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프트가 망가뜨린 사진들은 뉴욕의 사진가 레스 크림스가 하나의 세트로 만든 《믿기지 않는 '통밀 팬케이크 더미'살인사건들》(1972년 출간)의 일부였다. 세피아톤으로 처리된 각각의 사진에는 하반신 또는 전신이 발가벗겨진 여성이 자신의 피처럼 보이는 액체가 웅덩이를 이루는 바닥에 누워 있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여성은 대체로 입에 재갈이 물려 있고 몸은 결박되어 있는 모습이며, 때로는 머리 전체에 봉투가 씌워져 있거나 천이 둘러져 있기도 하다. 서너 장의 사진에서는 진짜 같아 보이는 칼에 베인 상처도 보인다. 여성은 늘 일상적이고 익숙한 배경 속에 있다. 그리고 여성 근처에는 항상 통밀 팬케이크가 여러 장 포개져서 놓여 있다.
이 사진들에는 큐레이터 로버트 소비젝Rovertst Sobieszek의 비평이 붙어 있는데, 그는 이 사진 시리즈가 이른바 시그너처 살인signature murder이라는 것을 "유머러스"하게 다룬 작품이라고 한다. 시그너처 살인이란, 범인이 피해자에게 특징적인 신체 훼손을 한다든가, 특이한 물건, 상징, 또는 메시지를 현장에 남겨둔 살인 사건을 말한다. 소비젝은 "물론 이 시리즈에 담긴 유머의 전형은 허시 초콜릿을 피로 사용했다는 점"이라고 쓰고 있다.
모든 사진에서 여성의 하반신이나 전신이 누드일 뿐 아니라, 다리를 벌린 자세를 사진작가가 애호한다는 점은 그녀가 살해당하기 전이나 후에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배경이 부엌으로 설정된 사진에는 여성의 허벅지 사이에 콜라병이 세워져 있다. 이는 끔직할 정도로 흔한 강간 도구를 오브제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콜라병이나 총은 실제 강간범들이 특히 애호하는 도구들이다).
경찰과 의식 있는 시민들은 미국 내에서 4분 30초마다 '성공적인' 강간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아 성추행은 10분에 한 번 꼴로 일어난다. 두 유형의 폭행 모두에 정도가 다양한 추가적인 잔혹행위가 수반되는데, 심한 경우 신체 절단과 살인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소비젝은 레스 크림스의 사진들이 미국 남자들에 의해 미국 여성과 아동에게 매시간 가해지는 공포와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p.640-642)
실제로 여성살해가 일어난 대학에서 한 남자 사진작가가 여성연쇄살인을 다룬 사진을 전시했다. 그걸 본 남자 큐레이터는 그것이 유머라고 말한다. 피를 초콜릿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게다가 사진의 '통밀 팬케이크 더미stack o'wheat' 는 사진마다 살인사건 번호를 나타내는 개수만큼 쌓여있는 팬케이크를 가리킨다(p.630 각주)'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사진작가와 큐레이터가 쌍으로 지랄을 할 수 있을까? 이 사진이 걸린 곳에서도 여성 살해는 있었고, 이 사진이 걸려있는 동안에도 신문을 펼치면 여성살해가 기사가 나와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걸 팬케이크로 넘버링하면서 예술이랍시고 전시를 할 수 있지?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들면 그게 가능하지? 그러면서 그것이 유머라고? 재밌냐? 웃겨? 여자들 발가벗겨져 강간당하고 죽는 거 작품으로 만들고, 재밌어? 즐거워? 살인자나 너네나 다를 게 무엇이지?
이 사진을 본 '니키 크래프트'는 너무 어이없고 화가나서 그 사진들을 죄다 조각조각 내어 그 위에 초콜릿을 뿌리고 사진을 찍는다. 여자살해를 다룬 사진은 예술이라던 사람들이, 니키 크래프트의 사진은 검열이라 욕한다. 왜 여성살해를 표현한 건 예술이며 자유가 되고, 여성살해를 이런 식으로 소비하지 말라는 저항은 검열이 되는가?
재밌냐?
여자 죽이니까 재밌어?
여자 죽이는 걸 전시하니까 재밌어?
그게 웃겨?
소비젝은 강간당하고 도륙당한 여성의 이미지가 '절묘하고', '조화로우며', '낭만적'이기까지 하다고 생각한다. 살해된 여성이 신체 손상과 죽음을 통해 '새로운 아름다움'을 손에 넣었다고 보았다. (p.642)
여성이 살아가는 궁극적 목적은 아름답기 위해서인가? 아름답기 위해서라면 살해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거야? 죽음으로써 아름다워졌으니, 입닥치고 예술로 받아들이라는거야?
거기에 과장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거기에 있는 것은 은밀하게 퍼지는, 위험하게 엄선된 표현과 번지르르한 거짓이었다. 본질적으로 '통밀 팬케이크 더미'는 여성과 폭력에 대한 거짓말이다.
소비젝이 말했듯 여성의 "자세는 저항의 몸부림보다는 투항과 도발, 그리고 관능을 훨씬 더 많이 드러내고 있다".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여성들이 도발한다는 익숙하면서도 저열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자. 그리고 여성이 육체와 영혼을 절단하고 비하함으로써 누구의 관능이 만족을 얻는가 하는 무거운 질문도 잠시 내려놓자. 가장 단순한 거짓말은 바로 첫 번째 말, 저항에 관한 것이다. 거기엔 저항이 없다. (p.643)
여성살해의 대부분을 이루는 살해의 원인은, 여성들, 죽어나간 피해자들의 도발에 있었다고 세상은 말했다. 남편이나 연인이 자신을 거부했으므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였으므로, 여자들을 죽였다. 이 현상은 그대로 예술(이라 불려지는)로 표현된다. 사진에서조차 여자들은 '저항하지 않고', 그러나 '도발했으므로' 죽었다.
재밌냐?
여성이 죽은 사진 보면서 절묘하다, 조화롭다, 낭만적이다, 얘기 하면서 자신이 뭔가 된 것 같았냐?
우위에 선 것 같았어?
예술에 대한 비평을 할 줄 아는 멋진 나~ 하고 감탄했냐?
사진작가의 유머를 이해하는 힙한 나~ 이랬냐?
아직 읽지 않았지만, 뒷부분에는 여성단체에서 《허슬러Hustler》잡지들을 폐기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나온다고 한다.
이 격렬한 행동들은 이른바 로스앤젤레스의 힐사이드 스트랭글러로 알려진 케네스 비앙키에게 살해된 피해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 헌정되었다. 케네스 비앙키는 공범 안젤로 부오노와 함께 열 명의 여성을 고문하고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해당 피해자는 20세의 신디 리 허드스페스Cindy Lee Hudspeth였다. 크래프트가 피해자들 중에서 그녀를 택한 것은, 《허슬러》에서 그녀가 살해된 사건을 비앙키가 '최근에 이룬 성취'라고 말한 '농담' 때문이었다. (p.628-629)
연쇄살인범에게 또 하나의 살인을 '성취'라고 불러주다니, 그걸 '농담'이라고 퉁치려 하다니, 미쳤어? 그게 웃겨? 언제 웃어야 하는지 몰라?
국내에서도 몇해전에 GQ잡지에서 여성폭력을 다룬 표지로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차 트렁크에 여자 다리 묶어서 넣어논 표지였지. 그 앞에는 남자가 서있고. 그걸 소위 '강한 남자'를 보여준다면서 사진 찍은 거였다.
강해?
강해서 좋아?
여자 두드려 패고 죽이면 강한 느낌이 들어서 좋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박정현 콘서트를 다녀왔다. 연속해서 사흘간 노래를 불렀기 때문인지 박정현의 목 상태는 딱히 좋은 것 같지 않았고, 큰 공연장은 산만했다. 전체적으로 콘서트에 크게 만족을 느끼진 못했지만, 박정현의 노래 <나의 하루>를 박정현의 지인들이 다같이 부른 영상만큼은 참 좋았다. 내가 부르는 노래를 다른 사람들도 따라부른다, 는 것에서 오는 가슴 벅찬 감동이 그녀에게 찾아들 것 같았다. 그걸 보는데 너무 좋았다.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성취란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이런 걸 보는게 좋다'고 그 때 생각했다. 누군가 시도하고 노력해서 성취해내는 걸 보는 일. 나는 누군가의 성취를 보는 순간 크게 감동하며 응원하게 된다. 그녀의 성취를 그녀는 가까운 사람들과, 그녀를 아껴주는 사람들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노력하고 애써서 얻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취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성취라는 단어에서는 기쁨과 감동과 축하가 함께 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여자를 연쇄살인한 것을 성취라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건가? 기쁘고 축하할만한 일이야? 결국 해낸 일이야? 샴페인을 터뜨리기라도 할거야? 박수칠거야? 오, 너 또 여자 죽였네, 최근의 성취네?
이래놓고 '농담이야~' 라니.
농담도 할 줄 모르는 것들이 잡지를 만들고 팔고 있다. 그 잡지를 폐기하는 것은 여성단체만의 일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해야할 일이 아니었나.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눈 감기까지 우리는 아주 많이 여성 살해에 대한 기사를 보고 접한다. 남자들의 폭력을 보고 접한다. 어릴 때부터 그걸 보니 자연스레 '남자는 폭력성이 강해'와 '헤픈 여자들은 잘못하다 맞아죽지'가 학습된다. 그러다보니 그걸로 농담도 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걸로 웃으면서 농담할 수 있다는 거, 진짜 잘못된 거 아니야?
나는 헤어진 남자친구들이 내가 사는 집을 알고 있다는 게 몹시 불안하다. 어떻게든 집을 가르쳐주는 건 피했어야 했다고, 헤어지고나서 계속 생각했다. 특히나 헤어지고나서 나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주위를 살펴야 했다. 사귀는 동안 좋았던 그 사람이, 헤어지고 나서 저런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거절에 분노를 터뜨릴 줄은 몰랐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다해도, 내가 사귀었던 남자들이 그런 모습이 될 줄은 몰랐다. 이 공포에 대해 언급했을 때 내가 주변으로부터 들은 말은, '니가 확실히 싫다고 말했어?' 였다. 나는 그들을 헤어지자고 말함으로써 도발한 여자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남자들은 여성살해를 예술이랍시고 다루고, 농담이랍시고 다루고 함께 낄낄거린다. 그러면서 '강간을 하자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강간문화가 존재한다는거야?'라며 멍청한 소리들을 해댄다. 늬들이 살아 숨쉬는 거, 저런 거에 농담이랍시고 웃고 예술이랍시고 그리고 찍고 표현하는 거, 그게 다 강간문화야. 그 강간문화는 곳곳에 침투해서, 모든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폭력적이 될 준비를 하고있다. 나랑 헤어지자고? 어디, 헤어지자고 하기만 해봐. 네 사진 인터넷에 뿌릴거야, 너네 집에 찾아갈거야, 너 다른 남자랑 사귀지 못하게 할거야, 나는 어떻게든 너랑 잘거야.
잡지에서 영화에서 사진에서 웹툰에서 그림에서.. 모두가 그런 식으로 여성을 다룬다.
나는 그런 식의 '예술'을 허락할 수 없다. 그런 것을 예술이라 부르기를 거부한다.
나는 성적 억압을 목적으로 하는 개인이나 단체와 한편에 서기를 거부한다. 나는 솔직한 섹슈얼리티나 성애물EROTICA에 관한 어떠한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고 어떠한 생각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활동할 것이다. 적나라한 성애물은 문학, 예술, 과학, 교육,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적 영역에 자리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바는 섹스가 아니라 폭력에 초점을 맞춘, 외설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적 흥분과 자극을 위해 여성의 육체를 비하하고 비인간화하려는 의도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타협의 여지 없이 반대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와 오락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육체를 발가벗기고, 결박하고, 강간하고, 고문하고, 절단하고, 살해하는 것이다. (p.637-638)
많이 배운다.
곳곳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과 살해에 대해 거부하는 움직임들이 있어왔다.
이토록 잔인한 세계에서, 한쪽의 공포를 한쪽의 웃음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그래도 저항하고 거부하는 여자들이 있다.
여자들은 끊임없이 싸워왔다.
나는 그 저항의 무리에 서겠다.
나는 그 거부의 무리와 한편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