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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푼도 더도말고 덜도말고 ㅣ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15
제프리 아처 지음, 강호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12월
평점 :
-미스터리 팬이라면서 이걸 아직까지 안 읽었느냐, 혹은 제프리 아처 팬이라면서 이걸 아직까지 안 읽었느냐는 말에 대한 변명 : 전 코지 미스터리도 아니면서 사람 안 죽는 걸로 유명한 미스터리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_=; 한창 미스터리 기분일 때는 분명히 이 작품은 너무 가볍고, 그러니 요즘처럼 완전히 나사가 풀려 있을 때 볼 수밖에 없어요. 코미디는, 오히려 컨디션이 나쁠 때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특히 자신과 너무 비슷한 종류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경우에는.
유명한 작품이니 새삼스레 줄거리 요약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사기에 사기로 갚아 주겠다는 발상을 해낸 것부터가 좀 걱정스러운 데다, 아무래도 일이 너무 얼렁뚱땅 잘 돌아가는 경향이 있지만 애초에 이 '계획'이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작가에게도 관심 밖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방법을 택하는 대신 이 방법을 책으로 쓰는 쪽을 택한 걸로 봐서 더더욱. )
캐릭터와 돌발상황의 재미가 중요시되는 전형적인 '아무개의 몇 명' 이야기입니다만, 그 캐릭터라는 것이...냉철한 두뇌와 대담한 심장으로 임무를 쓱 해치우는 프로페셔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며칠 전에 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르웰린 모스와 너무 대조되어서 가슴이 다 아플 정도입니다. 주모자인 스티븐 브래들리Stephen Bradley 교수부터가 이전에 이런 일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책상물림인데다, 나머지 세 사람도 결코 이런 일에 능하다고 볼 수 없는 종류의 경력과...배짱을 갖고 있습니다. -_-; 그 결과 프랑스계 화상 장-피에르 라망Jean-Pierre Lamanns은 긴장에 못이겨 토하고 '쓸모없는 귀족' 제임스 브릭슬리 경Sir James Brigsley은 피를 보고 쓰러지고 긴장이 갑자기 풀려 쓰러지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과연, [보트를 탄 세 남자]의 전통이 이런 식으로 살아 있는 거군요.
한마디로 이 놈들 정말 너무 못 미덥습니다. 제 생각이 아니라 본문의 전개가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 이야기의 최강 캐릭터는 (이 네 명 중에 있을 리 만무한 거야 당연하고), 이들에게 사기를 친 하비 메트카프Harvey Metcalfe가 아니라 브릭슬리 경의 애인인 앤 서머턴Anne Summerton입니다. 이 캐릭터에 비하면 하비 메트카프는 오히려 어리숙한 정도라고 해야 할 겁니다.
당연하게도, 이들의 사기 행각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소설은 정말로 재미가 없어집니다. (애초에 내용의 배치 자체가, 그렇게 안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80-90년대 국내에서 이 작품을 소개한 미디어는 늘 치밀하고 기발한 사기행각에 중점을 맞추곤 했었는데, 그러니까 별로 기발하지도 치밀하지도 않다고요. 필사적으로 노력은 했지만 역시 못 미더운 인간들의 허술한 계획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을 제대로 즐기려면, 제프리 아처의 몇몇 단편들처럼 이 귀여운 인물상을 즐기는 쪽으로 소비해야 합니다.
Trivia
팬아트를 그려봤습니다.
...만, 실은 저는 로빈 오클리 의사가 저렇게 생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생겼을 거라고 추정되는 방향은 너무나도 그리기 싫은 방향이라...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