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사 크리스티의 수많은 단편들 중 무엇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하면, 잠시 생각은 해 봐야겠지만 그래도 [초콜렛 상자]를 꼽겠습니다. '진실은 눈 앞에 있었다' 전개도 좋고, 인물의 배치도 간결하면서도 잘 되어 있고, 현역 경찰 시절의 푸아로가 나오는 등의 장점이 많은 소설이지만 제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것은 좀 심술맞은 이유에서입니다. 이 이야기는, 전무후무하다시피 한 푸아로의 실패담인 거예요. 전 어릴 때부터 이 단편이 좋아서, 해문판의 [포와로 수사집]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좀 자란 후에는, 처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더군요. 이를테면 독실한 카톨릭 신자 푸아로라는 말이 얼마나 괴이한 울림을 주는지 같은 것들 말이에요. (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전 요즘도, 각별히 우울한 시기가 아니면 TV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DVD로 보는 영화와 달리, TV는 통제할 수 없고 시간을 맞춰 뛰어가서 붙들어야 하는 미디어입니다. 귀찮아요. 꼬박꼬박 챙겨 본 TV 드라마는 정말로 좋아했던 [크로싱 조단Crossing Jordan] 정도인데, 그나마도 그런 참혹한 DVD 출시 스케줄이 아니었으면 안 챙겨봤을 겁니다. 여섯 시즌 하고 잘릴 동안 DVD가 딱 한 시즌 나왔거든요. 하지만 끔찍하게 우울할 때는 TV를 봅니다. 아니 정신을 팝니다. 좀 어릴 때는 투니버스의 [스타쉽 트루퍼스] 애니메이션판을 보며 저녁식사를 만들어서 [다리아]를 보면서 먹는 게 유일한 낙이었고, 나이가 좀 더 들어서는 수요일은 [몽크], 목요일은 히스토리 채널의 푸아로 드라마가 유일한 낙이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네, David Suchet가 푸아로로 나온 시리즈 [Agatha Christie's Poirot]를 말하는 겁니다. 전 이 드라마 시리즈 험담을 많이 했지만 좋아했어요. 험담은 주로 매번 잽 경감과 미스 레몬과 헤이스팅스가 전부 몰려나와서 비-푸아로적인 방식으로 깽판치며 끝나는 엔딩에 관한 거였는데, 아무튼 저는 그걸 꽤 많이 참을 수 있을 정도로 에르퀼 푸아로라는 탐정을 좋아합니다. David Suchet는 진짜로 완벽한 푸아로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시리즈 버전 [초콜렛 상자]에는 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앞에 썼다시피 이 이야기의 가치는 전무후무한 '푸아로의 실패담' 입니다. 어느 정도냐면, 푸아로 본인이 자신이 '명백한 사실을 보지 못한 것', 혹은 자신의 실패를 상징하는 단어를 '초콜렛 상자' 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쓸데없이 여러 가지 장치를 붙이다 이 이야기의 깨끗하고 간결한 골격이 파묻혀 버렸습니다. 어째서 뜬금없이 '잽이 훈장을 받게 되어 푸아로랑 같이 벨기에에 간다'는 전개가 되어야 하는 거죠? 왜 푸아로가 비르지니 메나르Virginie Mesnard 양한테 반해야 합니까! 물론, 푸아로의 평소 속성을 감안하면 당연히 저 아가씨가 예뻐서 사건을 맡은 거겠지만(...) 그랬다고 저렇게까지 반할 필요는 분명히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불만은 이겁니다.단편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에는 명백한 정치적 쟁점이 있었습니다. 즉, 전 이 이야기의 결말이 반드시 '메나르 양이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아이러니를 날려버린 각색자는 정말이지 욕을 먹어도 쌉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드라마 버전에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화면의 곳곳에 눈 둘 예쁜 것들이 많이 나와요. 일단 David Suchet가 연기하는 제복 차림의 푸아로를 보는 것은 매우 신나는 경험이지요. 흰 끈 장식이 소매에 예쁘게 들어간 데다 스탠드 칼라에 금자수가 놓이고 단추가 잔뜩 달린 벨기에 경찰의 예쁜 제복!
그리고 두 번째로는 역시 이 이야기의 제목인 '초콜렛 상자' 가 있습니다. 소설 본문에서도 초콜렛의 크기가 '꽤 크기 때문에' 등등의 묘사가 있었지만...화면에 등장한 건 한 입에 하나 넣기도 힘들 것만 같은 크고 맛있어 보이는 초콜렛이었습니다. 벨기에산 초콜렛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창해 ABC 북 중 [초콜릿] 을 인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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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람들은 블랙 초콜릿을 너무 좋아해서 카카오 함유율이 높은 쓴맛의 초콜릿이 품질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밀크 초콜릿도 각 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져 시장 점유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초콜릿에 우유를 많이 섞는 전통적 방법을 고수하고 있고, 벨기에에서는 크림을 풍부하게 섞어서 더 잘 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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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이라는군요! :]
[초콜렛 상자]는 영국에서 단편집[Poirot's Early Cases](1974)에 포함되어 처음 출판되었습니다만, 미국에서는 [Poirot Investigates](1924)의 미국판(1925)의 일부로 먼저 출판되었습니다. 한국어판 [포와로 수사집]은 미국판과 구성이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