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뒤흔든 1968
크리스 하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60년대를 대표하는 단어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베트남전쟁, 히피문화, 흑인운동, 반핵운동, 워터게이트, 등인가요? 1968년은 전세계적으로 학생운동이 일어났던 해이기도 합니다. 국가에 따라 내세우는 요구는 조금씩 달랐지만, 학생운동의 물결은 프랑스, 영국, 미국, 이탈리아, 독일,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멕시코에까지 이르렀죠.
국가마다 상황과 조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동시대에 학생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인가 공통적인 요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전에 세계노동운동사를 공부하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68년 사이의 자료가 상대적으로 너무 왜소하다는 불평을 한 적이 있는데요, 다름 아니라 그 시기는 세계 자본주의가 20년에 가까운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던 시대였습니다. 이 호황의 한몫을 2차 세계대전 전후에 등장한 케인즈주의 경제학, 즉 경제에 대한 국가의 조정과 수요창출이 담당했을겁니다.
전례없는 풍요 속에서 1991년 소련이 해체되었을 때 만큼이나 많은 변화들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930년대에 활약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중 몇몇은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선언하며 자본주의에 투항하기도 했으니까요.

“존 스트래치는 1930년대 영국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분석에 찬사를 보냈고 사회를 자본주의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제 그 역시 실업과 위기가 과거의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대중 민주주의와 케인스가 발견한 정부의 경제 개입 방법 덕분에 이제 자본주의가 계획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평화 속에서 일어난 1968년의 사건들은 자본주의가 호황기를 마감하고 다시금 불황기 -구체적으로는 1973년 오일쇼크 - 에 접어들게 되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신분까지 가리지는 않을겁니다. 프랑스 소르본 대학으로 대표되는 각국의 학생운동을 비롯해 노동자운동이 거대하게 일어났고, 몇몇 국가에서는 정부 수반들이 교체되기까지 하죠. 그리고, 거대한 저항의 물결은 1975년~1976년을 끝으로 일단 가라앉게 됩니다.

1968년을 단지 ‘학생운동의 해’로 기억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평화 속에서 거대한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왜 이들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각자의 제자리로 돌아간 것인지, 이 운동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이들이 비워준 무대를 채우고 있는 20대 우리와 신자유주의의 몫이 아닐까요?

#

1968년 일련의 사건들에서 학생운동은 분명 선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선도적’ 이란, 이들이 먼저 물꼬를 틔웠기 때문에 불만과 열망을 가지고 있던 이들도 직접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학생운동이 전체운동에서 갖는 선도성은 유럽 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에서도 여러차례 목격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419 혁명에서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1980년대 518 광주민중항쟁에서 대학생들이, 1987년 6월항쟁에서 대학생들이 늘 투쟁의 물꼬를 틔웠죠.

학생운동이 선도적인 역할을 도맡았던 데에 주된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일에 매여있지 않고, 여러 사상을 널리 접할 수 있다는 점이죠. 이들은 일상적으로 여러 다양한 의견들을 폭넓게 접하고 연구할 수 있고, 고민의 결과를 구체적인 행동이나 실천으로 옮기는 데에도 큰 제약이 없습니다.
객관적인 사실이니, 이유라고 하기 보다 조건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객관적인 조건은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일에 매여있지 않기 때문에, 학생운동은 부득이하게 동맹휴업, 대학점거, 거리시위, 등의 형태를 보이게 되는데, 이런 형태의 저항은 사회의 지배계급을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수단은 되지 않는 것이죠. 지배계급의 이윤을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노동자들의 저항형태인 파업과 대조적입니다.

운동의 초기단계에서, 학생운동은 노동자운동의 파업 공장점거와 같이 지배계급을 위협하는 강한 힘이 부족했고, 노동자운동은 운동을 선도할 수 있는 선도성이나 정치성이 부족했죠. 두 운동은 서로를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

이런 분석, 즉 마르크스주의 계급이론은 1968년 유럽과 북미의 운동을 이해하는 데에도, 오늘날 한국 학생운동을 이해하는데에도 무척 유용합니다.

왜 당시 유럽 학생운동가들의 진지한 일부가 대학점거에서 공단으로 옮겨갔는지, 왜 유럽의 지배계급이 학생들의 공장에서의 선동을 물리력으로 가로막았는지, 왜 ‘학생권력‘을 부르짖던 유럽의 학생운동조직이 해체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왜 1970년대 유럽의 학생운동가들과 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가들이 공장으로 투신했는지를 이해하게 해줍니다.

오늘날 한국 학생운동의 몰락을 논평하는 이들 중 대다수는, 학생운동이 대중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피상적으로 분석합니다. 학생 대다수가 학생회 선거에 무관심한 것을 그 증거로 들죠.
그리고, 이런 비판을 수용한 학생운동조직들 중 일부는, 자신의 정치를 희석화하는 것으로 위기를 탈출하고자했구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대중운동을 표방하고 있는 한총련 운동이 그렇구요. 이들은 취업이나 복지와 같은 학생 일반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정치를 희석화했습니다.

한총련과 마찬가지로 학생회를 기반으로 하는 좌파 학생운동의 일부세력도 마찬가지였죠. 이들도 어느정도 여기에 타협하다가 결국 스스로 해체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해체는 곧 인정입니다. 자신의 정치를 희석화하는 것을 통해서는, 대중성도 얻을 수 없고, 운동 자체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죠.

위기는 이들이 무비판적으로 학생회라는 형태에 집착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학생운동이 반드시 학생회운동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를 희석화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뚜렷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했습니다. 아직까지 세력을 유지하며 활동하고 있는 몇몇 좌파 학생운동세력은, 학생회 선거에 목매달지도 않으며, 학생운동을 학생들의 문제로 국한시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학생사회도 장사 잘되는 학과 위주의 구조조정, 등록금 인상, 복지의 축소, 학생자치의 탄압, 등 숱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운동의 일부일 뿐이지, 전부이거나 필수조건이 아닌 것이니까요.

유럽에서 ‘학생권력’을 부르짖던 학생운동조직들의 해체와 한국 학생회운동의 몰락은 근본적으로 같은 맥락입니다. 거대한 사회변화에 맞서 대학만을 고집했던 편협함, 응당 전체 운동 속에서 학생운동을 자리매김시키지 못하고 학생운동의 선도성만을 고집했던 올바르지 못한 정치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학교운영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한국에는 고액의 등록금이 시사하듯 변화하는 학생사회의 계급적 기반에 대한 분석의 결여를 덧붙일 수 있겠군요.

학생회를 고집하던 학생회운동은 몰락했지만, 학생운동은 몰락한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쥐어준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사그러든 것 뿐이죠. 몇몇 논평가들이 비아냥거리듯 몰락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다수의 동의를 얻느냐 소수의 동의를 얻느냐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정치라면 없는 것이 낫습니다. 그것을 두고 기회주의라고 합니다.

#

가끔 언론에서, 유럽이나 남미에 좌파 바람이 분다고, 또 몇 년 지나니 우파 바람이 분다고 호들갑을 떨던 것을 기억하실겁니다.
언론에서 소위 ‘좌파‘라고 지칭하는 유럽의 정당들은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민당, 영국 노동당, 등일텐데 이들 정당은 적어도 1970년대 이래로 계속 정권의 주위를 맴돌았던 기성정당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좌파, 재야단체와는 다르죠.

좀 있다 말씀드리겠지만, 이들 좌파정당의 지도부들이야 말로 ‘내부의 적‘입니다. 이들은 1968년 운동의 물결을 잠재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죠. 이들이 자본주의 질서 외의 대안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것의 함축된 공개선언이 익히 알려진 ’유로꼬뮤니즘‘이죠.

이들이 정권을 잡는다 해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사회체제를 제 의지대로 움직일리 만무합니다. 이들은 우파정당들과 - 역시, 우파라고 해서 한나라당 수준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집권 초 열린우리당 정도로 하죠. - 차이점 보다 공통점이 더 많았습니다. 우파 정당들과는 다른 정책을 펼칠 수 있을거라는 환상이 집권과 동시에 깨어지자, 이들은 우파 정당과 한치도 다를 바 없는 오히려 더 한 복지삭감, 긴축정책을 시행하게 되고, 기대했던 대중들은 지지를 철회합니다. 이제 다시 우파 바람이 불죠.

하지만, 우파 바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소위 극좌파들도 지지율이 상승했죠. 극좌파라 불리우는 이들이 1960년대 베트남전 반대운동, 1968년 운동에서 배출된 학생운동 출신 운동가들입니다. 이들은 1968년 운동을 극복하면서 노동자 운동으로 투신하게 되고, 그 속에서 기반을 쌓아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한국도 유럽과 한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유럽처럼 사상이나 정치경험이 충분하지 못해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자신의 운동경력을 팔아서 정부를 장악한 자들이 80년대 함께 거리를 뛰어다녔던 동료들을 탄압하는 세상입니다. 386이라는 명함은 그들이 가져갔죠.

#

이제 아까 운을 띄웠던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1968년 운동을 이해하는데 있어, 학생운동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노동조합 관료제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노동조합 관료제는 소위 갈 때까지 가는 모양입니다.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비리사건으로 구속되고, 연이어 터지는 노동조합 간부들의 취업비리에,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가는 것을 두고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자는 하나’라던 대의원들끼리 물리적 충돌까지 있었으니까요.

엊그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연단에 오른 노동조합 간부들은 ‘총파업’을 외쳤지만,
‘한차례 충돌이 예상된다’는 언론의 호들갑과는 달리, 집회에 참석한 많은 노동자들 중 어느 누구도 민주노총이 실제 총파업을 하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동안 너무 많이 속았다는거죠.

노동조합 간부들과 현장의 노동자들은 분리되어 있고, 현장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간부들을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조합을 탈퇴하지는 않죠.

이번 노동자대회에서 목격한 집회장에서의 술자리는,
피상적으로 보기에는 신성한 집회의 자유를 흠집내는 몹씁 짓일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노동조합 관료제의 뒷면을 보여주는겁니다. 전태일 열사 기일은 챙겨야겠는데, 믿지는 못하지만 내칠 수는 없는 노동조합 지도부들의 발언을 듣고있자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던거죠.
엊그제 집회장에서 술을 마신 그 늙은 노동자는 분명, 작년까지는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연단을 집중했을겁니다.

혹 제 얘기가 생소하신 분들이 있다면, 필경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운동을 구분하지 않고 계시기 때문일겁니다.
그것은 언론과 지배계급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노동조합운동의 위기에 대해서 쾌재를 부르면서 비리를 보도합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노동조합운동의 비리를 곧 노동운동의 도덕성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죠.

하지만,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운동의 한 형태일 뿐입니다. 물론, 일상적인 시기에 노동자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유일한 저항의 수단이죠.
1968년 유럽의 운동과 같은 격렬한 저항의 물결이 일어날 때에야 비로소 노동자운동은 노동조합의 틀을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고, 결국 노동조합 관료들에 의해 운동은 꺾어야 했습니다.

#

노동조합 관료들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이해하려면, 노동조합에 대해서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자위적인 성격의 조직이지, 절대 자본주의 사회를 뛰어넘거나 극복하려는 조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조합 관료들의 행동은 노동조합의 이러한 한계를 반영합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이해를 일관되게 반영하기 보다는, 때로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촉진하고 때로는 통제하면서, 조직의 틀에 노동자들을 끼워맞춥니다.

노동자와 자본가, 적대적인 계급 사이에서 조직을 유지하려면 미묘한 줄타기를 해야하는 셈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지만, 노동자와 지배계급 둘다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니까요.
지배계급이 너무 무성의한 나머지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겠다 생각이 되면 몇 번의 집회를 열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압력을 넣었다가, 노동자들의 투쟁이 너무 격렬한 나머지 지배계급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면 투쟁을 자제시키기도 합니다.
너무 투쟁을 하지 않는 것도, 너무 열심히 투쟁하는 것도 조직의 이해관계에 맞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대중의 요구와 정서는 지시를 내린다고 만들어지는 휴대용 무기가 아닌겁니다.
소위 ‘적당히’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이들은, 통제가 어려운 ‘투쟁’보다는 ‘교섭’을 통해 그 수위를 조절하려고 하는겁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통제하고 동원하려는 노동조합 관료제를 통해서 고통받지만, 결정적 시기가 아닌 일상적인 시기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크게 저항하지 않습니다. 즉, 노동조합 선거를 통해서 사람이 몇 명 바뀐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죠.

이들의 열망은 결정적인 시기, 즉 노동자들 스스로 자본주의 사회에 파산선고를 던질 때 발현됩니다.
1968년 유럽에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틀을 순식간에 뛰어넘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프랑스 노동자들의 공장점거투쟁인데, 역사상 가장 거대한 1000만명에 이르는 규모였죠.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정도에 이르면, 자신이 직책을 맡고있는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체계는 무용해지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경우가, 노동조합 체계와 별도로 ‘노동자위원회’라는 자발적인 조직체계를 구성하기까지 했죠.

“잭 존스는 TUC(영국노총) 총평의회에서 말하기를 만약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비공식적 요소들이 총평의회를 대신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1974년 영국

하지만, 지도부를 거부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대안을 발견하지 못하자, 이들은 가출했다가 춥고 배가 고파 돌아오는 것 처럼, 다시 노동조합 관료제의 통제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제 노동조합 관료들은 이미 정도를 뛰어넘은 투쟁의 물결을 잠재운 후(현장복귀 명령),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협상테이블로 향할 것입니다.

#

노동조합 관료제의 기본골격은 이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노동조합에서 만들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지배계급이 노동조합 관료를 협상의 파트너로 인정을 해야 가능한 것이죠. 이를테면,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노동조합 관료제는 지배계급의 전략인 셈입니다.
오랜 호황을 깨면서 시작된 경제불황과 거대한 저항을 탈출하고자 하는 전략입니다. 강압적인 탄압 만으로는 한계에 다다르면서, 회유와 포섭을 시작한 것이죠. 전체를 통제할 능력이 있는 소수를 포섭해서 그로 하여금 투쟁을 잠재우고자 한 것입니다.

아레일사는 재계의 장기적 이익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사실은 이랬다. 만약 우리가 봉급을 평균 인플레이션 수준보다 낮게 유지하려 했다면, 무엇보다도 정치적 자유와 노조 활동의 자유를 양보안으로 내놓아야 했다. 만약 우리가 시장 경제 모델이 지속될 수 있는 신자본주의를 보장하려 했다면, 개혁을 받아들여야 했다.”
- 1977년 스페인

물론, 이들의 비용계산은 정확했고 머리는 복잡해집니다. 이들 역시 줄타기를 하는겁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 관료라고 해서 무조건 인정해주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죠. 어차피 탄압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에, 힘이 없는 노동조합이라면 굳이 협상까지 할 필요없이 무시하면 되는 것이고, 이 관료들의 능력이 부족해도 무시할 수 있겠죠. 물론, 반대로 노동자들의 저항의지가 거셀 때는 관료들이 잠재워준다는 약속도 있어야 하구요.

이런 지배계급의 전략이, 조직보존에 급급한 노동조합 관료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진 것이죠.

“공산당과 노동자위원회는 사회당, UGT와 손잡고 정부 고용주들과 몬클로아 협약에 서명했다. 그들은 물가가 29%나 상승한 시기에 임금 인상을 20~22%로 제한한다는 데 동의하고 ‘통화주의’에 입각해 신용을 제한하고 공공지출을 삭감한다는 것도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일련의 경제 개혁을 약속받았다.”
- 1977년 스페인

사례를 하나 들자면, 1995년 자발적인 노동조합의 협의체였던 전노협이 민주노총을 출범하게 됩니다. 민주노총은 이때까지만 해도 불법이었죠. 구속과 수배가 늘 뒤따랐습니다.
이런 민주노총이 합법화 된 것이 바로 97년 노동법개악 때입니다. 이때 김영삼 정권과 신한국당은 경제위기에 직면해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등을 통과시켜서 어떻게든 극복해보려고 했는데, (날치기 할만큼 급박했죠) 이것이 합법화를 바라는 민주노총 관료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민주노총 관료들은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투쟁열망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협상에 목을 매더니 결국 민주노총 합법화를 따내는 대신, 위의 법안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무직 노동자들까지 참가했던 거대한 총파업은 민주노총 관료들의 복귀선언 때문에 무마되고 말았구요.

1968년 유럽 노동자운동의 물결도 이런 식으로 잠재워졌습니다. 유럽의 주요 노동조합들과 정당들이 합의의 당사자였죠.

#

1968년의 거대한 투쟁을 두고 ‘학생운동의 해‘라는 제목을 붙이는 이들은, 드러나는 현상에만 주목할 뿐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왜?‘를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운동에 뒤이어 일어나 1970년대 중반까지 일어났던 거대한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거나 무시하며, 학생운동의 몰락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크리스 하먼의 <세계를 뒤흔든 1968>은 사실을 묘사하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운동의 시작과 전개,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어떤 내적 원인을 가지고 진행되었는지를 분석하는데 있어 탁월하기 때문에,
그 분석은 1968년의 유럽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됩니다.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관 없이 사회의 흐름 속에 휩쓸리기 마련입니다.
크리스 하먼의 <세계를 뒤흔든 1968>은 마르크스주의가 오늘날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지 다시 한번 알려주는군요. 추천합니다.

“금요일에 이르기가지 모든 르노공장과 거의 모든 항공 산업, 로디아스타의 전 사업장을 노동자들이 점거했고, 파리와 노르망디의 금속 산업이나 서부의 조선소들로 확산됐다. 바리케이드의 밤이 지나고 1주일째 되던 날 밤에 철도 노동자들이 기차역을 점거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투쟁은 주말을 지나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월요일이 되자 파업은 보험사, 대형 상가, 운행, 인쇄업 쪽으로 번졌다. 인쇄 노조는 일간 신문은 인쇄했지만 기타 정기 간행물은 거부했다. 2~3일 내에 900만 100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의대생과 인턴, 레지던트 들이 운동에 참가해 병원의 고질적인 위계 질서의 종식을 선언했다. 미대생과 화가는 미대 건물을 장악하고 그곳을 포스터 제작 본부로 바꾸어 운동을 지지하는 포스터 수천 장을 집단 창작했다. 영화 제작자들은 경쟁적인 칸 영화제에서 철수하고 영화 산업을 이윤 동기와 독점에서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다. 프로축구 선수들은 축구연맹 본부를 점거했다.”
“16만 8000명의 군인 중 12만명이 징집병이었고, 그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파업에 동조했다. 위원회들이 꾸려져서 상관의 명령에 반대하고 수송과 장갑차의 출동을 거부할 조짐이 나타났다.”
“경찰 개개인은 근무를 마친 뒤 불필요한 언쟁에 휩싸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모자와 뺏지를 숨겨야 하는 현실의 불만이 있었다.”
“사람들 스스로 그토록 강하다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 1968년 5월 프랑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11-26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어요^^