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전자상가에 가서 그 남자의 새 핸드폰을 사 왔다. 미끈한 게 잘 빠지기도 했지만 안경을 벗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또렷하게 보일정도로 글자가 크게 찍히는게 마음에 든다. 하지만 내가 돌아왔을때 그는 마침 출타중이었고, 나는 또 나대로 볼 일이 있어 테이블에 상자 채 던져 놓고 집을 나왔다.
그와 나의 소통은 늘 그런 식이다.
#. 2
내가 태어나던 날 그는 까만 수트를 입고 수술실 문 바깥에서 애 낳는 여자를 기다렸다고 했다.
“차림이 그게 뭐에요?” 라고 여자가 물었고, 그는
“첫 인상이 중요하잖아.” 라고 대답했단다.
그래, 첫 인상은 좋았다.
#. 3
내가 여섯 살 먹었던 해.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남자는 여자와 크게 말다툼을 했다. 여자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고, 나와 남자만 교회에 갔다. 그나 나나 별로 예배에는 관심이 없어서 예배가 끝나자마자 바쁘게 교회를 나왔다. 나오는 길에 차가 막혔다. 마침 집에 가기도 싫었겠다. 남자는 내게 놀이동산에서 놀고 가자고 제안했다.
“응.”
싫었지만, 집에 가 봤자 별 볼일 없다는게 너무 뻔했으니까.
역시나 놀이동산은 예배만큼 재미없었다. 남자는 놀이기구를 타지 않았고, 나는 혼자 타는 놀이기구가 겁났다. 남자는 말주변이 없어 적당한 놀이 상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가 뭐라도 마냥 좋아하는 순진한 애새끼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저녁때까지 놀이공원을 걸어다니며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로서의 그는 그저 그런 편이었다. 자식으로서의 나도 썩 이상적인 편은 아니었지만.
#. 4
나는 그에게 몇 번 얻어맞은 적이 있다. 보통 가족 간의 폭력이란 과도한 기대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그의 기대는 좀 지나친 구석이 있었다. 세상에, 내가 공부 잘 하기를 기대하다니. 안타깝게도 평생 30등을 넘어보지 못한 내 역사와 전통은 제법 유구해서 역시나,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도 학습은 심하게 부진했다. 어느 날 수학시험 열 문제 중에 두 개를 맞춰가지고 왔을 때 그는 유례없이 분노했고, 나를 막대기로 때렸다. 때린 횟수만큼 점수가 배가 된다면 오죽 좋을까. 하지만 사람이 타고난 능력이 고만하고 또, 사는게 늘 뜻같지가 않아 그 비슷한 일은 몇 번쯤 더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은 그는 포기가 빠른 편이었다는 것.
마지막 폭력의 기억은 열 아홉 무렵이다. 그 해 우리의 전락은 눈부셨다. 그는 사장에서, 소장에서, 백수로. 나는 학생에서 백수로. 신분이야 약간 달랐지만 나나 그나 공사판을 전전했는데 나는 번 돈을 유흥으로 탕진했고, 그는 공과금으로 탕진했다. 그런 이유로 그와 나는 집에서 거의 얼굴 맞댈 일이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비 오는 날. 비가 오면 일이 없으니까.
어스름한 저녁에 그는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꺼내 빈 집에서 혼자 마시고 있었다. 부엌에는 여자가 그린 100호 짜리 정물화가 걸려 있었는데, 누런 조명에 어우러진 그는 꼭 그림의 일부 같았다. 나도 맥주 하나를 꺼내 그 앞에 앉았다.
천천히 한 병을 다 비워 갈 즈음 그가 그랬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냐.”
“내킬 때 까지.”
그가 병을 놓고 일어났고, 나도 일어났다.
“그렇게 인생 탕진하면 남는 게 뭐야.”
“탕진 안 한 사람은 뭐가 남았는데.”
그는 주먹을 들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주먹은 내 오른편 얼굴에, 내 주먹은 그의 왼쪽 턱에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뒤늦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닳은 우리는 정말 정물화의 오브제처럼 우뚝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건은 그 이전과 이후 사이에 커다란 단절을 만들었다. 우리는 서로 좀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란건 생각같은 생각이라기 보단 어쩌면 수컷으로서의 본능같은 것일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우리의 이후 관계는 뭐라고 딱 꼬집어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이전과는 뭔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 5
얼마 전 그가 아팠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새벽 두시였다.
노인네는 급체를 의심해서 열 손가락을 따고, 구급약을 먹여봤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맹장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위치가 달랐다. 어쨌거나 웬만큼 아파서는 기색도 안 하는 그가 그 정도로 앓는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들쳐 업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는 내 등을 밀어내고 신을 신는다. 그리고 경련하는 배를 움켜쥐고 걸어 결국 제 힘으로 차 문을 연다. 나는 다만 차를 운전해서 늘 가는 종합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그의 병명은 신장결석.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통의 크기만으로 따졌을 때 출산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핏기가 가신 그의 얼굴은 차가웠다. 진통제는 잘 먹히지 않았고 그는 밤새 앓았다.
나는 응급실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그를 얼른 뉘어놓고 입원 수속을 밟았다. 그를 옮기고, 수술을 예약하고, 싸인을 하고, 진단을 받아 보험회사에 연락을 했다. 일사천리로 수술은 무난하게 끝났고, 그제야 한 숨 돌린 나는 그를 차에 태워 집으로 옮겨왔다.
차 안에서 내가 물었다.
"나 고맙지."
그는 아무말도 안 했다. 긍정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은 때로 침묵이다. 나는 좀 뻘쭘해져서 음악을 틀었는데 그때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저음, 들릴듯 말듯, 음악소리에 묻힌 그의 목소리.
"고맙다."
차라리 안 듣는게 덜 뻘쭘했겠다 싶었다. 이렇게 간질간질한 표현이라니.
#. 6
그의 인생에서 몇 가지 미스테리한 구석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미스테리한건 사범대를 졸업하고, 인천까지 가서 어울리지도 않게 빵집을 차린 일이다. 만약 우리 집 앞 빵집 아저씨가 우연찮게도 그때 그의 종업원 중 한명이 아니었다면, 난 평생 그의 인생 커리어에서 빵집 오너를 의심했을거다.
식빵 한 줄을 사러갔을때, 배가 남산만하게 나오고 턱살이 접힌 빵집아저씨는 용케 나를 알아보고 서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왔다. 풍광좋은 인천 앞바다에 몇 명의 사내들.
“이땐 나도 몸매가 죽였는데. 자네처럼.”
그는 빵을 시킨 것 보다 두배는 더 포장해 놓고 본격적으로 수다 떨 준비를 한다.
“이게 나야.”
거기엔 무슨 복고컨셉 패션 화보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너댓 사람이 서 있었다. 그가 가르키는 그 사람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옆으로 흩어지는 바람머리, 허벅지가 짝 붙는 아이스진에, 빨간 셔츠를 입고 상당히 깜찍한 머플러를 매고 있었다. 나는 그 아저씨와 사진을 두어 번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실례를 무릅쓰고.. 뿜었다. 아, 그 이질감이란.
“이게 자네 아버지고.”
그는 가운데의 청년을 가르킨다. 그는 신화의 전진을 닮았다. 중키에 다부진 체격, 지금보다는 조금 날카로운 인상.
"인천에서 제일 큰 빵집이었어. 자네 아버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지."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빵집 아저씨가 그런다.
"자네 아버지 가끔 들르시면 자네 얘기 자주 하시는데 알아? 자네가 하는 일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지."
젠장. 핀트가 어긋나는 건 늘 이런 식이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싫다. 정말.
#. 7
내 인생에서도 몇 가지 미스테리한 일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대학을 들어간 일이다. 고등학교도 못 나온 양아치, 그것도 반에서 30등도 넘어본 적도 없는 인간이 언감생심 대학이라니. 어쨌거나 나는 원서를 쓰기 위해 기웃거렸고, 의논할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 그래도 대학 나온 그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미잘아, 네가 공부로는 안되니까 전문대를 지원해서 ‘기술’을 배워라. 집에서 ‘가까운’ 00전문대는 어떻겠니.”
나는 그의 조언을 새겨들었고. 서울특별시 지도를 꺼내서 집에서 제일 가까운 대학까지 센치미터를 쟀다. 그리고 그 학교를 갔다. 좋은 조건으로 오라고 전화 온 학교도 있었지만 그냥 그 학교를 갔다. '가까웠'으니까.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전문대를 안가서 그런지 기술도 뭣도 못 배웠긴 했지만.
어쨌거나 학교를 다니게 된 이후로 나는 세 탕씩 알바를 뛰느라 집에 늦는 일이 잦았는데. 어느날 그가 내게 물었다.
“미잘아, 너 혹시 학교 '야간'으로 들어갔니?”
나는 뭘 하는 중이라 정신이 없어서 대답대신 대충 끄덕거리고 말았고 그는 최근까지 내가 야간대학을 나온 줄 알았다. 그렇지 뭐.
#. 8
“밥줘.”
“니가 해먹어.”
“나 호강시켜 준다면서.”
물론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다. 할 사람도 아니다. 그는 말 대신 몸을 일으켜 내게 돼지 두루치기를 해 줬다. 나는 말도 없이 큼직한 고기조각을 씹어먹는다. 내가 먹는 동안 그는 티비를 켰는데, 유키스의 ‘만만하니’ 노래가 나오니까 얼른 뉴스로 채널을 돌린다. 그는 대체로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건 어디서 배웠어?”
“요리학원.”
그가 말했다. 그는 빈말 하는 법이 없다. 나는 충격을 받아서 손끝이 저릴 지경이다. 세상에, 도대체 언제? 왜? 무슨 생각으로? 어쨌거나 그의 돼지 두루치기는 제법 깊은 맛이 났다.
“아빠.”
“왜.”
“젠장, 그 요리학원 어디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
“왜.”
“우리 알고 지낸지도 수십년인데, 그냥 말 놓을까?”
그는 다시 채널을 돌린다. 공교롭게도 유키스의 만만하니.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노래가 끝날때까지 채널을 돌리지 않았을 뿐. 세상에, 이런 센스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