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북풍의 등에서 ㅣ 네버랜드 클래식 34
조지 맥도널드 지음, 정회성 옮김, 제시 윌콕 스미스 그림 / 시공주니어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 [어린이책의 역사]에서 소개한 책 중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두 권 [물의 아이들]과 [북풍의 등에서]를 모두 읽었습니다. 과연, 알겠어요. 타운젠드의 그 문장의 의미들을. :] 이 두 권은 한국어판으로도 한 번 이상 출간된, 어디서나 고전 취급을 받는 물건입니다만, 두 가지는 굉장히 다릅니다. [물의 아이들]은 타운센드의 말대로, 완벽하지는 않다 해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걸작입니다. [북풍의 등에서]는...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강한 지지를 얻을 수는 없는 작품이 아닐까 하고요. ^_^;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지의 구현 이외의 것에서는 모조리 실패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시대를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하면...저는 [물의 아이들]과 윌키 콜린즈의 [월장석The Moonstone] 둘 다가 [북풍의 등에서] 보다 먼저 나온 작품이며, 맥도널드처럼 킹즐리도 성직자였다고만 답하겠습니다. -_-;
그럼 우선 이 책의 가장 훌륭한 부분인 북풍의 이미지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타운젠드의 간략한 요약으로도 사람을 낚기 충분할 만큼, 이 '북풍' 캐릭터의 외양은 완벽합니다. 이 작품 속에서 북풍은 정말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그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이 책의 거의 모든 버전의 표지를 차지하고 있을 것으로 사료되는) 머리카락의 여인입니다. 밤 하늘 가득히 펼쳐지는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커다랗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북풍은, 품 혹은 그 문제의 머리카락 속에 주인공 다이아몬드 소년을 품고 세상을 날아다닙니다. 에로틱합니다, 매혹적입니다! 가끔 북풍(과 머리카락)은 힘을 잃고 '그녀의 집 앞에' 힘없이 눈만을 빛내며 앉아 있기도 합니다만 이 책의 삽화 중 가장 눈을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장면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애들이라면 악몽 꾸겠네요.)
수 많은 책의 삽화를 그렸던 미국인 제시 윌콕스 스미스Jessie Wilcox Smith는 북풍(과 그 머리카락)을 멋지게 그려 놓고 있습니다. 때로는 클림트의 그림이 생각날 정도로 아르 누보적입니다. 좀 찾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르 누보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짙은 외곽선과 평면적인 형태를 사용하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알려져 있더군요.
제시 윌콕스 스미스의 다른 작품들.
그러면 이 아름다운 북풍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당연하게도 캐릭터입니다. 이 소설의 북풍은 결코 좋은 사람(...사람?!)이 아닙니다. 북풍이 여기서 한 일 중에 가장 좋은 일을 꼽으라면 '아무 것도 안 한 것' 을 꼽아야 할 정도로요. 북풍은 다이아몬드 소년을 어딘가 내팽개치고 멋대로 사라지기도 하고 무죄한 사람들이 탄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두
'무자비한 자연' 이나
'변덕스런 구약의 신'의 은유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할 수도 있지만...
못 하겠어요.
아무리 비위 좋은 저라도 이건 안 됩니다. 저 성경도 천로역정도 읽었습니다. 그 외 온갖 뿜는 기독교 문학의 고전들도 읽었고 성인전도 어지간히 수집했기에 이쪽 방향 이야기가 대략 어떤 간지여야 되는지 대부분의 한국인들보다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북풍은 사실 무자비한 자연이나 변덕스런 구약의 신 같지도 않습니다. 그냥
미친 년일 뿐입니다. 사이코 킬러나, 좀 나간 동네 누나 같아요.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서 외경으로 몸을 떠는 대신 '미친 년...' 하고 중얼거리게 된다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이야기의 잔혹함이나 무자비함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 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
너무 뻘덕스러워! 남중생이 낮잠 자기 전에 '흠...' 하고 생각한 걸 그냥 옮긴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 소년이 새끼 그리폰(아무런 입체감 없이 정의롭기만 한 캐릭터를 제 주위에서 부르는 단어)인 데다 그의 순진함과 어른스러움의 밸런스가 엉망인 것부터 중간에 견딜 수 없는 시와 노래가 무수히 나오는 것까지 전부.
어쨌든 일독의 가치가 있기는 합니다. 작가의 상상력은 그가 공들여 짜넣은 교훈보다는 별 의미 없는 환상적 장면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지만요. 말하는 스테인드글라스나 북풍의 형상 변화는 영상물의 훌륭한 키포인트가 될 테지만 이 이야기를 가지고 애들의 마음을 잡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앞에 늘어놓은 그 모든 것들조차
애들이 재미있어 하기만 한다면야 타운젠드적인 헌신으로 견뎌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럴 것 같지도 않다고요!
Trivia
1. 당연하게도,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 원문
전문이 있습니다.
2. 위의 '자신의 집 앞에 앉아 있는 북풍' 그림으로
재미있는 일을 한 사람이 있군요.
3. 번역하신 분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신 건지, 아니면 애들한테는 죽는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4. 톨킨과 C. S. 루이스는 둘 다 맥도널드를 스승으로 생각했다고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