 들어가야 했다. 친구와 나는 핸드폰만 챙겨서는 표를 끊고 입장했다.
1층에는 까페와 기념품 가게가 있고 2층부터 전시가 시작됐다. 2층에 가니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한 작품은 <Father's Path> 라는 작품이었는데, 이 그림이 참 좋아서 친구와 이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좋다, 좋으네, 하면서 '이 그림 엽서로 있으면 잔뜩 사야지' 했는데, 관람을 마치고 기념품샵에 도착하니 이 그림의 엽서는 없었다. 서운해..
2층의 그림중에 좋은 것들이 있어서 와 여기 오길 잘했어, 이 미술관 크고 작품도 많아, 이러면서 친구랑 한껏 신나하고 있었는데, 4층과 5층에 걸쳐 내 취향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작품들이 등장해서 아아 이게 뭐야... 하게 됐다. 아주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태국 고유의 종교나 신화와 관계있는 작품들인 것 같았다. 그런 그림들이니만큼 그곳의 종교와 상관 없는 나에게는 너무나 동떨어지고 그래서인지 사실 좀 무섭게 느껴져서... 이런 그림을 그리는 마음과, 영감과 그리고 전시하는 마음, 이 그림을 그린 예술가에게 상을 주는 마음, 그리고 이 그림들을 소장하고자 하는 마음들은 어떤 마음일까.. 여러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내가 여러번 생각한다고 그 답을 알 수는 없었다.
3층의 한 구석에는 집이 마련되어 있었다. 좀 민속촌의 느낌이어서 그냥 둘러나보자, 하고 들어갔는데 그 집 안에는 같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그림들이 시리즈로 집안 전체를 꾸미고 있었다. 그 그림들은 모두다 'Sukee Som-Ngoen'이란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둘러보다보니 한 편의 이야기가 되는 거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는데 어어, 이것봐, 이거 태국 전통의 이야기인가봐, 하면서 우리는 그림들만으로 그 안의 이야기를 추측해낼 수 있었다. 잘생긴 놈과 부자인 놈이 한 아름다운 여인을 동시에 사랑하는구나, 이들이 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구나, 여자는 잘생긴 놈을 선택했는데 부자가 그녀의 방에 침입했구나, 그래서 잘생긴 놈이 빡쳤구나, 그런데 잘생긴 놈은 영웅이구나, 아이도 낳았구나, 하면서 한 편의 이야기가 되는 거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간 우리가 이야기를 짐작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이렇게 현대미술관에 따로 전시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면 이것은 유명한 이야기가 아닐까, 이것은 혹시 태국에서 너무나 유명한 신화인걸까.
(실제처럼 만든 모형이었는데 힘줄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 그림을 다 보고 바깥으로 나오니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 시리즈의 여자주인공인듯한 'Phimphilalai'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이 집은 <House Of Pimpilalai>였다. 아, 여주인공의 이름은 핌피랄라이 이구나, 이곳에 전시된 그림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구나, 우리는 미술관내의 벤치에 앉아 미술관에서 나눠준 브로셔와 구글 검색을 통해 이 이야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쿤팬 과 쿤창'이라는 두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였고, 태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고전문학인듯 했다. 오, 그리고 검색해 알아낸 사실에 의하면 잘생남자와 못생긴부자 남자가 핌피랄라이를 사랑하는데 잘생긴 남자는 역적으로 몰렸다가 영웅이 되고 무슨 신적인 존재가 되고, 그 남자가 전쟁에서 죽었다고 생각한 핌피랄라이는 못생긴 부자랑 결혼하는데 사실 잘생긴 남자는 죽지 않았고, 전쟁에서 돌아온 후에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못생긴 남자랑 결혼했다는 사실에 잘생긴 남자는 분노하고... 그러는 이야기인 것이다. 오, 이야기를 알고 보니 더 재미있네. 친구랑 나는 재밌다 재밋다 하면서 그래서 질투란 그림이 있었나봐, 그래서 복수란 제목을 가진 그림이 있었나봐, 그림 속의 아이는 그렇다면 잘생긴 놈의 아이인가봐, 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한 번 들어가서 볼까?' 내가 물었고 친구는 '그러자' 고 했다. 이야기를 모르고 봐도 재미있었는데, 알고 보면 더 재미있겠지? 그렇게 우리는 들어가서 다시 한 번 관람했고, 그 뒤로 숙소에 돌아와 와인을 마시면서 그 이야기를 책으로 읽을 순 없는지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오, 있었다. 만세!
내가 몰라서 그렇지 이게 다른 사람들한테는 궁금한 이야기, 아는 이야기였구나. 그러니 이렇게 책으로 나와있지!
맨 왼쪽의 책이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라 읽으려고 했더니, 206쪽의 책인거다. 이거 완전 무슨 일리아스 같은 대서사시 같았는데, 게다가 운문 이야기라고 했는데, 206쪽 밖에 안돼? 너무 적은데? 하고 책 설명을 읽어보니, 아니나다를까 '발췌본' 이었다. 이 책은 태국에서 세상에, 42권짜리의 이야기라는 거다. 사람들이 보통 이 책을 우리나라의 춘향전과 비교하는 모양인데, 누군가 읽고 쓴 리뷰를 읽어보니 춘향전에 빗댈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막장 중에도 막장 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위에 쓴 검색으로 파악한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었던 것. 태국의 종교도 아마 관련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잘생긴 놈이 신처럼 되기 위해서, 자기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자기의 어린 아이를 죽이는 이야기가 나오고, 게다가 핌피랄라이를 사랑하면서도 바람을 피우는 것. 핌피랄라이 역시 자신의 마음을 양쪽 모두에게 나눠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아, 막장 중의 막장이라니! 게다가 전시된 그림을 보면 작가는 무슨 여자 가슴에 한 맺힌양 엄청 그려놨던데, 그 그림이란 것이, 아마도 태국의 전통적인 이야기를 잘 살리려고 그런 것이겠지만, 여자 몸에 완벽을 때려 박은 거다. 친구와 보면서 '여자 몸에 대한 판타지가 있네...' 라고 했는데, 짧은 검색만으로는 화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는 없었다. '수키'란 화가의 이름을 보면 여자사람일듯한데, 여자 가슴 그려둔 거 보면 남자사람일것 같고..
어쨌든 이 발췌본 206쪽 짜리를 너무 읽어보고 싶다. 사실 여혐 범벅일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태국의 현대미술관의 그림을 보면서도 여성을 성녀화 시킨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건 내가 태국의 종교에 얽힌 사연을 모르니 뭐라 말할 순 없지만, 그 미술관에서도 친구와 나는 그런 얘기를 한거다. '미국의 미술관에 가면 여성 누드 모델이 많은데 여성 화가의 그림은 20프로도 안된대' 같은 이야기들. 어느 미술관을 가나 그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태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어떤 영화가 하는가 살펴보니, 오오, <쿤팬의 이야기 2> 가 있더라. 너무 졸려서 금세 잠들 것 같았지만, 어디 좀 볼까, 하고 재생했는데, 하하하하, 영화가 만들어진 것도 좀 오래전이긴 하지만 와... 심한 뻥이 그 안에 있었다. 쿤팬이 전쟁중에 적들에게 둘러싸였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무슨 ㅋㅋㅋㅋㅋㅋ 두 손을 모아 기도하니까 쿤팬을 겨냥하던 적군의 총이 그냥 다 부러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적군들이 에워싸는 가운데도 쿤팬 혼자서 적을 다 죽이고 나올 수 있는 거다. 이게 뭐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하다 진짜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쿤팬과 쿤창의 이야기에서 핌피랄라이는 '완통'으로 개명한다고 하는데, 마지막에는 국가로부터 처형을 당한다고 한다. 처형당하는 이유는 그녀가 '음란해서' 라고...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혐범벅일것 같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여혐이 그 안에 있을것 같은데, 그것이 태국에서 오래된 클래식한 문학이라고 하니, 미술관에 가 그 그림들을 보기도 한 터, 읽어서 그 그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고 싶다. 그 책을 읽고나면 아마 할 말이 많아지지 않을까. 이 책 읽어야겠어, 라고 친구에게 말하니, 친구도 너무 읽어보고 싶다면서, 그러나 여혐 가득한 막장일 것 같아 내가 다 읽어본 후의 감상을 듣고 읽기를 선택하겠다 한다. 그래, 친구여....
어처구니가 없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기(쿤팬)가 전쟁에서 돌아와보니 완통이 쿤창과 결혼해서 빡이 쳐서 그녀를 죽이려고 하는데, 말리는 게 쿤팬의 두번째 여자... 이에 완통이 빡침...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하자는 건지 도대체 원. 어떻게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랑 결혼했다고 사랑하는 여자를 죽일 생각을 해?? 하아-
오늘 출근하면서 읽기 시작한 《미친 사랑의 서》가 생각나는데, 이 이야기는 따로 풀기로 하자. 아무튼 친구랑 한참이나 재미있어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갔는데, 돌아올 때는 쿤팬과 쿤창, 완통을 아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어. 하하하하. 뜻밖의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친구와 그림을 보고 기념품 샵에 들르고, 사고 싶은 엽서가 없어서 실망하고, 까페에 들러 차를 마시면서 각자 가져온 책을 읽거나 하고 싶은 걸 했다. 그러다보니 미술관 문닫을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는 그랩을 불렀다. 그러나 그랩은 응답하지 않았다. 다시 불렀다. 다시 응답하지 않았다. 하는수없이 미술관 직원에게 우리를 위해 혹시 택시를 불러줄 수 있느냐 물어보니 그럴 순 없다면서 우리에게 어디에 갈건지를 물었다. 우리는 시내의 대형 쇼핑몰을 얘기했고, 미술관 직원은 여기에서 택시를 불러서 거기에 가기는 매우 힘들거라며, 버스와 BTS 를 타고 가라고 알려줬다. 그러더니 잠깐 기다리라며 친절하게 메모지에 가는 방법을 적어주었다. 일단 나가서 왼쪽으로 쭉 가서 건너서 버스 정류장으로 가, 거기에서 버스를 타고 모칫 역까지 가. 거기에서 BTS 를 타고 씨암 역에서 내리면 돼. 요금은 한사람당 20바트가 안될거야. 이걸 다 적어주었어..
매우 친절한 직원이었다. 나는 외워간 태국인사 컵쿤카를 몇 번이나 양손을 모아 외친 뒤에 메모지를 받아들었고, 그렇게 버스정류장에 가서,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버스를 탔고,
(이것이 버스티켓)
BTS 도 탔다.
쇼핑몰에 들러 밥을 먹고 서점에 들렀는데, 어디서든 서점은 참 좋다. 꽉꽉 책이 채워진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피케티의 자본도 보았고 소피 킨셀라의 책이 대세인가 보았다. 그러다가 친구가 말해줘서 알았는데, <귀신나방> 이 있는 게 아닌가. 제목이 한글로 써져있어서 확 눈에 들어온다.
오오, 제목이 한글로 되어있다니, 그렇다면 본문은? 하고 들어서 펼쳐보니 이렇게............ 네??
으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아무것도,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발견한 대한민국 소설이 반가워서 남동생에게 찍어 보냈다. 나와 내 남동생 모두 이 책을 읽었단 말이야? 남동생은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그 책 별로인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이 책을 읽은 내가 좋아하는 두 남자 모두가 이 책을 별로라 말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장용민은 이 책 말고도 《궁극의 아이》, 《불로의 인형》 란 책도 썼죠.. 궁극... 궁극에 대해서라면 제가 참 할 말이 많지만 그냥 넘어갈게요.
미술관의 그림을 보고 까페에 가는 것 못지않게 사랑하는 시간은, 호텔에서의 밤이다. 블루트스 스피커로 오래된 노래를 틀어두고서 친구와 나는 홀짝홀짝 술을 마셨다. 밤은 깊어갔고, 우리는 그 날 걸었던 거리와 그 날 보았던 그림에 대해 얘기했다. 그 날 먹었던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했고, 오래된 노래들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어느 밤에는 갑자기 영화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한참을 보냈다. 더티댄싱 정말 좋았잖아? 프리티우먼도 좋았지! 유콜 잇 러브는 어떻고! 같은 나이대라 같은 영화를 같은 시기에 보고 비슷한 감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이렇게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더없이 소중한 밤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담담하게> 를 들었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얽매이는 기분이 들면 안되니까요, 를 간절하게 따라부르면서, 얽매이는 기분이 들지 않게 하려고 내가 너무 노력한걸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걸까, 지난 시간을 한참이나 후회하며 돌이켜보았다.
잘 지내는지 몇 번이나 묻고 싶은 낮과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