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는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다녀왔다. 가기 전에 마스크랑 선글라스를 준비하라는 걸 여러차례 들었는데, 오전 일정이 바빴던 나는 나가면서 선글라스는 챙겼지만 마스크를 챙기지 못했다. 뭐, 선글라스 끼니까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일베에서 염산을 뿌리겠다는 등의 테러를 한다고 하는 소식이 들리더라. 그리고 이미 시위에 참가중인 사람들로부터 여러가지 영웅(스파이더맨, 데드풀 등등) 복장의 남자들이 근처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아아, 마스크는 필수겠구나...


혜화역에 먼저 도착해서 친구를 기다리던 나는, 지하철역에 편의점이 있다면 마스크를 사야겠다 싶어 지하철 역내에서 돌아다녀 보았지만 편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아아, 안되겠나, 나가면서 사자, 하고는 다시 2번 출구 앞에서 기다리는데, 마스크를, 모자를, 썬글라스를 낀 여자들이 계속해서 2번 출구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는 시위에 나가기로 결심하고서도 얼마나 오려나, 많지는 않겠지,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정말 여자들은 끊임없이 계속,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내 또래의 여자들도 보였지만 나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들이 훨씬 많았다. 누군가는 혼자서 올라 가기도 했고 누군가는 여럿이 올라가기도 했다. 나는 계속해서 여자들이 줄지어 올라가는 걸 보면서 벌써부터 벅찬 마음이 되었다. 아, 내 생각보다 여자들 많이 왔구나.



내 친구가 도착했고 우리는 바깥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편의점 보이면 마스크 사자'고 얘기했는데, 나가서 얼마 안걸어갔는데 벌써 시위중인 곳에 도착했고, 아아 어떡하지 나는 마스크가 없는데..하고 좀 쫄아 있었는데, 시위 스태프가 오더니 나를 데려가서는 마스크를 챙겨줬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고맙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리고는 도대체 어디가 끝이냐 하고서는 아주 많은 여자들 무리 뒤로 계속해서 걷다가 드디어 앉을 수 있는 곳을 발견해 친구와 앉았다. 여자들이 많았다. 아주 많았다. 정말 많았다. 정말 많았는데, 내 뒤로도 계속, 계속, 계속 여자들이 와 섰고, 또 앉았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여자들 때문에 이미 모인 사람들은, 한정된 공간에 자리하기 위하여 자꾸 일어나 간격 조정을 해야했어. 너무 여자들이 많이 와서 나는 진짜 너무 ㅠㅠ 기운이 났고 ㅠㅠ 그래서 ㅠㅠㅠㅠㅠㅠㅠ 정말 목이 터져라 그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위에 참여한 다른 여자들도 말했고 또 나도 소리내어 말했는데, 이건 너무 착한 거 아니냐, 우리 너무 착하게 시위하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들 질서있게 움직이는데 진짜 ㅠㅠ 남자들이 테러하면 어떡하지 약간 쫄아들었던 마음이 정말이지 든든해졌다. 이토록 많은 여성들이 다같이 한 자리에서 한 팔을 들면서 씩씩하게 편파수사를 규탄하는데, 진짜 막.. 내 자신이 한결 더 강해지는 느낌이 되는 거다. 그래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고 또 외쳤다.



그리고 구호를 외치는 내내, 끊임없이 지원 물품들이 도착했다. 마스크와 물은 물론이고, 피자, 샌드위치, 탄산수, 아이스 커피같은 것들이 연신 도착하는 거다. 나와 친구는 물만 달라고 해 마시긴 했지만, 진짜 막 피자 판 돌고 샌드위치 돌고 이러는데, 아 진짜 이 여자들 ㅠㅠ 너무 멋져 ㅠㅠ


친구와 나는 시위가 끝나기 삼십분 전쯤에 나왔는데, 그 때에도 트럭이 도착해서 물을 내리고 있더라. 어딘가에서,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는 여자들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물과 음식을 후원해주고 있었어 ㅠㅠㅠㅠㅠㅠ



친구랑 걸어가면서 이 자리에 너랑 함께하게 되어서 기쁘다, 우리가 여기에 머릿수를 채울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얘기했다. 이 많은 여자들이 한 마음이 되어 한 목소리로 소리쳤던 게 너무 좋아서, 우리는 그 날 밥을 먹으면서 서로에게 좋았다, 잘했다고 서로 격려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좋게 헤어졌는데, 집에 가는 길, 시위에 참여하지 못한 다른 여자 사람이 기사났다고 링크를 보내주고, 또 트위터로 다른 사람들이 시위에 관해 얘기하는 걸 보면서, 나는,



아 이 여자들 진짜 대단하네, 대단하고 멋지네, 너무 좋네, 그리고 내가 그 대단한 여자들 중 하나였네... 하고는 자꾸 눈물이 났다. 이 여자들이 너무 멋있고 좋아서 자꾸 눈물이 났어. 내가 거기에 앉아 목소리를 보탰다는 게 새삼 자랑스러웠다. 내가 이 역사의 한장면 속에 있었고, 이건 너무 근사한 경험이었다. 누가 나에게 '니 인생에 잘한 게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나는 이 날의 기억을 떠올리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과 한 공간에서 목청껏 소리쳤던 경험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게 엄청나게 힘이 됐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라는 문구는 사실이었다. 그 자리에 참여한 것이 내게는 큰 힘이 됐다. 내가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자, 이제 지치지 말고 또 한 발 앞으로 나아가자!


생각하게 되는 거다. 더 읽고, 더 쓰고, 더 생각하고, 더 말하고, 더 공부하고, 더 행동하고, 더 연대하고, 더 단단해지자!! 스스로에게 용기와 격려를 뿜뿜할 수 있게 되는거다. 진짜 엄청 힘을 받았어. 아마도 그곳에 있었던 다른 여자들도 그런 기분을 느꼈을 것이고, 그 힘을 느꼈을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 내가 도움이 됐겠지!!




일요일 아침에 눈을 떠서도, 이것이 내 삶의 방향을 또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더 단단해져야지. 그래서 내 조카를 비롯한 많은 어리고 젊은 여성들이 살아갈 이 세상을, 지금보다 더 안전하고 공정한 곳으로 만들어야지. 계속 목소리를 내야지.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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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8-05-2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락방님..너무 좋네요
아침부터 기분이 저조해서 야단났네 싶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제 조카 생각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락방 2018-05-21 16:23   좋아요 1 | URL
클래비스님, 기분이 좋아지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도 다른 많은 여성분들과 함께 소리쳐보니 한결 용기가 나더라고요. 기운 나고 힘 받고, 그러고 왔어요. 이 힘찬 기운 그대로, 클래비스님께 전달합니다. 받으세요! 받으시고 힘내세요!!

2018-05-21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1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18-05-21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좋아요 친구 정말 좋아!

다락방 2018-05-21 16:26   좋아요 0 | URL
응 이번 경험은 내게 너무 소중했어. 잊지 않고 계속 가슴에 품어야겠다 생각했어요.
전국 규모의 촛불시위 나갔던 때보다, 이 만이천명 여자들의 시위에 나갔던 게 나한테는 훨씬 더 강하게 다가온다. 나에겐 잊지 못할, 아주 강력한 경험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