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룰 대로 해서는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이빨로 글러브의 찍찍이를 물어 뗐다. 내가 벗어 던진 16온스 글러브는 아무도 없는 체육관 링 밖으로 풀썩 떨어졌다. 열여덟 살의 나는 채 영글지도 않은 맨주먹을 을러대면서 아마 이렇게 말했을 거다.

“꼬우면 너도 벗어.”

그도 글러브를 벗었던가. 어쨌거나 유혈이 낭자한 시합으로 기억한다. 불행한 것은 내 쪽에서 조금 더 낭자한 편이었다는 것,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더 심하게 낭자해지기 전에 퇴근한 줄 알았던 관장이 들이닥쳤다는 사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는 것은, 내가 그 길로 체육관에서 쫒겨났다는 거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다시 링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의치 두 개에, 눈가에 흉터가 몇 개 더 늘기는 했지만 이제 더 주먹이 오고 가는 것 따위에 자존심을 걸지도, 상대의 도발에 평정심이 흔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마음을 비운 것이 주효했는지 엇비슷한 체급에서 져 본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제까지는 말이다.

#. 1

흐릿한 시야로 상대를 가늠한다. 키는 5센치, 무게는 한 체급 정도 높다. 녀석은 바싹 가드를 올린다. 쌔고 쌘 크로스 암 가드. 공이 울리고, 고등학생이라는 그 애송이는 팔을 뻗어 내가 내민 글러브를 툭 치고, 다시 얼굴을 감싼다. 겁을 먹은 걸까. 나는 아무 의미 없는 견제용 잽을 던지고 느긋하게 스텝을 밟았다. 예상대로 애송이의 왼 주먹이 들어온다. 내 턱을 노리는 레프트 더블. 느리다. 이어지는 레프트 바디. 다시 백 스텝. 시합 나간다는 녀석 치고는 너무 느린 주먹이다. 이봐 고삐리. 그 주먹으로는 동네 중학생 주머니도 못 털어먹겠는데? 나는 씩 웃었다. 

가드도 하는 둥 마는 둥 사뿐사뿐 백스텝을 밟는데 아차, 어느새 등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로프의 감촉. 정식 규격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의 연습용 링이라는 걸 깜빡했다. 어쨌거나 빠져 나가면 그만이다. 가볍게 녀석의 바디에 잽을 넣어 주고 왼편으로 돌아 나가는데.

쾅. 하고 뭔가 묵직한 충격이 내 얼굴을 오른편으로 돌린다. 라이트 훅? 위험을 감지한 건 눈이 아니라 몸이었다. 반사적으로 끌어올린 가드에 다시 쾅 하고 충격이 느껴진다. 레프트. 그리고 이어지는 바디 연타. 그리고 순간 허술해진 안면 가드 사이를 송곳처럼 뚫고 올라오는 어퍼컷. 피 냄새가 훅 나면서 머리가 핑 하고 돈다. 침에서 찜찌름한 맛이 난다. 뭐야 도대체. 가까스로 소낙비처럼 쏱아지는 펀치를 뚫고 들어가서 녀석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찔러 넣었다. 이빨 끝이 깨져 나갔는지 작고 딱딱한 조각들이 입 안에서 버석거린다. 이런 젠장.

너 어디서 좀 놀아봤니? 

#. 2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김윤식의 명대사.

“한 번! 두 번도 아니야! 딱 한 번만 삐끗하면 씨발, 인생 나가리야. 어? 정신 빡세게 차리고! 항시 가드 올리고! 상대 주시하고!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상대가 씨발,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들어오는가!”

왕년에는 잘 나가던 복서였던 노가다 꾼의 눈에, 세상은 링이다. 그래서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 동구의 취향은 그에게 너무나 허술한 약점으로 보이는 거다. 물론 영화에서야 동구는 놀라운 의지로 가부장의 절대적 세계관을 극복하지만, 만약 그것이 크레딧 올라갈 일 없는 현실이라면, 통통하고 귀여운 이반의 삶은 끊임없이 시험받고, 끊임없이 고달플 것이다. 종국에는 정체성을 감추고 일반에 섞여들거나 다른 성적 소수자들처럼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 가드 올리고 불안한 눈빛으로 상대 주시하며 살아가게 되겠지.

삶이 고달프고 시험받는 것이 비단 성적소수자 뿐은 아닐거다. 느낌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정치적 지향이 달라서, 돈이 없어서, 반푼어치도 안되는 권력에 휘둘려서 우리는 얼마나 높고 단단한 가드를 올리고 살아가는가. 진한 화장이, 딱딱한 수트가, 비싼 악세사리가, 짙은 선팅이, 귀에 꽃은 이어폰이 내겐 그런 가드의 일종으로 보인다.

#. 3

복싱의 Box는 실제로 정육면체의 그 박스를 의미한다고 한다. 경기가 시작하고 레프리가 Box를 선언하는 순간 서로를 노려보던 두 명의 파이터는 가상의 박스를 만든다. 어떤 박스? 길이는 쭉 뻗은 팔을, 높이는 자신의 배꼽에서 이마의 간격을 닮은 박스. 대충 새우깡 박스 정도의 크기쯤 되는 그런 박스. 문제가 생기는 건 링 중앙에서 둘의 박스가 부딪히는 순간이다. 경기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배타적이고 강경한 물리적 권한의 행사. 그것이 바로 복싱Boxing이다.

종종 링은 세계의 작은 시뮬레이션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보면 어떨까? 주먹은 권력을, 박스는 영토나 영역을, 다운은 실패를, 패배는 죽음이나 멸망을 상징한다고. 사회학자 김명진도 한국 사회를 ‘사각의 링’에 빗대어 설명한다. 지금 이 사회는 정말이지 단 한순간도 방심하기 어려운 위험사회라는 것이다. 정말로 대한민국의 사회는 링을 닮았다. 수 없이 많은 박스가 서로의 박스를 위협하고 갉아먹는. 어린 내가 가끔 링과 현실을 혼동했던 건 그런 이유지 싶다.

그렇게 보면 실제의 복싱 경기는 매우 신사적이지 않은가. 최소한 링에서는 슈퍼 헤비급이 동네 애송이를 두들겨 패는 법은 없으니까.

#. 4

내가 1라운드의 데미지를 회복 한 건 2라운드 중반 이후였다. 그 때까지 나는 거의 유효타 없이 완전한 수세에 몰려있었다. 승기를 잡은 스파링에서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녀석은 1라운드 초반 이후 거칠게 연타를 퍼부어댔다. 저돌적으로. 나는 그게 좀 얄미웠나보다.

2라운드 후반에 내가 일부러 주먹을 크게 휘두른 건 단지 녀석을 도발하기 위해서였다. 생각대로 녀석은 3라운드에도 날 코너로 몰아붙였다. 고등학생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경기 운영이었다. 내 몸뚱아리를 두들기는 콤비네이션은 아주 빠르고 리듬감이 있었다. 주먹에 힘만 좀 더 붙었다면 2라운드를 넘기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으니까.

교과서적인 복싱을 구사하는 녀석의 유일한 문제점은 폭력 자체에 너무 도취된다는 점. 나도 그 터질 것 같은 아드레날린을 안다. 내 박스가 상대의 박스를 다 먹어 치울 때의 그 흥분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종류다. 상대가 침몰하는 그 순간 링 안의 위너는 정복자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나는 녀석이 더 도취할 수 있도록 침몰하는 상대를 연기했다. 단지 내게 더 큰 충격을 주기 위해 큰 궤도로 주먹을 휘두를 수 있도록. 그리고 3라운드 후반, 조바심을 내던 녀석은 일격을 날렸고, 큰 동작으로 턱 밑이 훤히 비었다. 사실 좀 치사하기는 했다. 회심의 라이트 어퍼. 아프냐.. 나도 아프다.

경기가 끝난 후 나는 정확히 이틀간 두통을 앓았고 아직도 오른쪽 턱이 좀 욱씬거린다. 아까는 다 읽은 책을 냉장보관하려고 했는데 그날 데미지의 영향이지 싶다. 으윽. 빌어먹을 고삐리.      

#. 5 



 

 

 

 

 

  

 

“왼손을 곧게 뻗어 봐 그 상태로 한 바퀴 돌아라. 지금 네 왼손이 그린 원의 크기가 대략 너라는 인간의 크기다. 말하는 의미를 알겠냐? 꼬마야. 그 원의 가운데 앉아서 닿는 곳에만 손을 뻗으면 넌 상처 없이 살 수 있어. 복싱이란 뭐냐, 그 원을 네가 주먹으로 뚫어서 밖에서 무언가를 빼앗아 오는 행위다. 밖에는 강한 녀석들로 가득 차 있지. 그리고 그들은 네  원 속으로 치고 들어오려고 한다. 맞으면 아프고 때리면 그들 또한 널 때릴 것이다. 그래도 하겠느냐? 원 속에 있는 게 안전한데도?”

언젠가부터의 내 삶은 영화 ‘GO’의 터프가이 아버지 야마자키 츠토무가 말 하는 것처럼 그리 진취적인 것이 아니다. 조금만 구부리고 살자고 결심한지가 벌써 2년 전인데 구부린 허리가 펴질 날이 요원하다. 혹시 벌써 굳어서 영영 못 펴게 된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올해 내가 세운 목표는 ‘살아남는 것’. 

좀 멀리 가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바쁠 거다. 5년 만에 서재 리뉴얼한 보람도 없이 글 남길 짬도 없을지 모른다. 세상은 끊임없이 나의 박스를 물어뜯으려고 들 테고, 링 밖의 복싱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내 것을 빼앗길까봐 매일을 스트레스와 불면에 시달릴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열 여덟살의 나 처럼 글러브를 벗어 던지지 못할거다. 단지 가상의 마우스피스를 질끈 깨물 뿐.  

당신이 그렇듯, 나도 내 박스 안의 자질구레한 삶을 지키기 위하여 싸울테다. 비루하고 때론 남루하지만 그게 지금의 대한민국. 이 거친 삶의 자리에서 투쟁하는 복서들의 숙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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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1-19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잘님의 복싱형태는 일보일까요. 아니면 일랑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마모루..(이건 절대 아닌 것 같고.)마사루나 타츠야는 아니고...설마...마시바 료..??

인생이 링이고 내가 링에 오른 복서라면 난 어떤 타입일까나 잠시 좀 생각 좀 해봐야 겠습니다.(오래가는게 쎈거라고 생각하면 전 포먼 같은 복서가 되고 싶겠군요.)

뷰리풀말미잘 2010-01-19 14:47   좋아요 0 | URL
더 파이팅 얘기죠? 그거 아직 못봤습니다. 아주아주 예전에 챔프인가 어디에서 연재할때 아, 이런 만화가 있구나 했었고, 애니메이션으로는 한 3화까지 봤는데 솔까말 좀 재미가 없었어요. ㅠ_ㅠ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어지나요?

저는 별로 누구한테 배운 적도 없고, 별로 스탠스에 집착하는 편도 아니고 해서 특별히 이렇다 얘기할만한게 없습니다. 대충 조지 포먼의 크로스 가드와 타이슨 비슷한 피커부의 어중간한 형태일 것 같네요. ^^

인생이 링이라면 메이웨더의 약삭빠른 스타일이 좋을 거 같아요. 보기는 별로 재미가 없어도 유연하고 순발력 있고 맞지 않으면서 실리를 취하는. 용감하고 터프한 인파이터들은 대체로 선수 생명이 짧더라구요. ㅎㅎ

Mephistopheles 2010-01-19 15:13   좋아요 0 | URL
책으로 보시는 것이 백만배 더 재미있습니다. 왠지...스트리트 파이터 기질이 다분히 존재할 것 같은 말미잘님....^^(글러브 벗고 한 판! 이었을 때 알아 봤어야 하는데..^^)

뷰리풀말미잘 2010-01-19 16:50   좋아요 0 | URL
에이 전혀요. ㅎㅎ 그냥 좀 도도하고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하던 시절이 있었죠.

Mephistopheles 2010-01-19 20:01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말미잘님은 일랑 스타일 같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1-19 22:03   좋아요 0 | URL
일랑이라.. 기회 닿는데로 구해봐야겠습니다. ^^

Arch 2010-01-22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싱이라니, 흥미없어요.'라고 미뤄뒀는데...
미잘, 링 밖으로 나가는군요.
부디 살아남아요!

짙은 화장을 해도, 썬팅을 아주 근사하게 해도 난 단박에 어줍 미잘 알아보니까 다 소용 없어요^^

2010-01-22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1-22 16:03   좋아요 0 | URL
저 위 영화들 다 봤어요? 완전 강추인데. ㅎㅎ 저걸 다 보면 어쩜 쪼끔은 복싱에 흥미가 생길지도.

2010-01-22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