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도킨스의 근작 ‘지상 최대의 쇼’를 읽고 있다. 이 책은 생명이 어떤 경로로 진화하는가를 논구한 '에덴 밖의 강', 단지 자연선택 만으로 어떻게 생명체가 지금의 복잡성을 취할 수 있었는지를 밝힌 ‘불가능의 산을 오르다’ 반 기독교적 입장에서 진화란 의지를 가지지 않은 독립적 현상임을 논증한 ‘눈먼 시계공’에 이은 도킨스 진화론의 완결편이다. 논리와 근거는 묵직하지만 펜촉은 600여 페이지를 가볍게 내달린다.
#. 2
이 책에서 도킨스는 진화를 입증하는 다양한 사례를 다루는데 그 중 하나가 러시아 은여우의 가축화 과정이다. 책에 의하면 은여우는 흔한 붉은여우 불페스 불페스의 색깔 변종으로 아름다운 모피의 색깔 때문에 가치가 높았단다. 여우에 대한 사랑과 유전학에 대한 신념을 고수하던 과학자 벨라예프는 시베리아 유전학 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러시아 은여우를 유순한 품종으로 개량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품종개량법은 자연선택을 모방한 것으로 덜 공격적이고, 사람을 잘 따르며, 귀여운 표정을 잘 짓는 개체들을 골라 선택적으로 교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실험자는 여우에게 먹이를 주며 어루만지려고 했고 여우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1. 도망치거나 공격하는. 2. 손길을 허락하지만 무뚝뚝한. 3. 호의적으로 접근하고 꼬리를 흔드는. 벨라예프는 세 번째 집단만을 체계적으로 교배시켰단다.
그리고 6세대가 지나고 여우들은 크게 달라졌다. 제 4의 집단이 생겨난 것이다. 이 집단 여우들의 특징은 사람과 접촉하기를 바라고, 관심을 끌기위해 끙끙거리고, 개처럼 실험자의 냄새를 맡거나 핥았다. 이후 10세대가 지나자 4집단은 18%로 늘어났고, 20대에는 35%, 30~35대에는 전체 실험군의 70~80%가 4집단 즉, 개처럼 ‘가축화한 엘리트’가 되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현상은 예상치 못한 부과적 효과들이었다. 길들여진 여우들이 행동만 개 같아진 것이 아니라 모습도 개를 닮아간 것. 그들은 은빛 털을 잃었고, 대신 흑백 얼룩반점을 얻었다. 여우 특유의 쫑긋한 귀도 개처럼 펄럭거리게 되었으며 탐스럽게 늘어진 꼬리가 개처럼 위로 살랑거리게 되었다. 심지어 발정기의 주기도, 짖는 소리도 개를 닮아갔다.
도킨스는 이 대목에서 유전자의 다형질 발현으로 논의를 이어가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그럴 여력을 잃었다.
#. 3
너무 슬퍼서.
#. 4
진중권은 ‘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사진학의 개념인 ‘푼크툼’을 언급한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사진의 의미에 두 개의 층위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는 ‘스투디움(stadium)’으로,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의미다. 우리는 특정한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하곤 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그런 일반적 해석과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이다.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이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이라 부른다.
이 자국, 이 상처들은 점이다.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 번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 부르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찌름,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흠, 주사위 던지기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괴롭히는) 우연이다.”
나의 슬픔은 푼크툼의 효과였을까?
#. 5
L과 차를 마셨다. 내 은여우 얘기를 듣던 L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던진 한 마디.
"미잘아 나 요새 수능 준비한다. 철학이 하고 싶어졌어. 자아를 찾아 떠날테야."
아, 이런 진화 덜된 새끼가.
저런 놈도 10대쯤 똑똑한 여자랑 교배시키면 좀 우수한 녀석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