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70부작 대하드라마 <서울1945>가 오늘 종영했습니다. 주인공이었던 운혁(류수영)은 인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후에 벌어진 교전에서 죽고, 동우(김호진)와 석경(소유진)은 결혼을, 해경(한은정)은 일본을 거쳐 함흥에 도착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습니다. 운혁은 동우의 품에서 죽어가며, "전후(戰後) 조선땅의 희망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 여느 대하드라마가 그러하듯, <서울1945> 역시도 한차례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종영과 함께 보도된 세계일보 기사에 따르면, "'건국 세력을 모함했다'는 비판과 '좌우의 활동상을 균형 있게 그렸다' 긍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고 하는군요. 전자의 비판은 이승만(1대 대통령)과 장택상(1대 외무부장관)의 후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승만이 친일지주의 딸인 석경을 양녀로 받아들이는 내용과, 장택상의 측근이었던 친일 경찰 출신 창주(박상면)가 여운형(독립운동가, 조선인민당 당수)의 암살에 관여한다는 극중 내용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비판자들은 1억원 상당의 고소와 함께 조기종영 가처분을 신청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후자의 긍정적 평가는 극에서 여운형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국 역사는 뿌리깊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일제시대와 해방 전후 사회주의자를 비롯한 좌익 운동가들을 언급하지 않아왔습니다. 하지만, <서울1945>는 주인공 운혁이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인민당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함에 따라 전례없는 여운형의 해방 전후 행보가 부각되었습니다. 여운형 외에도 석경의 외삼촌 동기(홍요섭)가 조선노동당 정치위원으로, 운혁의 친구 철형(이병욱)이 인민군 대좌로 등장합니다. 좌익 운동가들이 극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면서, 기존의 관행, 즉 좌익에 대한 주변화 적대화 설정이 깨졌습니다. 

- 우선, 전자의 비판을 살펴보자면, 이승만과 장택상의 후계들이 제기한 소송이나 조기종영 가처분의 신청은 일종의 해프님(happening)에 불과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대하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이란 그가 속한 정치세력을 대변합니다. 드라마인 이상 존재하는 픽션(fiction)이란, 그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극중 이승만이 석경을 양녀로 받아들이는 것은, '해방과 더불어 위협받고 있는 자신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해방 후에 형성되고 있던 새로운 기득권 세력과 유착한 친일세력들의 정치적 행보'라는 사실을 드라마화 한 것이죠. 하지만, 이승만의 후계들의 인내심까지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석경을 이승만이 아닌 가상의 한민당 인물과 연결시켜도 드라마 흐름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 것을, KBS의 배려가 아쉽습니다. 장택상 후계들의 소송은 해프닝 축에도 끼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극중에서 여운형을 암살하는 것은 창주이지 장택상이 아니니까요.

- 이제 후자의 긍정적 평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전자의 비판이 소송과 가처분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좌우갈등'이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언론의 도움을 받으며, 순식간에 <서울1945>는 좌우갈등의 격전지로 비화되었습니다. 이런 갈등은, 해경이 친구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대립하던 운혁, 동우와 삼각관계가 되면서, 동우-해경이냐 운혁-해경이냐 하는 시청자들 각각의 바램과 더해지면서 더욱 증폭되었고, 공식 홈페이지 시청소감 게시판이 전장 역할을 했습니다. 동우와 운혁의 대립구도에서, 해경은 중간자적인 역할을 맡으며 두 사람으로 대변된 정치세력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 저는 결론적으로, <서울1945>가 좌우의 활동상을 균형있게 그렸다는 긍정적인 평가에 아쉬움을 느낍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듯이, 기존의 관행과는 달리 사회주의자를 비롯한 좌익 운동가들이 극의 중심에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곧 '좌우의 활동상을 균형있게 그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TV라는 매체는, 관영매체이든 상업매체이든을 떠나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독립 매체가 아닌 이상, TV가 진정한 사회주의자, 좌익 운동가들의 활약상과 이상을 조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서울1945>는 본연의 기획의도와 매체로서의 본질적 특성 사이의 모순에서 줄타기를 했을 것입니다.

- 이런 줄타기는 처음부터, 즉 기획의도에서 부터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의도에 따르면 "좌우에 대한 선입견 없이 작은 영웅들의 숭고한 이상을 그대로 그려 낸다."라고 씌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자유와 평등을 위해 헌신한 그들의 삶은 숭고한 것"이라는 거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작은 영웅'과 '숭고한 삶'입니다. 이것은 <서울1945>가 사건 보다 인물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방영 중 이승만 장택상 후계들의 소송 시비에 휘말리자, "<서울1945>의 핵심은 이념이 아니라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제작진의 고백으로 까지 이어집니다. 

- 실제, '사랑', '가족'이라는 소재는 70부작 내내 <서울1945>를 떠돌았습니다. 그것은 드라마의 인기 소재임과 더불어, 좌우의 활동상을 균형있게 그리고자 하는 노력이 사회적 갈등에 부딪힐 때 제작진의 쉼터가 되었을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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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9-11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혁 역을 맡은 류수영 씨를 좀 좋아하는데요..^^ 첨에는 재밌을 것 같아서 보려다가 나중엔 류수영 씨라도 보자는 마음에 보다가... 이 드라마는 보고 있으면 이내 마음이 시들해져버려서 제대로 본 적이 없어요. 아무리 봐도 이 드라마 주제는 "남녀간의 사랑" 맞는 것 같아요..^^

sb 2006-09-1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25로 넘어가는 후반부에 들어서 제작진의 어깨가 많이 무거웠던 것 같아요. 전 중간부터 보다가, "에이 안되겠다." 해서 처음부터 다시 봤답니다. ^^;

마노아 2006-10-1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마지막 회를 보았는데요, 동우와 석경이는 혼인하지 않았는데요. 동우가 석경이를 두고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으로 끝났어요. 외국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더라구요. 뒷편은 쓰다가 마셨는데 더 올려주세요. 궁금해요^^

sb 2006-10-19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블로그는 혼자만의 공간이자 여럿의 공간이기도 한데, 쓰다 만 글을 저리 버젓히 올려두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