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해석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작년 12월에 블로그에 썼던 것을 가져옵니다. )

근래 반년 안에 본 것 중에 이 정도 허탈감과 분노를 안겨 준 것이라면 영화 [1408]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언제나 영화보다 책 쪽에 점수를 더 잘 준다는 걸 고려하면 이것은 정말로 독보적인 결과입니다. 심지어 [다 빈치 코드]도 이 책보다는 재미있습니다.

원래 책 앞뒤에 씌어 있는 말에 대해서는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얘기 좀 해야겠습니다. 왜냐면 이 책의 홍보 포인트가 정말로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앞표지 타이틀 아래에는 "정신분석학과 추리소설의 완벽한 만남! 프로이트와 융, 미국의 연쇄살인을 해석하다! " 라고 씌어 있는데 이 말은 과장이 아니라 거짓말입니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전립선 문제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융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다른 제자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뻔하디 뻔한 말을 충고랍시고 던지고 그러다가 좀 쓰러지는 것 이외에 아무 일도 안 합니다. 카를 융은 미국에 도착한 당일부터 매우 이상하게 행동하고 비밀스럽게 모습을 감추고 더욱 이상하게 행동하고 수상쩍은 자들과 접선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일도 안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같지도 않아.



그 유명한 사진. 

 모든 추리는 작가의 페르소나임이 분명한 상류 계급 출신의 젊고 늘씬하고 잘생긴 정신분석의가 하는데 이 놈은 자기 직업윤리의 희박함을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때우려고 하고 프로이트는 그걸 부추깁니다. 물론 그러면서 환자들과 붙어먹는 카를 융을 비난하지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자 프로이트와 악마의 자식 융'의 구도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저는 프로이트도 싫어할 뿐더러 융이 정확히 무슨 파시스트적인 이론을 나불거렸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지만 이 세상에는 일단 '카를 융 싫어하는 소설가들의 모임'이 존재하는 게 분명하고 그 사실에 대해서만은 융에게 하염없이 동정심을 느낍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저 두 사람이 별로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미국 방문시 무언가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첫 페이지의 문구는 어떻게 해석해도 낚시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가 충격을 받을 만한 것은 대략 이런 것들이 있는데 1) 융의 변절 : 이것은 '미국인들' 을 야만인이라고 일컬은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2) 살인사건 자체 : 사건의 잔혹성으로 그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이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살인사건은 이런 류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지극히 온건합니다. 제가 21세기의 때에 찌들었나 싶어 일부러 [연쇄살인범 파일] 따위를 다시 읽었습니다만 20세기 초반이라고 해서 이게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사건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3) 살인사건에 드러난 미국인들의 변태심리 : 이 사건의 내용물은 앞에 언급한 '귀족가문출신의젊고늘씬하고잘생긴정신분석의™'의 분석에 따르자면 그야말로 프로이트 이론에 입각한 모범적인 케이스이니 여기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면 그야말로 자기 목을 조이는 결과가 되지요.

이쯤 되면 실은 프로이트 지능안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프로이트가 과연 지능안티가 필요한 정도의 인물인지는 논외로 하고요. 하지만 작가의 경력이나 홍보방향으로 보아 그럴 리는 없으므로 이건 그냥 '한번 망상해 본 걸 두번 생각지도 않고 실행에 옮긴 소설' 이라고 보는 게 적합할 겁니다. 친구 아무개가 종종 '영화 혼자 만드는 것도 아니고...' 라는 탄식을 하는데 소설은 혼자 쓰는 거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 정도 계획된 베스트셀러라면 편집자가 옆에서 이것저것 잡아줘야 했을 텐데 그것조차도 안 한 것 같습니다. 넘쳐흐르는 아마추어리즘에 익사할 거 같아요!

역시 홍보 포인트 중 하나인 '20세기 초 뉴욕의 풍부한 풍속 묘사' 같은 것도 없습니다. 이 말 한 사람은 '풍속'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게 분명하고, 작가는 그 시대 여자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합니다. 있는 것은 오로지 읽다가 질려서 토할 것 같은 분량의 '당시의 뉴욕 건물들'의 묘사인데 그야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겠지만 최소한 저는 아닙니다. 여자에 대해서나 범죄에 대해서나 자료 하나 들쳐보지도 않은 채로 흠'ㅁ' 하고 생각한 걸 그냥 옮긴 것 같아요. 빅토리아 시대 영국 도색잡지에서도 비웃음당할 것 같은 중학생 수준의 에로 망상을 펼쳐놓고 '오오 사악한 변태의 섹스범죄 오오' 하고 있는데 정말 견딜 수 없습니다.  

 
 
영국판 표지. 이게 제일 낫군요.

 내용보다도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정말 너무나도 저렴해 보이는 표지 사진이었습니다. 한국판 디자인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책 자체의 모양새는 고급스럽고 공을 들인 티가 났지만 저 사진은 정말...=_=; 그나마 (같은 사진을 쓰고 있는) 미국판 하드커버는 더스트재킷을 이중으로 써서 사진을 좀 가렸다고 들었습니다. 참고로 한국판 앞표지에는 "뉴욕타임즈,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 전세계 32개국 출간 예정! 영화화 결정! " 이라는 말이 씌어 있지만 실제로 이 책의 아마존 사용자 평점은 51명 평균 별 셋 반으로, 아리아나 프랭클린의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Mistress of the Art of Death](41명, 별 넷 반)보다 뒤지며 심지어 다이언 셰터필드의 [열세 번째 이야기The Thirteenth Tale: A Novel](407명, 별 넷)보다 처진다는 것을 괜히 밝혀두고 싶군요.



미국판 하드커버의 이중 표지.
저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컨셉인 듯.

전반적으로 내용물보다는 한국판 책의 모양새 쪽이 더 훌륭합니다. 요즘 추리소설 페이퍼백들을 문고판이 아니라도 가볍게 내려는 시도가 있는데(매우 마음에 듭니다) 이 책은 500페이지가 넘고 장정에 꽤 공을 들인 고로 그 정도까지 가볍지는 않더라도 적당히 기분 좋은 무게입니다. 최소한 어느 출판사의 책들처럼 팔이 빠질 듯한 고통을 안겨주지는 않습니다. 미국판 페이퍼백의 표지 사진을 내지 중 한 군데에 실은 것도 재미있습니다. 다만 디자인 정보가 빠져 있는 게 좀 아쉽네요. 아, 음식과 관련된 한두 가지 오류와, '얇은 허리' 같은 거슬리는 표현을 제외하면 번역은 괜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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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11-0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eppie님. 저는 이 책을 꽤 재미있게 읽었지만,

한마디로 인간같지도 않아.<-- 이 문장 때문에 eppie님께 반했어요, 정말!! >.<


eppie 2008-11-07 10:53   좋아요 0 | URL
흑, 감사합니다. [살인의 해석]을 꽤 재미있게 보셨다니 이런 리뷰를 들이댄 것이 갑자기 송구스러워집니다. ㅜ.ㅠ 하지만 다른 부분을 가능한 한 좋게 보려 애쓰더라도, 저 카를 융 캐릭터에는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